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불매운동’의 파장이 서평이나 음반평을 주로 쓰는 내게도 미친다. 성긴 듯 보이지만 그 어울림이 실로 헤아리기 방대한 블로그 문화 덕일 테다. 기실 알라딘 불매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취업을 준비해야하는 졸업예정자였고 그러한 사회 문제는 이전부터 충분히 인지해왔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마틴 니뮐러’ 목사의 시를 언급하며 주변 일에 무심한 이를 종종 돌아보게끔 한다. 허나 내겐 그다지 와 닿지 않은 아포리즘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결국 자기 안위를 위해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맺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자그마한 참음이 내 안정을 해칠 수 있으니 미리 나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의 시를 이해했다. 정언명령처럼 ‘그것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식의 주장만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평생 그런 불안에 떨지 않을 명문가나 재벌의 자손이라면 마틴 니뮐러의 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지적 유희의 수단일 뿐이다. 불안을 자극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그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운동의 추진력을 잃는다. 뭐가 옳은 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밑바닥에 남은 사유를 긁어모아 행동하는 게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좋다고 여긴다. 점진적 개안을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유다.

기실 나 또한 불매운동이 불편했다. 아무도 불매운동을 강요하지 않는데 왜 불편하냐는 물음이 종종 제기 되곤 한다. 왜 불편할까? 기실 사람들은 사회 속에 부조리한 현상을 종종 보곤 한다. 제 책상을 닦아주는 청소 아주머니의 고단한 삶을 보며 비정규직 문제를 절실히 느낀다.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상사가 불합리한 일을 강요할 때면 사회의 미시적 폭력에 염증도 느꼈을 테다. 여성에게 행해지는 은근한 성차별적 발언과 술자리를 강요하는 ‘으쌰으쌰’ 분위기에서도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선 대부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문제제기를 한다손 치면 사회적 부적응자가 되거나 밥벌이 수단이 끊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견딘다. 하지만 자기혐오나 비겁한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반성기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나쁜 놈이 성공하는 사회’는 허버트 스펜서식 사회적 진화론이 팽배한 현 사회에서 당연한 결과다.

알라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봐선 먹물이거나 다소 불만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그들은 알라딘이란 가상공간에서 사회의 묵은 때를 씻고 조금 더 이상향적인 사회를 꿈꾼다. 비루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알라딘에서 찾은 거다. 헌데 비정규직 문제가 거론되면서 그들은 다시금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됐다. 일상에선 밥벌이란 핑계로 이리도 비겁했거늘 가상공간에서 제가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 사맛디 아니함의 모순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다. ‘놀이의 공간’이 ‘투쟁의 장’으로 변하는 광경에서 그들은 다시금 지겨운 밥벌이에서처럼 ‘마주하기 싫은 현실’을 오롯이 맞이해야 했다.

물론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의 선의를 알고 그 진정성을 믿기에 이러한 불편함을 내비치기 힘들다. 잔망스런 사람이 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기에 담론은 한쪽으로 쏠린다. 이런 과한 쏠림에서 과격파가 득세할 수밖에 없는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다. 또한 불편함이란 증명하기 힘든 감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의 사기를 꺾지 말라는 말도 나돈다. 어떤 것이 ‘확신’이 되고 타인의 감정을 자지레한 것으로 치부할 그 무엇이 된다면 거기엔 조그마한 브레이크가 달려야 한다고 본다. 옳은 일을 한다는 이유가 자잘한 폭력을 용서해줄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글이란 성긴 구석이 있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마음에 차지 않을 약한 고리가 있을 수도 있다. 허나 글 하나하나를 논박하며 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순간 말은 넘치고 감정은 상하기 마련이다. 제 자신의 말을 강제하기 전에 그 강제가 실로 온건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 강제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그 행동으로 불편해 했다면 그 불편함에 대해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소통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이념이 얼마나 많은 미시 파시즘과 폭력을 낳았는지 안다면 말이다. 타인의 비겁함을 논박하며 자신의 옳음에 천착하는 잔다르크식 일종의 ‘메시아 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다.

이 글 또한 성긴 구석이 많아 논박을 당한 여지가 상당하다. 혹 논박을 가하더라도 생채기를 내기 위한 말은 삼갔으면 한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를 꿈꾸는 이라면 보둠의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개인적 생각이다. 낮잠을 잤더니 잠이 안 온다. 오늘 밤엔 박범신의 고산자를 다 읽고 자야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0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