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이르러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생겼다. 다 내가 불민하다 여기며 마음에서 덜어내려 했으나 더께로 쌓인 불신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다 철학 책 몇 권을 읽었다. 책을 두꺼웠고 생각할 거리는 깊었다. 이런 저런 생각의 실타래를 풀다 보니 마침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란 ‘나와 가치관이 틀린 사람’ 이라는 거다.
가치관이 틀리다는 건, 다르다는 것과 말 그대로 구별된다. 관용(똘레랑스)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섰다는 거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몇몇 가치를 행동이나 일상에서 부정하는 자들에겐 카이사르가 가졌다는 ‘클레멘티아(Clementia)'를 적용하기 힘들다. 지당하다 여기고 벼려왔던 가치들이기에 그들의 잔망스러움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역겹기도 하다. 고종석이 이야기 했듯 역겨움이란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라기 보단 미추(美醜)의 개념이다. 나와 가치관이 틀린 사람에게선 추악함을 느끼고 인상이 찌푸려진다.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 사이에 있어 최대 공약수라 부를 수 있는 개념 탑재가 부재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누그리려고 해도 부질없는 고집은 이런 이들에게 손사래부터 치게 한다.
물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은 쉬이 받아들인다. 기꺼이 섭슬리기도 한다. 다른 가치관엔 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기에 그렇다. 그렇게 일상에 엄밀하고 위악을 떨며 살기엔 심정이 여려서 일 테다. 물론 가치관이 틀린 이 중엔 나와 친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20살 이전에 교류를 한 지인으로서 도덕 기준으로 밀어냄 보단 공유하는 추억의 이끌림이 강한 슬거운 이들이다. 혹 다른 잣대를 댄다며 내게 눈을 흘기는 자들도 있을 테다. 성인군자가 아닐뿐더러 지극히 소박한 자아를 가진 내겐 그 정도 편애는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런 잗다란 고민에 나만의 명제를 뽑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철학의 힘이 크다. 소소한 일상을 매끄럽고 날카롭게 다질 수 있는 힘의 뒤에는 선인(先人)들이 누적시킨 철학이 있다. 내가 추려낸 명제라는 것 또한 선인의 지식에 대한 무의식적 표절일 줄 모른다. 알 수 없다.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도 있다. 미시 파시즘을 경계하고 무의식적 폭력을 경계하며 주위를 꾸려나가다 보면 세상이 나를 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에 그렇다. 아침부터 말이 길다. 명확하지 않은 고민의 흔적이 너울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