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을 쓰기 힘들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마음을 살포시 내려 놓는 글이 아닌 마음에 쇳덩이 같은 거 하나 올려 놓는 글이 좋은 글이란 생각이었다. 덕분에 글이 내게 줬던 치유의 기능이 시들해졌다. 정치하고 엄밀한 글에 대한 집착은 일상을 강퍅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모아 글을 쓰니 문장은 촘촘해졌지만 감정은 성기게 됐다. 아무 것도 아닌 걸 무언가로 포장하려는 괜히 허튼 힘만 썼다. 알심을 부렸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하다. 미하일 플레티네프의 차이콥스키 '비창'을 듣는다. 다소 곡이 빠르다. 왠지 푸르트뱅글러 마냥 주정적인 해석의 연주인 듯하다. 감정이 섞갈릴 땐 이런 주정적 해석이 정신 건강에 좋다. 푸르트뱅글러 보단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더 마음을 다독여 주지만 말이다. 역시 도입부를 넘어서고 주제 선율이 나오니 지나치게 느리다. 탐미적이고 규범적인 카라얀과는 다른 슬픔이 느껴진다. 가슴이 넘실거린다.
플레티네프의 음반이 몇 장 있긴 하다. 헌데 재생이 안되거나 깨졌다. 배송 불량 덕이다. 반품을해야지.. 하다가 몇 년이 흘렀다. 그래서 이 음반 외엔 플레티네프의 음반이 없다. 곡을 듣고 있자니 말러의 곡을 듣는 듯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지나치게 터뜨린다.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단이다. 스베뜰라노프가 자주 지휘했던 교향악단으로 알고 있다. 30년 전쟁 이후로 영토국가의 개념이 생기고 프랑스 혁명 이후로 민족주의가 발현했다곤 하나 음악에서 그 나라의 고유 정신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임의적으로 구획된 국가에 비해 더 국가의 속살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는 러시아 교향악단의 손에서 가장 그럴싸한 음을 보여준다.
장한나는 이 곡을 듣고 차이콥스키의 슬픔이 전이돼 눈물이 났다고 한다. 난 이 곡을 듣고 눈물이 난 적은 없다. 다만 좀 침울해지고 비애에 젖는다. 그리고선 오케스트라의 세세한 음에 집중한다. 글을 쓰면서도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낯익은 음악이라서다. 어릴 때 보았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하얀 설원을 생각하며 차이콥스키를 듣는다. 실제 촬영 장소는 캐나다 근방이었단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겐 그곳이 온전한 러시아 대륙이고 시베리아다. 오마 샤리프의 젖은 눈빛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다.
오늘은 니체에 관한 책을 읽었다. 김진석 교수가 쓴 '왜 니체는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이다. 철학에 관한 책을 오롯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내 뇌세포를 잠시 활성화 시키고 사물을 달리보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 책을 얼추 다 읽어 가지만 이야기는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세세한 각론 몇개와 글을 읽으며 했던 나의 잡생각들이 얼개를 이룬다. 프로이트와 데리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 데 1년 새 나는 이런 철학자들의 이름이 눈에 익었고 머리에 남았다. 덕분에 예전처럼 다른 책을 읽어 부족한 나를 채워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요즘의 민주주의와 법치와 그리고 신문에 난 세상사들을 떠 올려 본다. 니체는 한 때 바그너리안이었지만 어느새 바그너를 증오하고 배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히틀러의 아리안주의의 첨병이 되었고 과격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둘의 관계가 꾸준히 친밀했다면 새로운 사상적 괴물을 낳았을 지 모른다. 니체는 그런 걸 저어하여 바그너를 멀리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