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거린다. 왠지 외로워 보인다. 나르키소스에 관한 신화 때문일 테다.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는 갓 태어난 그에게 “제 자신을 모르면 오래 살 것”이란 말을 했다. 미남으로 성장한 나르키소스에게 많은 사랑이 쏠린다. 허나 그는 관심이 없다. 사랑을 거절당한 아메이니아스는 심장이 멎는다. 에코는 남의 말만 되풀이 한다. 그에 대한 사랑과 함께 분노도 커져 갔다. 가질 수 없는 대상을 파고하고픈 욕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 요정들은 복수의 신 네메시스에 의탁해 그에게 저주를 건다. 호수에 바투 다가앉은 나르키소스는 제 얼굴을 본다. 그리고선 사랑에 빠진다. 손이 닿을 때 마다 부셔지는 연모의 대상에 애달파 한다. 식음을 전폐하고 호수에 비친 제 모습을 탐닉한다. 빠져든다. 하데스에게로 가버린다. 수선화만 남긴 채.

 나르키소스는 꽃만 남긴 게 아니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도 남겼다. 프랑스 심리학자 알프레 비네가 1887년 처음 사용했다. “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페티시즘의 한 유형”이라 정의했다.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 대가들도 이 말을 곧잘 사용했다. 오늘날엔 거의 일상어가 되었다. 허나 이 말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다. 성의학 창시자 중 한명인 영국의사 헤빌럭 엘리스는 성도착증으로 규정했다. 주류 정신분석학자들은 성적 발달의 정상 단계로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초식남이란 말의 정의도 잗다란 차이가 있다. 허나 나르시시즘이 강한 남자들이란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제 자신을 아끼다 보니 이성에는 관심이 덜하다. 자기 관리에 열중하느라 짐짓 쿨 해 보이기도 하다. 나르키소스와도 닮았다. 이성을 욕망하기 보단 자신을 욕망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이성의 관심을 가끔 받기도 한다. 다만 눈에 차지 않을 뿐이다. 알프레 비네의 말처럼 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기에 자잘한 욕정은 쉬이 해소할지 모른다. 볼수록 나르키소스가 겹친다.

 그렇다고 초식남을 탓할 수 없다. 서로를 잘 믿지 못하는 풍조가 초식남을 양산했을지 모른다. 작가 박경리는 40년 전에, 이미 우리사회를 불신시대로 규정했다. 남을 믿지 못하면 믿을 수 있는 건 혈연이나 내 자신 밖에 없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빼앗긴 마음을 되찾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에 대한 애정은 제 의지로 키울 수 있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가 자신에게 천착하는 초식남의 뿌리가 아닐까. 육식남은 사냥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온 몸이 생채기로 가득하다. 초식남은 제 울타리에서 덜 먹는 대신 덜 아프자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한다. 제 자신을 페티시즘의 한 유형으로 여기는 건 결국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다. 알다시피 인간은 밥만으론 살 수 없다.

 초식남은 가여운 존재다. 나르키소스는 일방적 구애나마 자주 받았다. 초식남은 대중에게 소외된 채 지난한 밤을 홀로 지새운다.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며 이상형이 짐짓 제 마음을 먼저 열어주길 바랄 뿐이다.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연상된다. 결국 이들에게 걸린 과한 나르시시즘의 저주는 제 자신이 걸어 놓은 겹겹의 방어막이다. 나르키소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생채기는 아랑곳 말고 사냥터에 나서야 한다. 사냥물의 뒷다리라도 물어야 이가 여물어 지고, 상대의 마음이라도 할퀴어야 발톱이 야물어 질 터. 부러 평원에 나가기 어렵다면 육식남들과 섭슬리는 일도 고려해 볼 만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과도한 외로움과 종족 번식 실패로 초식남은 멸종할게 자명해 보인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를 남겼지만 초식남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초식남들의 밤이 외로움에 흔들린다. 하늘거린다. 왠지 처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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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8-06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밤바는 정서의 바탕이 참 단단하신 분인거 같아요.
바밤바의 밤도 외로움에 흔들리고 있는거 아니야?

바밤바 2009-08-06 21:41   좋아요 0 | URL
헤헤. 초식남 테스트 해보니까 90% 이상이라던데.. 누나는 건어물녀?ㅎ

무해한모리군 2009-08-07 1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 생각엔 대부분의 여자들이 냄비째 라면 먹고 머리 질끈 묶고 돌아다니고 그러는듯 한데..

바밤바 2009-08-07 22:02   좋아요 0 | URL
역시 누나는 소 쿨~~ 멋져부러~~ 멋져부러~~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