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들 각자의 사정이 중요하다. 자신이 힘들면 타인의 아픔은 다독일 무엇이 아니라 객관화된 자기위안의 수단일 따름이다. 제 아무리 절실한 아픔도 홀로 고민하는 그 사소한 번뇌에 비하면 잗다란 일이다. 타인이 제 번뇌를 사소하다 말할 때엔 불같이 화를 낸다. 그 절실함은 그대들의 사소함에 비해 지극히 정당한 것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이런 묘한 엇갈림이 충돌할 때 나타난다. 다들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느라 타인의 고민을 사치로 여기는 잔망스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이런 의견 표명은 충돌을 낳고 심할 땐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려 극진히 애쓰기도 한다. 맞닿음이 일어나지 않는 언어의 성찬은 제 절실함을 가중시키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벽을 쌓게 한다. 타인의 진정성 부족을 탓하지만 기실 그들 각자는 제 자신이 여기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요즘 지인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캐릭터란 본인이 생각하는 자아상이 아니라 주위 평가의 누적분일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김어준 씨가 말한 ‘인생이란 개인의 자잘한 선택의 누적분’이란 말에서 약간 틀었다. 다들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각자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힘쓰고 인맥이 넓고 평판이 좋은 자를 좇으려 한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자기객관화’가 덜 된 양태를 자주 띈다. 제 자신의 좋은 면을 과대평가하고 자기에게 쏟아지는 자지레한 비판은 진정 자신을 알지 못해 여기는 미욱함의 소산이라 여긴다. 기실 불민한 것은 제 자신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려면 ‘나르시시즘’이란 존립의 근거를 훼손해야 하기에 가당치 않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조금 비틀자면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기실 데카르트가 말했던 확고한 사실조차 그 존립기반이 근대 이후 해체되었다. 허나 대중은 데카르트의 아포리즘만 알길 원한다. 그게 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기 때문이다.
누군가 실존에 관련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절실하다. 밥벌이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절실하다. 절실함의 층위가 있을 순 없지만 사회적 인식을 받아들이고 사유를 좀 더 벼린다면 위 말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밥벌이의 하찮음을 말하고 제 ‘인정투쟁’만 강조한다면 끝까지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다. 과대망상증에 빠져 타인의 말로 제 자신을 해하고 신분상승의 의지만 불태우는 사람에겐 ‘자아와 타아와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 모짊이 헤아리기 어렵고 마음에 사무친다. 헛된 말을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고 제 자신에 침강하는 말이 미만하여 생각이 글에 미친다.
덧붙여 로쟈님은 힘내시길 바란다. 김훈이 이야기 했듯 ‘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 말들에 대해’ 일일이 답해 줄 필요는 없다. 생각이 언어에 포개져 애써 숨기려 해도 드러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분의 안티가 느는 듯하다. 누군가의 팬을 자처하는 일이 극히 드문 내가 그분을 각별히 우러르기에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자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냥 튀어나온 못을 두드리듯, 그 매정한 망치질이 야속할 따름이다. 하물며 그 못이 온당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글의 서두와 결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다소 다른 두 개의 불쾌한 감정이 어울려지다보니 그리 됐다. 이렇게 글로써 나는 스스로의 미욱함을 드러낸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내 부족함을 알기에 최소한 어떤 이들보다 하나는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나르시시즘이 흩어진 근자에 이러한 얇은 사유하나가 존립의 기반이 된다. 그저 웃는다. 여전히 서울은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