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술자리에서였다. 선배는 우리나라 실업률이 너무 낮다고 했다. 앞으로 선진국처럼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실업률이 나타날 거라 말했다. 수많은 반론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가슴에 삭혔다. 기실 술자리만큼 위계질서가 흐트러진 듯 하며 개인의 품성을 재단하는 자리가 없다. 그렇기에 예의 그 좋은 사람이란 평판을 유지하고 팠는지 모른다. 참고로 선배는 주요 언론사 15년차 경제부 기자다.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결코 낮은 게 아니다.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 의무병 비율이 높다. 4주 동안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자로 분류 되지만 그 기간 중 1시간이라도 일을 하면 실업자에서 제외된다. 또한 정부가 양산한 희망 근로 프로젝트나 기업과 구직자 모두 싫어하는 인턴 제도도 실업률을 낮추는데 기여한다.
수많은 비정규직은 자신을 취업자와 실업자의 경계인 정도로 여긴다. 불안정한 지위 탓이다. 비정규직 법이 논란이 됐을 때도 이들의 불안을 걱정하는 의견이 많았다. 비정규직 자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의 의견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암묵적으로 비정규직 자체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테다. 서구에서도 비정규직을 통해 고용 시장 유연화를 이룩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문제는 서구와 우리의 제반 여건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덴마크나 노르딕 국가의 경우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일을 적게 하는 대신 임금을 적게 받는 협상도 가능하다. 비정규직 양산이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공리 위에서나 성립한다. 허나 우리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급여 차이가 심하다. 노동 시장 유연화를 언급하며 시장 경제 발전 운운하기엔 유연화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노동자의 짐이 너무 무겁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경쟁 업체에서도 원가 절감을 이유로 임금이 저렴한 비정규직을 많이 고용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자본가가 탐욕스럽다고 하지만 알프레드 마셜이 이야기 했듯 탐욕 보단 영구적 생존을 위해 애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자본가는 이익 확대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다. 기업 측을 무조건 탓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이런 환경은 왜 만들어졌나. 굳이 찾자면 IMF 시대에 무리하게 이식한 신자유주의가 원인이다.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지 않고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힌 한국인은 비정규직을 양산해서라도 국가를 살려야 했다. 20%를 살리자고 전부가 죽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차후 벌어질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국채를 갚고 국난을 이겨내는 게 중요했다.
이렇듯 강요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비정규직은 양산되었고 평생 고용 신화는 붕괴됐다. OECD 국가 가운데 유달리 자영업 비중이 높은 배경에는 기업을 믿지 못하는 경제주체의 생존 본능이 있다. 그때까지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찰은 미미했다. 국채를 다 갚고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며 빈부 격차가 심화될 기미가 보이자 정부는 카드 발급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 이런 경기 부양은 카드 대란을 낳고 다시금 가정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비정규직 문제는 꾸준히 차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08년에 터진 금융위기는 ‘잡 셰어링’이란 명목하에 새로이 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인력을 쥐어짰다. 정규직의 생존마저 더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결국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의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되었다.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구획되어진 문제가 아니라 잭슨 폴록의 페인팅마냥 마구 흩어져 있기에 그렇다. 그나마 타개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대부분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게 되겠다. OECD 국가 가운데 노동 강도가 가장 센 우리나라이니 정규직의 업무를 줄여 다른 정규직을 늘리는 방안을 모색할 만하다. 기업의 선의를 바라기엔 그들 각자의 경쟁이 치열하고 정부의 지원을 바라는 건 부의 이전만 낳을 뿐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미첼 폴라니가 말한 ‘암묵지’를 강조하며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걸 정규직 확대의 인센티브로 삼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이뤄지려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실로 난망(難望)한 일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듯 진지를 구축해 토대를 새로 쌓는 일도 어려워 보인다.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것인 냥 착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그들 각자는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애써 줄 유인이 없다고 하겠다.
헌데 서구에선 68 혁명이 이후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지려 애썼다. 그들이 특별히 경제적 인간이라서 그랬다고 보긴 힘들다. 양보가 더 큰 이익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제학적 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게임이론에서 말하듯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사익 추구를 통해 전체적 효용 저하를 종종 낳기 때문이다. 그 배경은 아마도 ‘인문학적 소양’ 때문일 테다. 사회와 역사, 그리고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이 자신을 옮아 매는지 알게 하는 힘이 생긴다. 일찍부터 시민사회가 성숙했고 자기 성찰을 중시했던 일종의 서구적 ‘아비투스’가 그러한 차이를 낳지 않았을까.
현재 알라딘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불매 운동 또한 비정규직 문제로 시작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 비정규직 문제는 한 기업의 노력이나 시민 단체의 운동만으론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문제를 직시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조그마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덴 한계가 있다. 물론 강준만이 말했듯 근본적 해결책만을 강조하는 건 아예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근본적 해결은 말 그대로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래도 각자가 개안(開眼)하여 점점 팍팍해져 가는 세상의 방향을 돌리려 애쓰는 점진적 발전이 중요하다고 본다. 개량주의자라며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보통 성품의 차이라 본다.
그래서 로쟈님의 서재는 중요하다. 그는 세상을 겹눈으로 바라보게끔 하고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굳이 밥벌이에 도움이 되진 않지만 제 시간을 쪼개 앎의 기쁨을 나누고 좀 더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려 애쓴다. 그의 온건함과 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않는 행태를 보고 누군가는 개량주의자라 폄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투쟁 방식의 다름이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같이 같은 목적을 위해 누군가는 온건하게 누군가는 치열하게 제 입장을 견지하는 거다. 주적이 누군지는 서로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같은 투쟁 전선에 있으면서 온건한 자에게 극심한 적개심을 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에서처럼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생채기를 내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 누군가의 무심한 태도에 대해 날을 세우기 전에 자신의 맹목적 확신이 타인을 얼마나 다치게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대의를 위해 몇몇의 아픔은 쉬이 묵과하는 전체주의의 유전자가 본인에겐 없는지 살펴야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같이 사회적 안정망이 취약한 나라에서 실업률이 높아진다는 건 또 다른 계급 사회의 도래와 삶을 영위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자가 많아진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이 그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해 본 사람이 고백의 언어로 말했을 때야 그 말은 잠언이 된다. 한국의 실업률은 좀 더 낮아져야 한다. 하석상대(下石上臺)의 형태가 아닌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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