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종교적인 혼란이 지나간 뒤 17세기 유럽사회(지도)는 구교의 카톨릭 세계와 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서로 자리를 잡는 시기였습니다. 두 세력은 적대적이었지만,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의 네덜란드에 해당되는 플랑드르 지방은 16세기이래 구교권인 스페인의 지배아래 놓여 있었지만 캘빈주의로 개종하면서 오랜 투쟁 끝에 비로소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카톨릭으로 남았던 남부 홀랜드(지금의 벨기에)를 제외한 네덜란드는 근검하고 철저한 청교도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독자적인 미술을 만들어 갔습니다.

 

도1 얀 베르메르 < 델프트 풍경 >
1659-60년, 캔바스에 유채, 98.5×117.5cm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 박물관
 
 
 
도2 피터 드 호흐 < 델프트 저택의 위뜰 >
1658년, 73×60cm, 런던 국립미술관
 
 
 
 

바다를 끼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갔던 네덜란드는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모인 공화국 사회였기 때문에 권력이 한 집단 또는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과는 달리 다수의 소시민에 의한 경제, 정치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베르메르(Varmeer: 1632-75)의이 고요한 델프트의 풍경화와 드 호흐(Peter de Hooch, 1629-1684)의 거리풍경은 네덜란드 사회의 한 단면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그렸습니다(1,2). 별다른 장식 없는 교회와 붉은 색 벽돌로 지은 일반 가정집이 낮은 지평선에 따라 펼쳐진 17세기 네덜란드 도시의 모습일 것입니다.

 

 

네덜란드인의 취향은 그들의 건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네덜란드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던 17세기 중엽에 국가적인 자부심을 위해 세운 시청사 (市廳舍)는 크고 당당하기는 하지만 장식이 없는 수수한 모습니다(도3, 4). 이 건물의 조촐한 실내는 베르사이유의 사치스러운 궁전과 크게 대조됩니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카톨릭 국가, 교회의 사치와 허영을 혐오하여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3 야콥 드 탐펜 < 네덜란드 시청사 >
1648년, 현재는 왕궁, 암스테르담
 
 
 
 
도4 네덜란드 시청사 실내, 1648년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모습을 특징 지웠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검약은 당시 미술가들에게 큰 위기였으며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대규모의 교회나 왕궁을 중심으로 한 장식미술이나 조각대신 이곳에서는 가정집에 걸만한 다양한 장르의 작은 그림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하를렘에서 활동하였던 프란츠 할츠(Frans Hals, 1580-1666)는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의 유쾌함과 당당함을 생생하게 포착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습니다(도5). 독립투쟁시기에,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왕실에 맞서 당당하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병대들의 활약이 있어서였습니다. 독립이후 네덜란드 사회가 성숙해 가면서 이들 민병대의 모임은 보다 유쾌하고 상징적인 사교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념일에 기수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고는 성찬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을 기록하기 위한 집단 초상화를 주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지금의 단체사진과 같은 것이겠지요.

 

도5 프란츠 할스 < 성 조지아 시민 민병대의 연회 >
1627년 경, 캔버스에 유화, 179×257.5cm,
하를렘 프란츠 할스미술관
 
 
 
도6 코르넬리스 반 하를렘 <성 조지아 시민 민병대의 연회 >
1599년, 캔버스에 유화, 169×223cm,
하를렘 프란츠 할스미술관
 
 
 

대금을 지불한 조합원들을 공평하게 그리면서도 활기 있게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스가 이 그림을 그리기 삼십여년전 하를렘의 또 다른 화가 코르넬리스(Cornelize van Haarlew, 1562-1638)는 인물들을 무표정하게 늘어놓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도6) 그러나 할스는 다양한 포즈들을 그럴싸하게 조합하고 활달하게 붓을 놀려 시끌벅적한 연회의 장면을 되살렸습니다.

 

 

이러한 집단초상화의 영역을 한단계 올려놓은 이는 다름 아닌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가 램브란트(Rembrandt, 1606-1669)였습니다. 네덜란드 미술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커서 그에게는 다시 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다음 주제에서는 루벤스와 함께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도7 램브란트 < 직물조합 길드원들의 초상 >, 1662년
191.5×279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662년 렘브란트는 한 직물길드 임원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눈앞의 붉은 직물의 두툼한 질감을 통해 주문한 길드의 특성을 살리고 검고 흰 신교도들의 의상의 조화가 더없이 아름다운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번영의 주역인 상인들의 초상화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형제애를 보여주고 있는 이 다섯 명의 평의원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힘과, 상업, 그리고 관용의 전형적인 상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가의 능숙한 솜씨에 초상화는 역사화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중산층들을 기품 있게 그려낸 집단 초상화들이 공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들의 가정집을 위해서는 풍속화와 정물화 그리고 풍경화 등 소위 장르화들이 요구되었습니다. 아드리안 오스타데(Adriaen Jansz van Ostade, 1610-1685)의 이발소에서 이빨을 뽑는 장면과 같은 시민들의 일상이나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의 잡담과 수작을 다룬 부라우에르(Adriaen Brouwer, 1605년경-1638)의 선술집 장면과 같은 통속적인 풍속화들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도8 아드리안 오스타데 <이빨을 뽑는 이발사 >
1630-35년, 나무패널에 유채, 34×41.3cm
빈 미술박물관
 
도9 아드리안 부라우에르 < 담배피는 남자들 >
1637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46×36.5cm
뉴욕 매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러나 아래 얀 스텐(Jan Steen, 1626-79)의 <인생극장>(도10)의 전면에 들어 올려진 장막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일상은 단지 막이 내려질 한편의 드라마는 아닐까요? 때로 네덜란드의 통속적인 장르화 에서는 냉소와 풍자의 느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도10 얀 스텐 < 인간극장 >, 1665년, 68.2×82cm
헤이그 마우리츠 호이스 미술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을 느끼게 하는 화면으로 20세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 베르메르는 독특한 실내연작을 그렸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깊이감과 하얀 작은 색점으로 빛을 포착하였습니다.

 

도11 베르메르, < 우유 따르는 여인 >
1658년 경, 45.5×41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도12 도11의 부분
 
 
 
 
 

방의 한 구석 빛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창을 마주하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일상적인 모습이 하나의 의식처럼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여인의 몸과 흰 머리쓰개의 색채와 형태적인 대비, 테이블 위에 놓인 마른 빵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촉각적인 질감의 표현, 화가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눈에 보이는 이 작은 공간을 캔바스의 화면에 응결시킵니다. 베르메르의 일련의 풍속의 장면들에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의 세계에 매료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공간의 완벽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캔버스가 자연의 거울인양 사물들을 더 없이 성실하게 관찰하고 그것에 상징성을 담는 것은 얀 반 아이크 이래 북유럽 미술의 한 전통이었으며 이러한 정물화의 전통은 17세기 네덜란드에 와서 그 절정기를 맞이합니다. 수많은 전문화가들이 꽃, 과일, 모든 종류의 음식과 값비싼 금은 식기류에서 베네치아 산 유리잔과 델프트의 그릇, 책과 필사본 악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물들을 그려냅니다. 이들은 언뜻보아 단순한 일상의 장면같지만 많은 상징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도13 클라스 헤다 < 파이가 있는 아침식사 >
1631년, 나무패널에 유채, 54×82cm
드레스덴 독일 미술관
 
 
 
도14 피터 클라즈 < 바니타스 >
1630년, 39.5×56cm
헤이그 마우리츠 호이스 미술관
 
 
 

헤다(Willem Claesz Heda, 1594-1680/82)의 <아침식탁>(도13)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방금전에 사람이 손댄 흔적이 있는데, 파이는 벌써 상하려하고, 위태롭게 누운 유리잔은 바닦에 금방이라도 떨어져 깨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헤다의 정물화는 네덜란드 정물화에 사실성과 상징성이 얼마나 멋지게 결합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물화들은 때때로 함께 그려지는 해골이 명시하고 있듯이 인간의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일깨우는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도14). 그러나 수없이 그려지는 다양한 사물들의 객관적인 묘사에 화가들과 네덜란드인들이 매료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린 꽃이나, 동물들의 모습은 도감을 보는 듯 너무나 생생하며 이러한 사실성이 극에 달하면 때로 '눈속임 그림 Trompe d'Oeil'이 되기도 합니다.

 

도15 보스하르트, < 꽃 >
1620년, 나무패널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도16 후그스타텐, < 정물 >
1666-68년, 63×79cm
칼스러흐 미술관
 
 
 

이처럼 교회나 절대군주와 같은 권력자들의 후원이 뚝 끊긴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다양한 장르의 주제를 개발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중산층과 소시민들의 취향에 맞추어 나갑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오랫동안 역사화나 종교화의 배경이었던 풍경 그림은 점차 독자적인 화풍으로 자리잡혀 가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의 다양한 표정, 야트막한 둔덕의 해안풍경과 농가의 모습이 수많은 전문 화가들에 의해 그려집니다.

 

 

그들의 풍경화는 하나같이 낮은 지평선에 하늘과 구름의 표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도17, 18). 낮게 깔린 지평선은, 저지대인 이곳 네덜란드의 지형이 반영된 것이지만, 덕분에 풍경화가들은 옛날 방식대로 전경, 중경, 후경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시원한 화면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도17 윌램 반 데 벨데 <정적: 항구로 되돌아 오는 네덜란드 선박>
1665-70년, 161×233cm, 캔버스에 유채
런던 왈라스 컬렉션
 
 
 
도18 반 루이스달 < 에이크의 풍차 >
1670년경, 83×101cm,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술관
 
 
 

그러나 네덜란드의 풍경화는 단순히 풍경의 사실적인 스케치는 아닙니다. 화면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 때로는 고요하게 맑지만 언제 먹구름을 몰고 와 비를 쏟을 지 모릅니다. 멀리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과 미풍의 전조를 <에이크의 풍차>(도18)그림의 오른쪽에 서 있는 네덜란드의 여인들은 분명히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에는 자연에 깃든 신에 대한 감사와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애정, 그리고 두려움이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아본 것처럼 네덜란드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직업화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유머로서 자신들의 사회를 풍부하게 그려냈습니다. 규모는 작으나 그들의 삶에 밀착된 흥미로운 이젤화들을 많이 생산해낸 성과는 무엇보다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반영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그리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유일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미술의 대중성과 회화성의 융합은 현재에 있어서도 미술가들의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으며 그런 면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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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0-1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에서 보고온 그림들이 많아서 반갑네요.. 누군가 유럽여행가다면 판다님 서재에 꼭 들렸다 가라고 말해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