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이 좋아 거리를 쏘다녔다. 가을의 스산함보단 낮의 청신함이 거리에 미만해 있었다. 너붓거리며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며 발이 가는 데로 몸을 맡긴다. 자늑자늑 발을 옮기는 행인들 사이로 범박한 생각이 머리를 메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푸념하고 다니던 근천스런 어제가 떠오른다. 승하지 못한 재주를 탓해야겠으나 나보단 남을 탓하는 일이 더 수월하다.

이젠 이렇게 마음을 눅이고 다닐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터. 번잡스런 기억만이 공간을 채운다. 어제 꽤 괜찮은 회사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퇴짜를 놓았다. 지난한 시간을 들여 채운 나의 존재증명이 하잘 것 없는 메일로 거부당했을 때, 순간의 불쾌함을 어찌할 수 없다. 또 다른 실패한 무리와 함께 상처를 핥으며 아픔을 짓누른다. 따스한 겨울은 마음만으로 맞이할 수 없기에 하나의 존재 증명이 담을 넘어 겨울의 양식이 되길 바란다.

마음이 온전치 못하니 글이 수활하다. 글 짓는 일을 기꺼워하고 밥 짓는 이를 청안시하던 베짱이의 겨울은 다습지 못할 뿐이다. 허나 겨울 들머리에 추위에 파들거리더라도 마음만은 실팍했으면 한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은 서울의 가을엔 낮보다 밤이 눈부시다. 오늘은 누구를 희원하고 또 푸슬푸슬한 마음을 다독일지 모르겠다. 김해경이 동경에서 멜론을 애타게 찾았을 때, 그 때의 마음이 소주처럼 썼을 테다. 잔을 기울이며 가을바람을 눅여줄 친구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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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5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6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자에 이르러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생겼다. 다 내가 불민하다 여기며 마음에서 덜어내려 했으나 더께로 쌓인 불신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다 철학 책 몇 권을 읽었다. 책을 두꺼웠고 생각할 거리는 깊었다. 이런 저런 생각의 실타래를 풀다 보니 마침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란 ‘나와 가치관이 틀린 사람’ 이라는 거다.

가치관이 틀리다는 건, 다르다는 것과 말 그대로 구별된다. 관용(똘레랑스)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섰다는 거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몇몇 가치를 행동이나 일상에서 부정하는 자들에겐 카이사르가 가졌다는 ‘클레멘티아(Clementia)'를 적용하기 힘들다. 지당하다 여기고 벼려왔던 가치들이기에 그들의 잔망스러움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역겹기도 하다. 고종석이 이야기 했듯 역겨움이란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라기 보단 미추(美醜)의 개념이다. 나와 가치관이 틀린 사람에게선 추악함을 느끼고 인상이 찌푸려진다.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 사이에 있어 최대 공약수라 부를 수 있는 개념 탑재가 부재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누그리려고 해도 부질없는 고집은 이런 이들에게 손사래부터 치게 한다.

물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은 쉬이 받아들인다. 기꺼이 섭슬리기도 한다. 다른 가치관엔 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기에 그렇다. 그렇게 일상에 엄밀하고 위악을 떨며 살기엔 심정이 여려서 일 테다. 물론 가치관이 틀린 이 중엔 나와 친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20살 이전에 교류를 한 지인으로서 도덕 기준으로 밀어냄 보단 공유하는 추억의 이끌림이 강한 슬거운 이들이다. 혹 다른 잣대를 댄다며 내게 눈을 흘기는 자들도 있을 테다. 성인군자가 아닐뿐더러 지극히 소박한 자아를 가진 내겐 그 정도 편애는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런 잗다란 고민에 나만의 명제를 뽑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철학의 힘이 크다. 소소한 일상을 매끄럽고 날카롭게 다질 수 있는 힘의 뒤에는 선인(先人)들이 누적시킨 철학이 있다. 내가 추려낸 명제라는 것 또한 선인의 지식에 대한 무의식적 표절일 줄 모른다. 알 수 없다.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도 있다. 미시 파시즘을 경계하고 무의식적 폭력을 경계하며 주위를 꾸려나가다 보면 세상이 나를 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에 그렇다. 아침부터 말이 길다. 명확하지 않은 고민의 흔적이 너울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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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15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맑아지는 것이 득도!
저도 자꾸만 다른 것을 못참는 인간이 되는 듯해 걱정이예요.

바밤바 2009-10-15 12:38   좋아요 0 | URL
다른게 아니라 틀린 거~ ㅎ 누난 상글상글 웃고 다니니까 걱정 안하셔도 될 듯. 포커 페이스인가.. ^^;;
 


광장은 스스럽고 밀실은 음란하다. 마음이 가는대로 기억이 배설된다. 구접스런 말들이 가뭇없이 행해지는 밀실의 황홀함은 투르크의 할렘보다 더 매혹적이다. 덕분에 밀실에서와 광장에서의 서로 다른 자아가 생겼다. 광장의 나는 경박하고 주위 사람에게 쉬이 지분거리며 말은 재간둥이 마냥 톡톡 거린다. 밀실의 나는 침울하고 바닥으로 침강하지만 날카롭게 벼린 말을 쓰려 하고 적당히 성기고 그만큼 고백적이다. 밀실과 광장의 차이는 정신적 해리의 결과가 아닌 사회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구별 짓기며 호흡과 광합성의 차이만큼 다르지만 한 쌍이다.

가을이 시나브로 여물어가는 계절에 나는 자소서를 쓰지 않고 책을 읽었다. 하루에 한 권 꼴로 읽었으나 ‘인물과 사상’과 같은 월간지도 끼어있다 보니 독서의 존재증명은 지극히 암담하다. 다만 세권 정도 더 읽으면 올 여름까지 읽기로 했던 100권의 목록을 채우니 거짓 마음이나마 푼푼할 테다. 글은 신중히 읽고 마음은 허술히 여미는데 여투어둔 기억들은 일상을 침범하고 발품을 팔게 한다. 때 마침 창밖엔 비가 내리니 이런 허랑한 언어의 향연은 다 부질없어 보인다.

못내 가을이 아쉬워 들었던 음반을 다시 듣고 불렀던 휘파람을 다시 부른다. 내 도덕 기준이 높은 덕에 마음은 종종 핍진하고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사위어들지만 이 또한 겨울나기를 위해 나쁘지 않은 듯하다. 빛이 바랜 모니터의 외양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직 다 쓰지 못한 자소서만이 여백을 부유한다. 마음이 절로 가난하다. 던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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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3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4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5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5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5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에 뒷동산을 올랐다. 그리고선 커피를 마셨다. 도투르라는 프리미엄 커피다. 서울 우유에서 나왔다. 두 병을 마셨더니 잠이 안온다. 신경이 예민한 탓이다. 덕분에 음악만 듣는다. 아깐 가을 음악을 들었다. 이젠 겨울이다. 겨울엔 차이코프스키가 떠오른다. 그에겐 설원이 어울린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눈이 시리다. 그래서 먹먹하다. 시베리아가 주는 억압의 정서가 느껴진다. 억압된 감정이 교향곡에서 분출한다. 시베리아를 달리는 기차처럼 끝없이 질주한다. 설원 속 기차는 고독하고 적막하다. 차이코프스키가 겨울인 이유다. 

 조금 옅은 겨울도 있다. 라흐마니노프다. 차이콥스키처럼 깊지 않다. 비창이 아닌 비애에 가깝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다. 배리 더글러스 연주다. 생경한 피아니스트다. 기교만은 뒤지지 않는다. 런던 심포니가 반주를 한다. 리흐테르의 연주에 익숙해져 있다면 굵지 않은 연주가 조금은 불만일 수 있다. 그저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  

 무엇보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은 동향 출신 연주자들 손에서 빛난다. 물론 러시아 3인방이라는 호로비츠, 리흐테르, 길레스의 연주가 출중한 탓도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음악에도 국적이 있다. 에드워드 홀이 이야기 했듯 문화엔 무의식이 크게 작용한다. 음악도 문화다.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같은 나라 출신이 유리한건 당연하다. 고향을 그리고 추억을 되새기 듯 음을 조탁한다. 초겨울 눈발처럼 켜켜이 쌓인다. 귀가 시리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도 빼 놓을 수 없다. 리흐테르의 묵직함과는 다른 색채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그의 성격마냥 박력은 조금 떨어진다. 조화라는 측면에선 최상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에서도 겨울이 느껴진다. 2번 교향곡이 가장 유명하다. 3악장은 광고에도 자주 쓰인다. 서정적이다. 주제 선율이 무심히 반복된다. 눈발이 그친 후 아침 햇살을 맞으며 들으면 좋을 듯하다. 눈이 녹고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겨울 끝자락과 어울린다. 클라리넷의 아름다움이 근심도 녹인다. 마음을 주무른다. 

 프레빈이 지휘한 앨범이 유명하다. 예전에 한국을 방문했었던 지휘자다. 우디 알렌의 부인인 순이 프레빈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한국과 관계가 깊다. 로제스트벤스키의 라흐마니노프도 좋다. 앙드레 프레빈과 같은 런던 심포니의 연주다. 아무래도 러시아 출신이 지휘를 하다보니 귀를 좀 더 갖다 댄다. 마음이 쏠린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이반 피셔의 음반도 아름답다. 그가 만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명성 또한 자자하다. 피셔는 작품의 구조를 중시한다. 무엇보다 녹음이 훌륭하다.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귀가 열린다.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 때문에 고생했다. 슈만과 같은 정신병은 아니었다. 몸이 제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속 관현악은 일견 묵직하다. 교향곡 2번 4악장은 박력으로 가득하다. 자신을 곧추 세우기 위한 의지의 표식이다. 신경 쇠약에 꾸준히 침강했다면 차이콥스키와 같은 정서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후세를 위해선 좋지만 그에겐 해로운 일이다. 마음을 다습게 하자고 남의 불행을 빌 수는 없다. 기존의 곡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요즘이니 겨울은 성큼 다가 올 테다. 가을은 짧다. 마음이 의탁할 곳을 염두에 두며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는 배가 고팠다. 마음이 시렸다. 눈물이 났을 테다. 개미와 베짱이의 중간자적 자세가 필요하다. 슈베르트로 가을의 고독을 이겨낸다. 후엔 겨울의 우울이 찾아올 테다. 라흐마니노프로 월동 준비를 시작한다. 차이콥스키라는 불로 겨울을 난다. 그래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음악은 밀실의 적막함을 조금 푼푼히 해줄 뿐이다. 겻불이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속이 슬거운 그이와 같이 음악에 귀 기울이면 삶은 언제나 봄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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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0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페이퍼를 보니 요새 음반정리를 하시나봅니다. 덕분에 저도 갖고 있는 음반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라흐마니노프 2번 교향곡은.. 가을 맑은 햇살에 투명히 빛나는 나뭇잎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때 오케스트라에서 이 곡을 제발 해줬으면.. 하던 생각이 나네요 ㅋ

바밤바 2009-10-09 23:50   좋아요 0 | URL
음.. 써클님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 기대되는데요^^ㅋ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브람스를 자주 떠올린다. 독신이었다. 클라라 슈만을 사모했다. 곡은 신중하다. 깊은 음을 들려준다. 가을은 브람스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헌데 내게 가을은 슈베르트의 계절이다. 낙엽이 하나씩 지는 걸 보면 그의 안타까운 삶이 생각난다. 왠지 처연하다. 구슬프다. 바람만 휑한 날의 나목(裸木)을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가 떠오른다. 마음에 울린다. 입가에 남는다. 

 

 

 

 

 

 브렌델의 연주를 듣는다. 철학자와 같은 연주자다. 화려하진 않다. 소박하지도 않다. 적당하다. 적당히 깊고 적당히 감상적이다. 우디알렌을 닮은 이 연주자가 가진 비범함이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도 특별히 돋보이진 않는다. 다만 많은 생각을 하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음표만으로 생각의 깊고 넓음을 말해주긴 어렵다. 헌데 브렌델은 가능하다. 자신에게 도취되지 않았기에 가능할 테다. 듣는이를 배려하고 작곡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연주를 한다. 앨범 표지의 그림마냥 적막하지만 단단하다.  

 페라이어와 폴리니의 연주는 가끔 듣는다. 페라이어는 깔끔한 녹음이 마음에 든다. 폴리니는 강직함이 귀를 사로잡는다. 그래도 브렌델이 가장 좋다. 평생을 가을에 살았을 이 작곡가에겐 브렌델의 지나치지 않은 묵직함이 잘 어울린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베르트의 외모 콤플렉스를 넌지시 언급한다. 못생겨서 슬픈 음악. 외로워서 사위어든 음악. 오히려 우울할 때 제격인 음악. 슈베르트와 가을은 이렇게 서로의 생채기를 핥아준다. 브렌델이 듣는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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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0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노래를 참 잘 읽어줘요.
이걸 업으로 삼아도 좋을텐데.

바밤바 2009-10-05 03:44   좋아요 0 | URL
이걸 업으로 삼으면 그리 좋지아니할 듯. ㅎ
보고싶어요~~ 누나~~ ㅋ

2009-10-05 0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5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0-1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 라디오를 듣는데 페라이어의 슈베르트트가 나오더군요^^.. 역시 적절한 울림과 톤이 좋더군요. 진행자의 말처럼 "중용의 미" 가 돋보이는 연주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페라이어와 브렌델 참 노력을 많이 하는 연주자가 아닐까 하는데요. 깊이와 산뜻함을 동시에 들려주어 참 좋더라구요~

바밤바 2009-10-09 23:50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을 되세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