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브람스를 자주 떠올린다. 독신이었다. 클라라 슈만을 사모했다. 곡은 신중하다. 깊은 음을 들려준다. 가을은 브람스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헌데 내게 가을은 슈베르트의 계절이다. 낙엽이 하나씩 지는 걸 보면 그의 안타까운 삶이 생각난다. 왠지 처연하다. 구슬프다. 바람만 휑한 날의 나목(裸木)을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가 떠오른다. 마음에 울린다. 입가에 남는다.
브렌델의 연주를 듣는다. 철학자와 같은 연주자다. 화려하진 않다. 소박하지도 않다. 적당하다. 적당히 깊고 적당히 감상적이다. 우디알렌을 닮은 이 연주자가 가진 비범함이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도 특별히 돋보이진 않는다. 다만 많은 생각을 하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음표만으로 생각의 깊고 넓음을 말해주긴 어렵다. 헌데 브렌델은 가능하다. 자신에게 도취되지 않았기에 가능할 테다. 듣는이를 배려하고 작곡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연주를 한다. 앨범 표지의 그림마냥 적막하지만 단단하다.
페라이어와 폴리니의 연주는 가끔 듣는다. 페라이어는 깔끔한 녹음이 마음에 든다. 폴리니는 강직함이 귀를 사로잡는다. 그래도 브렌델이 가장 좋다. 평생을 가을에 살았을 이 작곡가에겐 브렌델의 지나치지 않은 묵직함이 잘 어울린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베르트의 외모 콤플렉스를 넌지시 언급한다. 못생겨서 슬픈 음악. 외로워서 사위어든 음악. 오히려 우울할 때 제격인 음악. 슈베르트와 가을은 이렇게 서로의 생채기를 핥아준다. 브렌델이 듣는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