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숙한 아이들을 싫어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숙한 척 하는 아이를 싫어한다. 어릴 적 조숙한 척 하는 아이들은 주위의 영탄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어른스러웠으며 어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한 조숙함을 또래를 대할 때도 나타난다. 짐짓 타이르는 말투나 무리 중 리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영특한 아이들에겐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구별 짓기’로 표출된다. 이러한 구별 짓기의 한 형태가 어른스러워 지는 거다. 어른스러워 짐으로써 집단 내 권력을 획득하고 자신의 세를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어른스러움은 주위의 과한 기대와 조숙한 천재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 덕에 하나의 행동 양태가 된다.

 기호지세(騎虎之勢)란 말처럼 이젠 유치해지거나 제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수도 없다. 계속해서 어른스러워 져야 하고 좀 더 유리한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선행학습은 기본이고 무리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 이건 단지 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어른스러움이 주는 특혜의 단 맛은 이러한 행동 양태를 꾸준히 강화 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아이를 영악하다고 본다. 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악하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적 상태를 거부하고 중립으로 나아가는 아이에겐 애정이 쏟아지지 않는다. 세상을 자아와 비자아의 투쟁으로 보는 각박함 마저 느껴진다.

 이런 애어른 들은 보통 소속집단에 대한 경멸과 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다. 나르시시즘이 형성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계층적 분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애어른을 추어올리고 짐짓 인간의 발전된 상태로 여기는 사회적 무의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선망하지만 아이가 빨리 사회적 규범을 익혀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길 바라는 모순된 바람이 애어른 찬양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조숙한 천재인 척 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은 사춘기의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엇나가기 마련이다. 이들 중 일부는 조숙함을 기대하는 주위의 시선에 걸맞은 행동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자신의 아이에게 이러한 행동을 무의식중에 강요한다. 이런 무의식이 일종의 ‘아비투스’가 되어 제 부모마냥 아이 또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한다.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하거나 지도력이 있는 아이의 부모를 보면 대부분 경제력이 높은 편이다. 유전 형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부모가 상속해 준 아비투스가 작용 했다고 보는 게 옳다. 조숙한 아이들 중엔 생존에 유리한 ‘선택’의 결과로 어른스러운 체 하는 아이가 많다는 거다. 애어른에게서 발톱과 이빨만 없는 무서운 육식 동물이 연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괴물을 만든 미치광이 과학자로 매도 됐다. 다들 제 아이를 조숙하게 만든다면 자신이 프로메테우스가 될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부모의 욕망과 사회적 기제가 작용한 애어른은 괴물에 가깝다. 아이는 아이답게 내버려 두자. 오히려 어른인 냥 행세할 때는 야단을 치고 제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 양태를 띄라고 질책하자. 무엇보다 어른스러움이란 부자연스런 행위를 아이가 깨달아야 한다. 어른들이 칭찬만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애써 ‘아폴로’가 되려 하지 않고 ‘디오니소스’로 살아 갈 테다. 굳이 산파법을 쓰지 않아도 아이는 자신 안에 숨겨진 디오니소스에 면모를 깨닫고 귀의할 테다.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칭찬은 아이를 어른이 가진 욕망의 피조물로 만들 뿐이다. 조금 더 느리게 살고 나누며 살기 위해선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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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랑 2시간 동안 스타 크래프트를 하고 왔다. 간만에 하면서 느낀 건 이제 스타를 끊어야 겠다는 거다. 스타를 하던 중 같은 편이던 넘은 나와 동맹을 끊고 나를 엘리 시켰다. 팀플전에서 나 혼자 3명을 밀어버리자 상대편 3명이 내게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덩달아 나도 욕을 했다.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긴커녕 짜증이 났다. 덕분에 다시금 마음이 강퍅해졌다.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는다. 전설적인 차이콥스키 피협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협주곡을 들으면 상당한 기교가 요구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도 난곡으로 유명하나 그리 어렵게 들리진 않는다. 연주하는 사람은 힘들지 모르나 듣는 사람은 오히려 박력있는 반주에 더 귀가 간다. 라흐마니노프는 다르다. 손으로 아무 건반을 누른다 하더라도 저 속도감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위압감을 준다. 데이비드 할프갓이 이 곡을 연주하다 정신이 나간 것도 이해할만 하다.  

 헌데 호로비츠는 이 난곡을 정확하게 연주한다. 반주가 따라오기 벅차다. 프란츠 라이너와 같은 거장의 반주 인데도 버거워 보인다. 몇 개의 미스터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나 또박또박한 음색이 자리를 메운다.  물론 작곡가가 피아니스트이다 보니 피아노를 돋보이게 하려 손을 썼을 테다. 헌데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에도 재주가 있었기에 교향악 반주에도 신경을 써서 그럴 테다.  

 한 때 샤인이란 영화 덕에 이 곡은 매우 유명했었다. '악마의 곡'이라고도 불리었다. 헌데 악마적인 매력이 딱히 나타나진 않는 듯하다. 차이콥스키의 멜랑꼬리와는 또 다른 우울을 들려주는 라흐마니노프지만 이 곡에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충돌에 더 신경을 쓴 듯하다. 오히려 서정성이나 귀에 잘 달라붙는 익숙함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더 잘 드러난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오히려 라흐마니노프 인생 후반기의 황폐함과 잘 어울린다. 신경쇠약을 이겨내기 위해 다소 과격한 곡을 만들었지 않나 싶다. 물론 여전히 아름답다. 다만 이 아름다움은 라흐마니노프가 줬던 기존의 아름다움과 층위가 다른 듯하다. 특히 1악장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 떠오를 정도로 관악기 소리가 우렁차다. 그 후 질주하는 피아노 연주는 '두드린다'는 표현이 절적하다 싶을 정도로 격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병행 한 친머만의 앨범이 있다. 번스타인도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와 연주를 번갈아하며 청중을 즐겁게 해줬다. 헌데 라흐마니노프의 이 곡은 이러한 동시작업이 불가능 할 듯하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립이 긴장감 있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혹시나 지휘와 연주를 병행한 음반이 있는 지 궁금하다. 글을 쓰다 보니 스타 크래프트를 하며 거칠어졌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헌데 호로비츠의 이 앨범은 안정 보단 경탄을 준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시디를 바꿔야 겠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정신 건강엔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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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글을 쓰기 힘들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마음을 살포시 내려 놓는 글이 아닌 마음에 쇳덩이 같은 거 하나 올려 놓는 글이 좋은 글이란 생각이었다. 덕분에 글이 내게 줬던 치유의 기능이 시들해졌다. 정치하고 엄밀한 글에 대한 집착은 일상을 강퍅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모아 글을 쓰니 문장은 촘촘해졌지만 감정은 성기게 됐다. 아무 것도 아닌 걸 무언가로 포장하려는 괜히 허튼 힘만 썼다. 알심을 부렸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하다. 미하일 플레티네프의 차이콥스키 '비창'을 듣는다. 다소 곡이 빠르다. 왠지 푸르트뱅글러 마냥 주정적인 해석의 연주인 듯하다. 감정이 섞갈릴 땐 이런 주정적 해석이 정신 건강에 좋다. 푸르트뱅글러 보단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더 마음을 다독여 주지만 말이다. 역시 도입부를 넘어서고 주제 선율이 나오니 지나치게 느리다. 탐미적이고 규범적인 카라얀과는 다른 슬픔이 느껴진다. 가슴이 넘실거린다. 

  

 

 

 

 

 

 플레티네프의 음반이 몇 장 있긴 하다. 헌데 재생이 안되거나 깨졌다. 배송 불량 덕이다. 반품을해야지.. 하다가 몇 년이 흘렀다. 그래서 이 음반 외엔 플레티네프의 음반이 없다. 곡을 듣고 있자니 말러의 곡을 듣는 듯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지나치게 터뜨린다.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단이다. 스베뜰라노프가 자주 지휘했던 교향악단으로 알고 있다. 30년 전쟁 이후로 영토국가의 개념이 생기고 프랑스 혁명 이후로 민족주의가 발현했다곤 하나 음악에서 그 나라의 고유 정신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임의적으로 구획된 국가에 비해 더 국가의 속살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는 러시아 교향악단의 손에서 가장 그럴싸한 음을 보여준다.  

 장한나는 이 곡을 듣고 차이콥스키의 슬픔이 전이돼 눈물이 났다고 한다. 난 이 곡을 듣고 눈물이 난 적은 없다. 다만 좀 침울해지고 비애에 젖는다. 그리고선 오케스트라의 세세한 음에 집중한다. 글을 쓰면서도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낯익은 음악이라서다. 어릴 때 보았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하얀 설원을 생각하며 차이콥스키를 듣는다. 실제 촬영 장소는 캐나다 근방이었단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겐 그곳이 온전한 러시아 대륙이고 시베리아다. 오마 샤리프의 젖은 눈빛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다.   

 오늘은 니체에 관한 책을 읽었다. 김진석 교수가 쓴 '왜 니체는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이다. 철학에 관한 책을 오롯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내 뇌세포를 잠시 활성화 시키고 사물을 달리보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 책을 얼추 다 읽어 가지만 이야기는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세세한 각론 몇개와 글을 읽으며 했던 나의 잡생각들이 얼개를 이룬다. 프로이트와 데리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 데 1년 새 나는 이런 철학자들의 이름이 눈에 익었고 머리에 남았다. 덕분에 예전처럼 다른 책을 읽어 부족한 나를 채워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요즘의 민주주의와 법치와 그리고 신문에 난 세상사들을 떠 올려 본다. 니체는 한 때 바그너리안이었지만 어느새 바그너를 증오하고 배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히틀러의 아리안주의의 첨병이 되었고 과격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둘의 관계가 꾸준히 친밀했다면 새로운 사상적 괴물을 낳았을 지 모른다. 니체는 그런 걸 저어하여 바그너를 멀리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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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0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트네프의 음반은 차이코프스키 사계(Four seasons)를 살펴보다가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플레트네프는 안스네스와 종종 비교하게 되는데요. 무엇보다도 강한 직관으로 뛰어난 해석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터치의 내밀함은 안스네스, 풍기는 분위기는 플레트네프쪽이 더 좋다는 생각도 함께 해 봅니다.

한편 이 음반에 실린 차이코프스키 6번(비참;비창)연주는 낙차가 약간 크게 느껴지지만 어떤 선은 넘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스스로 뭔가 애매한 것이, 6번 교향곡과 음반에 대한 정리를 좀 더 해봐야겠네요^^


바밤바 2009-10-01 13:04   좋아요 0 | URL
음악 평론가 허제 씨는 이 음반을 최고의 '비창' 명반으로 꼽았더랬죠~
요즘 음악을 세밀하게 듣다 보니 같은 곡도 달리 들린답니다.
근데 써클님이 6번 교향곡에 대한 정리를 하신다니 왠지 낯선데요~ㅎ
지금도 왠만한 평론가 저리가라 하는 실력이신데..^^;;

드팀전 2009-10-0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이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사계'가 컴필레이션 되어 있지요. 제가 처음 들었던 사계가 플레트네프의 음원이었는데...서울음반 라이센느 LP였습니다. 여기 컴필레이션된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LP를 창고에 넣어놓아서...파스텔톤의 표지가 예뻐서 산 음반이었는데.
.. & ..

바밤바 2009-10-01 13:06   좋아요 0 | URL
여기 있는 사계 음반도 깨져서 못 듣는답니다. 표지가 예쁘죠.. 예전에 클래식 음반 표지에 실린 그림들을 분석하는 책을 보았는데, 나름 적절한 사연으로 그림을 선택했더라구요. 이 음반의 그림에선 고독과 고뇌가 느껴지네요~ㅎ

2009-10-0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1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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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는 매혹적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이 연상된다. 프로테스탄트적 경건함이 묻어난다. 헌데 책은 신에 대한 경건함이 아니다. 엄마에 대한 간절함이다. 바람이다. 엄마가 돌아오라고 기도한다. 헌데 표지의 그림에서 엄마가 연상된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듯하다. 다 큰 여성이 엄마가 돌아오라 기도하는 장면으로도 보인다. 허나 소설 속 딸들은 도회적이다. 시골느낌 그득한 표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표지의 그림은 엄마가 누군가에게 소원이 이뤄지길 부탁하는 거다. '논에 물들어가는 장면과 자식 입에 밥들어가는 모양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어느 농군의 기도다. 이 농군이 엄마다. 

 서울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 다들 바빠서 그랬을 테다. 그제서야 뒤돌아 본다. 제 어미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크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거다. 엄마의 눈은 너를 향해 있는 데 네 눈은 엄마의 눈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렇다. 엄마는 네 부담스러움을 알기에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거다. 엄마가 아비의 뒤를 놓친 건 닿지 않을 남편보다 쉬이 닿을 네 뒤를 좇으려다 이내 멍해진 거다. 그리고선 생에 가장 처절한 '인정투쟁'을 벌인다. 네 어미 여기있다고.. 제가 원했듯 원하지 않았든 네 어미는 인정투쟁을 벌인다. 이제 간절함과 애틋함은 그대들 손에 넘어갔다. 

 다들 어미에 관한 상념에 잡힌다. 살가웠던 추억은 쓰리다. 아팠던 추억은 더 깊게 파인다. 가슴에 크나큰 홈이 하나 생긴다. 그럴수록 기억을 붙잡으려 치열하다. 아직 보낼 수 없기에 스스로를 학대한다. 아픈만큼 자위한다. 이렇게 아프면 여태껏 쟁여둔 죄스러움이 조금은 사위어 들 듯 하다. 그렇다고 가뭇없이 사라진 어미가 방불히 눈 앞에 밟히진 않는다. 그저 가슴에 아로새겨진 추억의 몇자락만 붙잡고 네 오빠를 탓하고 네 동생을 탓하고 무엇보다 네 무딘 감성을 탓한다. 

 아비도 애달프다. 어미가 이리 갈 줄 몰랐다.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한 처자는 그저 당연한 존재였다. 손을 잡아주지도 마음을 열어 본적도 없는 듯하다. 그저 역마살 끼인 내 삶의 기항지처럼 영원히 그대로이길 바랐다. 아니 당연했다. 헌데 당신이 없으니 아비는 눈물이 여울진다. 가슴에 멍울이 생긴다. 자식들이 흘기는 눈초리도 감내하기 버겁다. 당신이 보고싶다. 밤을 낮삼아 그대에게 해줄 얘기가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가난한 마음이 여지껏 푼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쉴 그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아프오. 아프다고 해도 무심한 그대 눈빛에 아팠오. 너네 걱정하다 고리삭은 내 몸을 보고선 다시금 너네 걱정하는 내 잔망스러움에 아팠오. 집안 꾸려나간다고 허리가 아픈건 아픈게 아니었오. 내 인생 찾자고 가출해 버리는 드라마 속 누구처럼 삶이 구접스러워 보여 아픈 것도 아니었오. 마음 기댈 때가 없어 아팠오. 무심한 딸년들이 나 없이도 잘 해내는 게 왠지 모르게 섭섭해서 아팠오. 큰 아들 재주를 알아주지 못하는 무심한 세상 때문에 아팠오. 이젠 그대들과 살갗을 부빌 수 없어 아프오. 

 이렇듯 엄마는 갔다. 다들 제 가슴에 아로새겨진 엄마란 이름에 눈가가 촉촉했을 터이다. 내 어미도 저리 허랑히 잃어버릴까 간만에 엄마에게 전화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세상사 각박하다 고개숙인 나약함을 책망하는 자도 있을 테다. 엄마를 위해서 다시 일어서리란 각오를 날카롭게 벼리는 사람도 많을 테다. 덕분에 엄마의 마음은 다습해진다. 내 꿈을 못 이루고 내 삶이 소박해도 엄마 생각하면 다 살만한 세상이다. 나 또한 표지 속 그림마냥 손을 모으고 기도 드린다. 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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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심함과 일별을 고하라 - [엄마를 부탁해]
    from 컬쳐몬닷컴 2009-10-09 15:59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 스스로의 의지로 집을 나갔으면, 차라리 엄마를 이해라도 해볼 수 있을까. 오랜 지병 끝에 세상과 이별한 것이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해놓았을까.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실종, 여느때처럼 자식들의 집에 들르러 온 길,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하필이면 이날 남편과 떨어져서 지하철을 놓치게 된다. 벌어진 상황 자체가 엄마에 대한 무심함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일이 벌어지는 날은 돌아보면..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새 음반이 나올 예정이다. 111주년 기념반이라 한다. 60여 장의 음반이 포함돼 있는데 내가 가진 음반과 20장 정도 겹친다. 이전부터 회자되온 명연으로 가득하다. 주위에 클래식에 입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주고프다. 그만큼 좋다. 

 다만 이러한 저가 물량 공세는 판매자와 구매자 둘 다에게 단점이 있다. 우선 판매자는 음반을 염가로 팔게 됨으로써 기존 음반 구매자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기존 구매자는 정상 가격에 음반을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염가음반에 비해서 웃돈을 주고 음반을 구매했단 생각이 들 수 있다. 물론 음반을 먼저 구입함에 따라 음반이 주는 효용을 충분히 누렸을 테다. 또한 가격에 대한 탄력성(elasticity)이 낮은 구매자라면 이러한 염가 음반에 대해 개의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가격에 대해 매우 민감한 구매자라면 차후 사고 싶은 음반의 구매시기를 늦출 가능성이 높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의 아포리즘 마냥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싼 가격에 음반을 즐길 수 있으니, 좀 더 참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다. 클래식을 향유하는 계층이 문화적 소양이 높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 효율이 최우선시 되는 시대에 이러한 가격 정책에 쓴맛을 다실 클래식 애호가가 다수일 테다. 결국 이러한 구매자들의 구매 지연 행위는 음반 시장 위축을 낳고 다시금 저가 음반을 내어 이러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염가 음반을 구매한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단점은 또 있다. 보통 비싸게 산 물건일수록 사람들은 애착을 보이기 마련이다. 가격이 높을수록 기회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헌데 이렇게 저렴한 음반은 음악 자체에 대한 애착을 떨어뜨린다. 가격이 가치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지만 꽤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현 시대다. 아무래도 이러한 상품에 대한 가치를 낮게 둘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음반을 쟁여놓고 안 듣거나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개연성이 높다. '저렴한 가격의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이 가진 장점은 많다. 무엇보다 훌륭한 연주에 좋은 선곡이다. 내가 가진 음반과 3분의 1이 겹치지만 살짝 마음이 동하는 이유다. 몸을 위해 운동을 하고 두뇌를 위해 독서를 하듯 마음을 위해선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다. 음악은 영혼을 살찌운다. 살찌기 좋으라고 DG에서 음반이 나왔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음악까지 저렴하진 않으니 귀를 기울여도 좋다. 다만 낱장으로 구입했을 때의 설렘이나 푼푼함까진 기대해선 안된다. 열심히 정진하겠단 어기찬 다짐이 있어야만 이 음반은 오롯이 그대 영혼을 다습게 해줄 테다. 저렴한 물량 공세에 대응하기에는 이러한 성실함이 최고다. 혹 음악을 듣는 데 이렇게까지 바지런 피우며 들어야 하냔 의문도 들 수 있다. 생활이 팍팍하여 영혼이 핍진할수록 그런 의문이 심할 테다. 오히려 그렇기에 마음을 써서 음악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운동도 몸이 성한 사람보단 어딘가 불편한 사람이 애써 해야 되는 것. 지난한 삶이 비루해 보일 때 마음을 기울이자. 클래식을 듣자. 마침 물건도 좋고 가격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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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2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음반 다른 내용의 페이퍼를 보니 재밌기고 하도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

최근 들을 만한 신보는 마이너쪽이 훨씬 활발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메이저 음반사가 앞날을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몰라도 과거 명연들을 싸게 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팔 수 있을때 팔아볼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생각보다 빨리 매체의 교체가 이뤄질 것도 같은데, 아직 뚜렷한 대안이 없어 보이기도 하구요.

이번 DG111 주년 기념반은 구성에 있어서 놀랄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음반들의 가격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면도 있을 것 같네요.

바밤바 2009-09-28 08:11   좋아요 0 | URL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작품 번호가 111이라서 111이란 숫자를 특별히 여긴다 하네요. ㅎ 글쓰는 데 옆에 누가 자꾸 떠들어서 서둘러 봉합한 구석이 있답니다. 좀 더 많은 생각을 담고 싶었는 데 다시 읽어보니 좀 아쉬운 구석이 많네요~ㅎ

드팀전 2009-09-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거의 매력을 못느끼는 사람중에 한 명입니다. 중복도 상당히 많지만 중복되지 않는 연주자들은 얼핏보기에 제가 별로 크게 관심이 없는 연주자이어서..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ㅋㅋ 마이스키,랑랑,터펠,힐러리한...

바밤바 2009-09-28 08:12   좋아요 0 | URL
전 두다멜의 말러와 포고렐리치나 랑랑의 연주가 듣고 싶었거든요. 근데 요즘 자금이 궁하다 보니 연이 닿으면 듣겠지 하고 놔두었는 데 이 앨범에 수록돼 있더라구요~ ㅎ 팀전님 정도 마니아시면 구매하지 않아도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