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숙한 아이들을 싫어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숙한 척 하는 아이를 싫어한다. 어릴 적 조숙한 척 하는 아이들은 주위의 영탄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어른스러웠으며 어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한 조숙함을 또래를 대할 때도 나타난다. 짐짓 타이르는 말투나 무리 중 리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영특한 아이들에겐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구별 짓기’로 표출된다. 이러한 구별 짓기의 한 형태가 어른스러워 지는 거다. 어른스러워 짐으로써 집단 내 권력을 획득하고 자신의 세를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어른스러움은 주위의 과한 기대와 조숙한 천재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 덕에 하나의 행동 양태가 된다.
기호지세(騎虎之勢)란 말처럼 이젠 유치해지거나 제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수도 없다. 계속해서 어른스러워 져야 하고 좀 더 유리한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선행학습은 기본이고 무리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 이건 단지 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어른스러움이 주는 특혜의 단 맛은 이러한 행동 양태를 꾸준히 강화 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아이를 영악하다고 본다. 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악하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적 상태를 거부하고 중립으로 나아가는 아이에겐 애정이 쏟아지지 않는다. 세상을 자아와 비자아의 투쟁으로 보는 각박함 마저 느껴진다.
이런 애어른 들은 보통 소속집단에 대한 경멸과 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다. 나르시시즘이 형성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계층적 분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애어른을 추어올리고 짐짓 인간의 발전된 상태로 여기는 사회적 무의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선망하지만 아이가 빨리 사회적 규범을 익혀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길 바라는 모순된 바람이 애어른 찬양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조숙한 천재인 척 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은 사춘기의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엇나가기 마련이다. 이들 중 일부는 조숙함을 기대하는 주위의 시선에 걸맞은 행동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자신의 아이에게 이러한 행동을 무의식중에 강요한다. 이런 무의식이 일종의 ‘아비투스’가 되어 제 부모마냥 아이 또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한다.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하거나 지도력이 있는 아이의 부모를 보면 대부분 경제력이 높은 편이다. 유전 형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부모가 상속해 준 아비투스가 작용 했다고 보는 게 옳다. 조숙한 아이들 중엔 생존에 유리한 ‘선택’의 결과로 어른스러운 체 하는 아이가 많다는 거다. 애어른에게서 발톱과 이빨만 없는 무서운 육식 동물이 연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괴물을 만든 미치광이 과학자로 매도 됐다. 다들 제 아이를 조숙하게 만든다면 자신이 프로메테우스가 될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부모의 욕망과 사회적 기제가 작용한 애어른은 괴물에 가깝다. 아이는 아이답게 내버려 두자. 오히려 어른인 냥 행세할 때는 야단을 치고 제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 양태를 띄라고 질책하자. 무엇보다 어른스러움이란 부자연스런 행위를 아이가 깨달아야 한다. 어른들이 칭찬만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애써 ‘아폴로’가 되려 하지 않고 ‘디오니소스’로 살아 갈 테다. 굳이 산파법을 쓰지 않아도 아이는 자신 안에 숨겨진 디오니소스에 면모를 깨닫고 귀의할 테다.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칭찬은 아이를 어른이 가진 욕망의 피조물로 만들 뿐이다. 조금 더 느리게 살고 나누며 살기 위해선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