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뒷동산을 올랐다. 그리고선 커피를 마셨다. 도투르라는 프리미엄 커피다. 서울 우유에서 나왔다. 두 병을 마셨더니 잠이 안온다. 신경이 예민한 탓이다. 덕분에 음악만 듣는다. 아깐 가을 음악을 들었다. 이젠 겨울이다. 겨울엔 차이코프스키가 떠오른다. 그에겐 설원이 어울린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눈이 시리다. 그래서 먹먹하다. 시베리아가 주는 억압의 정서가 느껴진다. 억압된 감정이 교향곡에서 분출한다. 시베리아를 달리는 기차처럼 끝없이 질주한다. 설원 속 기차는 고독하고 적막하다. 차이코프스키가 겨울인 이유다.
조금 옅은 겨울도 있다. 라흐마니노프다. 차이콥스키처럼 깊지 않다. 비창이 아닌 비애에 가깝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다. 배리 더글러스 연주다. 생경한 피아니스트다. 기교만은 뒤지지 않는다. 런던 심포니가 반주를 한다. 리흐테르의 연주에 익숙해져 있다면 굵지 않은 연주가 조금은 불만일 수 있다. 그저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
무엇보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은 동향 출신 연주자들 손에서 빛난다. 물론 러시아 3인방이라는 호로비츠, 리흐테르, 길레스의 연주가 출중한 탓도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음악에도 국적이 있다. 에드워드 홀이 이야기 했듯 문화엔 무의식이 크게 작용한다. 음악도 문화다.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같은 나라 출신이 유리한건 당연하다. 고향을 그리고 추억을 되새기 듯 음을 조탁한다. 초겨울 눈발처럼 켜켜이 쌓인다. 귀가 시리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도 빼 놓을 수 없다. 리흐테르의 묵직함과는 다른 색채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그의 성격마냥 박력은 조금 떨어진다. 조화라는 측면에선 최상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에서도 겨울이 느껴진다. 2번 교향곡이 가장 유명하다. 3악장은 광고에도 자주 쓰인다. 서정적이다. 주제 선율이 무심히 반복된다. 눈발이 그친 후 아침 햇살을 맞으며 들으면 좋을 듯하다. 눈이 녹고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겨울 끝자락과 어울린다. 클라리넷의 아름다움이 근심도 녹인다. 마음을 주무른다.
프레빈이 지휘한 앨범이 유명하다. 예전에 한국을 방문했었던 지휘자다. 우디 알렌의 부인인 순이 프레빈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한국과 관계가 깊다. 로제스트벤스키의 라흐마니노프도 좋다. 앙드레 프레빈과 같은 런던 심포니의 연주다. 아무래도 러시아 출신이 지휘를 하다보니 귀를 좀 더 갖다 댄다. 마음이 쏠린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이반 피셔의 음반도 아름답다. 그가 만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명성 또한 자자하다. 피셔는 작품의 구조를 중시한다. 무엇보다 녹음이 훌륭하다.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귀가 열린다.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 때문에 고생했다. 슈만과 같은 정신병은 아니었다. 몸이 제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속 관현악은 일견 묵직하다. 교향곡 2번 4악장은 박력으로 가득하다. 자신을 곧추 세우기 위한 의지의 표식이다. 신경 쇠약에 꾸준히 침강했다면 차이콥스키와 같은 정서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후세를 위해선 좋지만 그에겐 해로운 일이다. 마음을 다습게 하자고 남의 불행을 빌 수는 없다. 기존의 곡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요즘이니 겨울은 성큼 다가 올 테다. 가을은 짧다. 마음이 의탁할 곳을 염두에 두며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는 배가 고팠다. 마음이 시렸다. 눈물이 났을 테다. 개미와 베짱이의 중간자적 자세가 필요하다. 슈베르트로 가을의 고독을 이겨낸다. 후엔 겨울의 우울이 찾아올 테다. 라흐마니노프로 월동 준비를 시작한다. 차이콥스키라는 불로 겨울을 난다. 그래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음악은 밀실의 적막함을 조금 푼푼히 해줄 뿐이다. 겻불이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속이 슬거운 그이와 같이 음악에 귀 기울이면 삶은 언제나 봄날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