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하고 룸메이트를 구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이 올거라고 생각했던 그녀, 갑자기 들이닥친 해사한 얼굴을 지닌 조용한 스물 세 살 청년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 놀라며 저어한다. 하지만 곧 그 낯선 소년은 서서히 놀랍도록 완벽하게 그녀의 생활에 스며든다.

갖 이사 온 어지러운 집안을 혼자서 모두 정리하고 청소해주고 그녀의 옷을 빨아서 널고 마르면 곱게 다림질까지 해서 개어주는 녀석. 그녀를 위해 매번 맛깔스런 음식들을 준비하고 심지어 맥주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까지도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사다 놓는 녀석. 항상 깔끔한 거실과 서재, 반들반들한 냉장고, 식욕 돋는 식탁으로 채워진 작은 집. 그 속에 존재하는,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하며 공과금도 처리해주고 스케줄까지 미리 알아 아침 일찍 깨워 주는 완벽한 룸메이트.

너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구나...... 말할 정도로 어느새 그녀의 일부가 되어 버린, 마치 입안의 혀 같은 그 소년. 그런데 알고보니 그 녀석은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과거의 사랑이었다.

 

무심결에 TV를 켰다가 보게 된 <베스트 극장> '완벽한 룸메이트'. 누워서 한없이 뒹굴거리다 <베스트 극장>이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아- 오늘이 벌써 금요일인가- 하며 옆구리를 득득 긁던 나는, [원작/극본 황경신], [연출 황인뢰]라는 글이 화면에 뜨자마자 이불을 걷어차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간만에 보는 건데 이게 웬 횡재냐- 혼잣말을 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티비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낯선 한 존재가 내게로 걸어들어와 함께 살부딪히며 생활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친한 사이일수록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저 가끔 만나서 웃고 노는 것과 매일 아침 눈꼽 낀 눈과 봉두난발 머리를 마주대하며 뭐 먹을까 투닥대고 청소는 네가 해라 말아라 하며 함께 생활하는 것은 어쩌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일이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낯선 이성이라니, 룸메이트를 구하는 누구인들 움찔, 저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역시 제목처럼 그 낯선 녀석은 금새 이물감을 사그라지게 하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완벽한 룸메이트' 가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모든 집안 일과 골치아픈 일까지 마치 우렁각시처럼 스사삭 해결해주는 드라마 속의 그 녀석, 진짜로 훔쳐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들이 서로 서서히 친해지면서 집이 따뜻한 분위기로 채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그 사이사이에 스며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마치 곧 끊어질 것 같은, 아주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한 올의 가느다란 실처럼...... 지극히 완벽한 것에는 늘 그렇게 지독한 반전이 숨어 있기 마련인걸까.        

그들의 관계는 삼각관계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 할만하다. 40대의 유부남은 20대의 자기 제자를 사랑하다 버렸고 다시 30대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둘 중 누구도 순간의 사랑 그 이상으로 나아가서 보려하지 않는다. 소년은 복수심으로 그녀를 일부러 찾아가서 '완벽한 룸메이트'가 되어 온통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지만, 매순간 그 여자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와 그는 '왜 그렇게 아픈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리석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드라마는 뒤로 갈수록 늘어지고 비현실적이 되었고 특히나 마지막에 세 사람이 같이 바다로 가서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모습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싶었다. 양성애자, 동성애자, 불륜이라고, 무조건 그렇게 아프고 괴롭고 외로운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닐텐데, 그 아픈 사랑이 망가지고 엉킨다고 해서 삶 전체를 포기할 필요까진 없을텐데,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정말 외로운 삶의 진정한 탈출구이며 한 인간의 모든 것을 휩쓸고 파괴해버릴만한 대단한 것인지, 아주 많이 궁금해졌다. 하긴,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본 나 같은 인간이야 이밖에 무슨 생각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는 원래 현실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을 뿐인 비현실의 축제이고, 더군다나 삶 그 자체 또한 어쩌면 모두 지나간 꿈처럼 허망하고 가짜같은 것이 아닌가. 지금이 설령 꿈 속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저그저 살아가야겠다, 고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마음 먹는다.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작위적으로 단정지을 때 조차도 삶이라는 병 밑바닥에 찌꺼기로 말라붙어 있을지언정 결국엔 그것들이 늘 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 말이다.  

 

황경신의 <초콜릿 우체국>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성석제 아저씨의 추천글처럼, '반드시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모든 것이 한결 나아져 있'게 되기를 한 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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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9-04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코멘트 달기 애매한 페이퍼네요. ^^

어디에도 2004-09-04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하얀마녀님 아직도 안 주무시고...
애매하면 안 다셔도 되는데... (제 페이퍼가 주로 애매하죠 홋홋;)

님은 이 드라마 안 보셨나요? 하얀마녀님은 베스트극장 좋아하시잖아요.^^

반딧불,, 2004-09-04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베스트극장에서 부딪치는 멋진 극을 보고 있으면..너무나 행복해져요.
재미없는 가정극으로 모든 것을 보듬어버리는 극보다는
가끔은 파괴하는 극이 좋답니다.

누군지 참 멋지게 잘썼겠어요. 아마..인간이 외로움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잘 아는 이가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기억해야겠어요. 황경신이라....^^
어디에도님...이제 괜찮은거죠??

엊그제 보니 수세미(오이 닮은거요)가 천식에 그리 좋다고 합니다.
혹 구하실 수 있으면 구해보세요...
하는 방법은 모..구하시고 문의하시길^^;;;;

로드무비 2004-09-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경신은 페이퍼의 편집장이잖아요.
두 황씨가 뭉쳤군요.
저는 못 보고 잤어요. 아이 재우다가 같이...

어디에도 2004-09-0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오셨네요! ^^ 편찮으신 와중에도 제 걱정을 해주시고 흑흑 저는 괜찮으니 반딧불님이 얼른 좋아지시기를 제가 간절히 바랍니다. (수세미... 꼭 찾아볼게요 ^^)
그리고 님 말씀과 같은 이유로 저도 베스트 극장을 좋아해요. 뻔하지 않은 것, 그게 저한테는 최고의 드라마거든요. ^^

로드무비님... 주하랑 같이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스르르륵

플레져 2004-09-04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안녕하세요 ^^ 처음 인사드리네요. 제 이름은 보시다시피...^^;;
어찌어찌하다 님의 서재에 오게 됐어요.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물만두님 서재에 있다가 tarsta님 서재에 있다가.... 그렇게 돌아다니다 도착했습니다 ^^ 꾸벅.
로드무비님도 계시고, 하얀마녀님, 반딧불님도 계시네요...
어제 저두 우연찮게 베스트극장을 보았거든요. 앞 부분을 못보았는데, 대충 줄거리는 알겠더라구요. 저 역시 마지막 장면에서 작위적인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어요. 아주 특징적인, 사회에 이슈가 될만한 것들로 인물을 만든 것이 옥에 티가 아니었을까... 음음...초면에 주저리주저리 수다가 길었습니다 ^^
자주 뵐게요. (저도 베스트극장 좋아해요 ^^)

2004-09-05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5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7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삭신이 쑤신다.
(그런데 삭신이 쑤시는 이 마당에 갑자기 '삭신' 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져서 사전을 찾아본다. 몸의 근육과 뼈마디-라고 나온다. 음, 근육. 지방덩어리들이 이사를 오기 전 한 때 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추억의 이름... 어쨌거나 쑤신다.)

간만의 등산은 과히 무리였다.
(휴양림이라고 이름붙여진, 귀여운 통나무집들이 들어앉아 있는 그런 곳들의 산은 초딩시절 뻔질나게 오르내렸던 학교 뒷산 정도려니- 하고 생각한 내가 모자랐다. 나는 코스를 다 돌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며 경기를 일으켰다.)

솔직히 많이 창피하였다.
(으허허-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이 정도 산은 동네마실 다니듯 한 바퀴 휭 돌 수 있는데 말이야, 허허- 하며 어색한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지만 사실 속으로는 본인의 심각한 기초체력저하를 뼈아프게 감지하고 있었다. 내 옆으로 휙휙- 소리를 내며 마치 경보를 하는 사람처럼 날렵하고 멋지고 여유롭게 스쳐지나가는 할아버지할머니아저씨아주머니들을 보면서 혼자 곧 죽을 것처럼 널부러져서 헤엑헤엑 거리는 내가...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랴. 으흑)

그래도 좋았다.
(하도 안 써서 천년같은 긴 잠에 고이 빠져있던 내 근육들이 갑자기 다가온 강도높은 몸부림에 놀라서 지금까지도 시위를 하고 있지만, 그런 것쯤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숲과 계곡, 그 사이로 불어와서 내 이마를 때리는 바람과 그 차가운 바위들과 계곡물, 그리고 어깨에 내려앉는 잠자리떼... 나는 정말 좋았더랬다.)

 

 

 

p.s.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어디어디 휴양림에 가서 널부러져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서재 생각이 하나도 안 날만큼 좋았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서재 생각이 계속 날 만큼 좋았다고 대답하렵니다.)

저는 게으름뱅이입니다.
(제가 서재에 글을 자주 남기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래서 드리는 말씀이야요.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거든요. 게으름은 삶을 느리게 진행시키지만 지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그 속에서 홀로 팔딱거리는 이 곳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좋아요. 웬지 나날이 제가 진해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 놀라서 떠들어대는 근육들 사이로 묵직하게 위장이 소리를 내지르네요. 밥 내놔라!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죠.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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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9-0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도 운동부족이시군요~ ^^ 저도 마찬가지라 놀릴 처지는 아니고 삭신이 쑤신다는 것에 공감을 할 따름입니다. 휴양림에 다녀오셨다구요. 얼른 식사하시고 다시 한 번 방바닥에 널브러지셔요~. 하지만 주부는 어디 갔다 집에 돌아오면 할 일이 태산이라는...

2004-09-0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0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사람이 삭신이 쑤신다니오.
휴양림에 갔다오셨다니 우리 어디에도님 원기 회복하셨겠죠.
아프다,아프다 하면 진짜 아파진다고요.
자, 이제 서재 마실 매일 오실 거죠?^^

hanicare 2004-09-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남의 일이 아니군요.

어디에도 2004-09-0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맞아요. 저도 갔다왔더니 급하고 어수선하게 짐싸느라 어질렀던 방이 무슨 도둑이라도 훑고 지나간 듯 지저분하더라구요. 한구석으로 싸아악 밀고 大자로 그냥 누웠어요.헤

로드무비님! 아까 천사주하사진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서 그냥 돌아왔습니다.(쯧쯧)
헤헤. 더 많이 올려주세요. 예쁜 주하 사진이요.^^

hanicare님. 으..음. 남의 일, 이실 것 같은데. 웬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 옆을 휙- 스쳐지나치실 것 같은데요! (헤에엑, 같이 가요)

유령님; 어디서 앙탈이오!

sandcat 2004-09-0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것보다는 가을마중이 낫네요. 잘 쉬시길.



2004-09-01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09-01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히 다녀오셨나요. ^^

tarsta 2004-09-0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라오는 글마다 코멘트 달면 애정표시가 넘 찐하게 날까봐 자제했습니다만.
오늘은 반가와서 덥썩! 하고 안아봅니다.
여행 다녀오셨군요. 가시면 가신다고 말이나 좀 하고 가실것이징...

그런데 추억의 근육..이라니 님 정말 남자분인거에요? -_@?
아아 이 말초적인 궁금증이란...(혀를 차며 돌아간다)

2004-09-02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2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디에도 2004-09-0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아아 저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축하를 해주시니... 헛헛
저도 드디어 1000이 가까워졌네요. 오늘 안에는... 안될것 같은데요. 흐흐 (아무래도 글을 하나 써야할 듯)

어제밤야심한시각에속삭여주신님! 밤에 저만 보이게 고백같은 거 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시면 확! 소문낼겁니다.

urblue 2004-09-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다섯 분 남았군요. 얼렁 글 쓰세요. 오늘 1000힛 만들죠? ^^

어디에도 2004-09-0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로 그래버릴까요? 님의 서재에 있던 생일점 저도 해봤는데 그거라도 올리면
어떻게... (좀 구차한가요 흑흑)
아니면 조요옹히 있다가 1000번째 손님에게 선물이라도...?
흐흐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그냥 제가 1000번째 손님 할래요. (비겁하기까지)

2004-09-02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4-09-0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1000

푸하하하!!! 잡았습니다. 또 선물주세요~~~


urblue 2004-09-0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내 정신 좀 봐, 1000힛 축하요~~

로드무비 2004-09-0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001

저도요, 저도요. (뭘?)

우리의 우정 변치 말아요.^^


2004-09-03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tarsta 2004-09-0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신의 천사가 될래요. (헉)

81004


어디에도 2004-09-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저의 스토커인 님이 1000잡으실 줄 알고 제가 미리 선물 보내드린 것이옵니다. 스토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으..음..)

로드무비님! 우리의 우정 변치 말아요. -이 문장을 읽고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입이 헤벌쭈욱 ^^

요술국수 타스타님! 님은 이미 저의 천사이시잖아요! (좋아서 헉헉)

2004-09-03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4-09-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있던 것이었군요. (흠...당연히 할 일 못했으면 큰일 날 뻔 했군. --;)

어디에도 2004-09-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핫 님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요
그나저나 제 주소를 아셨다고 막 찾아오고 그러지 마세요. (이건 마치... 오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실은 그 주소는 제가 얹혀 있는 친구네 집 주소거든요. 뭐 당분간 얹혀 있긴 하겠지만 더부살이는 원래 서글픈 존재여요. 흑흑 (구질한 변명까지...)

반딧불,, 2004-09-0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힛 저도 축하드려요^^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면 아마도 나는 제 2의 신경숙이나 공지영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 둘은 글을 잘 쓴다는 점에서 나와는 전혀 다르지만. 어설픈 사회 비판 끝에 우리 사회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거나, 부실한 내용을 커버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가 난무하는 글을 창조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는 어설픈 그들이 되어버렸을 것 같은 것이다. 그랬다. 나의 문제는 자신감을 가질 정도로 확실한 재주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 어설프게 이것저것 찌르는 것에만 익숙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이미 오래 전부터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지......

알라딘 서재 어느 님의 글이다.
그 님께 빌려온다는 말도 하지 않고 야심결에 그냥 냅다 복사해버렸다.
이런 글을 쓰신 님은 실제로는 글을 매우 잘 쓰시기 때문에 겸손쟁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지금처럼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을 남들의 적확한 표현으로 뼈저리게 깨닫게 될 때 알 수 없는 활기를 부여받는다. 그래. 나는, 부실한 내용을 커버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가 난무하는 글을 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자신의 글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나는 저 문장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머리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수사가 난무하는 글을 쓰지 않으려면 나는 아예 글을 쓰지 말아야 하고,  스스로 원하는 명확하고 간결한 글이나 차갑고 깔끔한 글을 쓰기 원한다면, 우선 머리 속에 많은 것들을 채워 넣고 기억하며 필요할 때 꺼낼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머리 속이 겉핥기를 한 수박의 속살처럼 뻘건 국물만 들어차 있음을 사실 얼마 전에서야 살떨리게 깨달았
다.

웬지 홀가분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핫핫핫, 웃고 싶기도 하다.
나는 이제 마음 편하게, 아름답고 영롱하고 소름끼치게 유치찬란한 글을,
계속 쓰면서 놀아제끼면 되는 것이다...

하는 어이없는 결론을 도출하고 혼자 즐거워하는 나. 그냥 그런거지 뭐.

 

+) 저 글을 쓰신 분은 나를 모를 확률이 높은데 그렇다고 해도 몰래 복사해온 것은 
   
웬지 훔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안 좋다. 쩝. 인사를 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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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8-28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디서 읽어 본 글인데.. 음 누구시더라?? 평범한 여대생님이시던가?

어디에도 2004-08-28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맞아요. 평범한 여대생님글... 쉿... 소문내지 마시어요.^^
저 지금까지 아영엄마님 서재에서 놀다왔는데 여기서 또 님을 뵈니 이리 반가울수가...!
심야의 댓글, 웬지 귀에다 속삭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

다연엉가 2004-08-2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다 알고 있어요^^^^

▶◀소굼 2004-08-2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동네가 좁다면 좁은지라~; 그래도 가만히 있을게요;;

반딧불,, 2004-08-2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944

 

숫자 놀이하고 갑니다.

 

9월 4일 생인 친구를 추억하며....


하얀마녀 2004-08-29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어디에도님이 계속 글을 써주신다니 좋군요. 흐흐흐.

하얀마녀 2004-08-30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55

 

흐흐흐흐.

 

사람에겐 절대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냥 흘려들었던 그 말이 또다시 뼈에 사무친다. 나는 기침을 숨기고 싶은데 숨길 수 없어서 그냥 고스란히 나를 숨겨버렸다. 

기침을 참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마치 기관지에 벌레 몇 마리가 서식하고 있어서 스멀스멀 움직이면서 자신들을 입 밖으로 토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만 같다. 꾹꾹 억지로 참았던 기침은 오히려 크고 민망한 소리로 결국에는 푸욱 하고 터져나온다. 버스나 지하철 혹은 괜찮을거야 하는 오기를 부리며 찾아간 극장에서 연신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으려고 목구멍을 꽉 그러쥐고 있는 것은, 정말로 고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공장소에서 단 1분 동안이라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쿨럭쿨럭 켁켁 하고 기침을 발사해대는 것 또한 그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목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라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쏟아진다. 저 아해는 어디 죽을 병이라도 걸렸나 하는 듯 슬금슬금 나를 훑는 눈길들. 나는 기민하게 장소를 바꾸고 타이밍을 조절하고 리듬감까지 살려서 기침을 내뱉는다.

3년 전 쯤, 감기가 나은 후에도 계속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내게 천식이 있다고 했다. 하긴 시간이 흐를수록 기침이 마르고 숨쉬기가 어려워졌고 특히 한 번 기침이 시작되면 말도 못할 정도로 오래 심하게 해서 이상하다 했는데 그게 그런 거였다. 사실 그 때문인지 어쩐지 잘은 모르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 우습던 감기가 무서워졌다. 어쩌다 목감기라도 한 번 걸리게 되면 아무리 약을 먹어도 쉽게 낫지 않고 몇 주는 우습게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 언젠가 엄마가 도라지랑 배랑 무슨무슨 이상한 것들을 넣고 만든 맛대가리 없는 약을 일부러 해오셔서 강제로 먹었는데 그것의 약효가 좋았는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기침감기는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고 그러니 또 단순하게시리 기침의 악몽을 깡그리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날씨도 뜨듯한 이 늦여름에 이런 뜬금없는 기침의 역습이라니. 진정 최대의 난관이다. 이젠 맛없는 약을 지어주실 엄마도 가까이에 없고 도라지도 배도 꿀도 없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나의 연타성 기침은 아마 고장나서 꺼지지도 않고 밤새 혼자 울어대는 알람소리 같을 것이다.

슬슬 나아지고 있으니 결국엔 끝이 보이겠지, 지가 뛰어봐야 기침이고 뱉어봐야 침 아니겠나,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아프면 징그럽게 들러붙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쯧쯧 나는 혀를 찬다. 이런 일로 엄마에게 가고 싶지는 않다, 고 말하는 내 자신이 여전히 전혀 어른스럽지 않음에 나는 그깟기침, 을 연신 해대며 끊임없이 실망한다.

 

  

+) 서재 달력을 보니 벌써일주일. 아프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인가. 잠 속을 헤맨 시간이 많아서였나. 어쨌거나 일주일을 비운 동안 즐겨찾는 분이 대폭 줄었다. 원래부터 많지 않은 수였으니 내 숫자는 줄지 않을거라 나는 조금은 믿으며 무심했었을까. 이리 급격한 하강 곡선을 그릴 수도 있구나,  실은 좀 신기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별로 슬프지 않아서 오히려 슬프다. 서재의 달인들은 역시 보통 분들이 아니다. 만약 아프지 않았더라도 나는 원체 게으른 인간이라 내 서재는 늘 이모냥일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런데 솔직히, 그게 불안함인지조차 나는 사실 모르겠다.

걱정해주신 분들, 오셨다 그냥 가신 분들. 글 남겨주시고 힘 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항상, 어디에도 있는, 녀석이에요. 제 씩식한 기침 소리, 들리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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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2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나으세요...

배즙이랑 좀 많이 드시구요...신선한 공기가 최고일텐데..
너무 집 안에만 계시지 마시구요...아셨죠??

하얀마녀 2004-08-2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과 싸워야 하니 평소보다 더 잘드셔야 해요. 얼렁 못된 감기를 쫓아내시길 바랍니다. ^^

로드무비 2004-08-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우리 남편이랑 아이도 천식기가 있어요.
기관지가 약해서 그렇다던가, 아무튼...
배하고 도라지 달인 것 팩으로 팔거든요.
평소에 그걸 좀 장복해 보세요.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요.
그리고 하루 알라딘 안 들어오면 방문객 수 엄청 줄어요.
저도 그리 오래 된 서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가보아요.
많은 사람들이 찾든 안 찾든... 신경이야 조금 쓰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냥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자고요.
유아블루님은 휴가 잘 보내고 계시겠죠?
입만 열면 어디에도님, 불러쌓더니...
이제 많이 괜찮아지신 거죠?
배즙 그거 상당히 효과 좋아요.
파는 데 모르겠으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알아봐드릴게... 아셨죠?^^

어디에도 2004-08-2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하얀마녀님, 로드무비님... 고맙습니다. (_ _)
서재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니 언제 그랬냐 싶게 몸이 가뿐한걸요.
사실 저의 고질병은 기침,같은 게 아니라 게으름인걸요, 뭘.

(로드무비님, 여러모로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안그래도 제가 너무 시끄러웠는지
친구가 도라지랑 배랑 같이 갈은건지 짠건지 암튼 그걸 사왔어요. 로드무비님만큼
좋은친구를 둬서 다행이죠^^)

반딧불,, 2004-08-2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군요..

어디에도님...님의 글에서 진한 상흔을 보곤 합니다.
외로움도요.
어쩌면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요.
빨리 떨치고 일어나세요..힘내시구요.
어줍잖게도 충고를 합니다.

어디에도 2004-08-28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충고 정말로 감사해요. 어줍잖다니요, 제겐 늘 힘이 되고
이정표가 되는걸요. 저는 나이만 많이 먹었지 아직 어린애라서요...
그런데 상흔...을 말씀하시니 저는 쑥스러워집니다. 그런 단어를 쓸만큼 저는
힘들게 살지 않았음에도 괜히 어리광부리는 제 모습을 님은 눈치채신거군요.
저는 엄살쟁이가 분명해요.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께 좀 귀여움을 받고 싶은가봐요.
좀... 재수업죠? 헤헤

urblue 2004-08-2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왔습니다. 이제 좀 나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로드무비님, 제가 또 언제 입만 열면 어디에도님만 찾았다고 그러시는지... 로드무비님도 같이 찾았는데 말이죠. ^^
 

97년 혹은 98년.
그 당시 나의 일상은 한마디로 '휘적휘적' 거리고 있었다.
밤늦도록 통신을 하고 늦잠을 자고 아점을 먹고, 가방만 달랑 메고 종로로 나가 정처없이 싸돌아 다니다 영풍이나 교보에서 자리 잡아 뭉개기,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런데다 무슨 필수 악세사리인양 세상 다 산 사람같은 맥없는 표정과 느릿한 걸음걸이를 달고 다녔고, 덧붙여 스스로 일부러 만들어서 주렁주렁 달았던 꿀꿀함- 사실 무거워 죽겠지만 뭐 어쩌겠어요, 하는 어줍잖은 분위기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같잖다.

어쨌거나 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 때 내 눈에 확 띄어서 낼름 업혀온 책이 바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책이다. 김영하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젊은 소설가가 있다는 사실 만을 알고 있었을 뿐 전혀 접해본 바가 없음에도 일단 그 책은 제목으로 나를 확 사로 잡았다.

'파괴' 라는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이 그 대상인 '나' 라는 것에 살짝 꽂히면서 순간 자학적인 우울모드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은근슬쩍 '권리' 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면서 방향을 전환하며 뭔가 멋들어진 자유의지가 심어져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 문장, 나는 무슨 비법책이라도 전수받는 사람처럼 결연한 태도로 그 책을 집어들었다. 게다가 새까만 표지 가운데 박혀 있는 죽어넘어진 남자의 그림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 빨리 사라고 주머니에서 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며 읽기도 가뿐한 중편 정도의 분량에 결정적으로 가격이 4800원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볍게 이 책을 간택했다. 그리고 몇장을 넘기고 바로, 몽롱한 눈길로 나를 흡수해버릴것만 같은 클림트의 유디트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쁜 마음과 가쁜 눈길로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예전에 아메나바르 감독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았을 때 나는야 꿈 속이 좋아~ 어쩌구 했던 기억이 난다. 본 지 오래되서 자세히 기억 나진 않지만 그 영화에는 생명 연장 회사인가 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 회사가 하는 일이란 이름 그대로 영원히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는 소멸되고 정신 혹은 의식만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었고 대신 그 회사는 원하는 의식의 배경,을 무한하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계속 꿈을 꾸면서 그 속에서만 의식만이 끝도 없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인데, 의식만으로 내내 존재하는 것이 과연 생명의 연장이며 그것을 삶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럼 도대체 '나' 라는 존재는 육체인지 영혼인지 뭐가 뭔지, 하는 지리멸렬한 문제들이 영화를 보고나자 곧장 머리를 파고 들었지만 결국 단순한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그 생명연장회사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꿈을 제공해주는 것이니 원한다면 억만장자로, 세계적인 스타로, 천재과학자로, 얼마든지 입맛대로 고를수 있고, 실연을 당하거나 다치거나 죽으면 RESET, 다시 꿈을 꾸면 되며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다 싫증나고 재미없으면 또 다시 다른 꿈을 꾸면 되는,
그것은 의식의, 꿈의, 향연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꿈에서 깨고자, 다시 육체 속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결단을 내리는데, 육체와 정신,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된 그 복잡한 공존처럼, 영화도 내내 빠른 편집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점철되어 사실, 줄거리조차 모를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같이 본 사람들이 육체냐 정신이냐 어쩌고 두런두런 말을 할 때도 혼자서 어린애처럼 그랬다.
생명연장회사가 진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맘대로 되는 매력적인 꿈 속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결국 주인공처럼 훌쩍 뛰어내린다 할지라도 말이야.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한 것은,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혹은 책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직업이 떠오른 때문이다.
자살 안내업자 혹은 자살 도우미. 철저하게 가상적인 인물, 그 직업의 묘한 매력.
의뢰인의 삶과 의식을 흡혈귀처럼 흡수하고 그들의 육신을 떠나보내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며
압축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하다, 말하는 그 남자.

일상적으로 ~해서 죽겠다, 는 표현을 꼭 입에 달고 살아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정말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드라큐라 백작처럼 잘 생긴 남자가 어디선가 스윽 나타나서는 제 손을 잡아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누구의 마음도 불편하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되도록 도와줄게요. 용기를 가져요. 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악마적인 유혹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이 책의 화자와 유디트, 미미, 사르다나팔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것 처럼 말이다.

남루하지만 친근한 일상, 비루하지만 치열한 현실,
나를 둘러 싼 소설 무더기 속에서 김영하는 순간 강하게 빛나는 어쩌면 튀는, 존재였다.
책과 영화 속으로 탈출하는 내게, 책장을 덮고 영화가 끝나면 고스란히(혹은 더 암울해진 마음으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어쩌면 가장 소극적인 탈출만을 일삼으며 숨을 쉬던 내게,
그는 모처럼 머나먼 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새로 등장한 교주였다.

 

지금의 나는 이제 그가 어떤 소설을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
처음엔 도시에서 막 돌아온 방물장수처럼
이런건 처음 봤지, 이것도 신제품이야, 하면서 처음보는 진기한 것들을 주르륵 꺼내놓는 그에게, 그 낯설음에 반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신기한 이야기를 해박하게 풀어놓는 그 입심에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그의 '이야기'가 좋다.

하지만, 첫(?)소설의 제목을 눈에 띄도록 잘 뽑아준 그에게 늘 고맙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에서건 처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행도 끝도 어차피 어불성설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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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1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

urblue 2004-08-1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읽은 게 하나도 없네요. 하필 제가 한국 작가들을 외면할 때에 등장한 사람이라.
자살 안내업자 하니까 생각나는 단편이 있는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안나요. 자살주식회사, 뭐 그런 비슷한 말이 들어가는 제목이었는데. 아, 바보가 되어버렸나 봐요. ㅠ.ㅠ

urblue 2004-08-1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놀이 좋다하구선 어디 가서 놀고 있는 거에욧!

어디에도 2004-08-1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어디다 소리를 지르고 이래욧! 블루님 서재에 가 있었다고요!!
(음... 이벤트 선물에 대해서도 약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님이 서재주인장보기로 주소를 남겨주시면... 제가, 선물입니다! 하면서 짠~ 나타나면 님이 얼마나 짜증날까, 뭐 그런 생각도 약간 하기도 했고... )(뭐야, 이거... 장난으로 썼다가 진짜로 선물을 해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잖아... 뭐야뭐야) 제가 싫으시면 책을 선물해드릴까요? 아아, 역시 제가 좋으시군요. 헛헛.

urblue 2004-08-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선물이 뭘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음, 님이 선물이란 말이죠?
뭐, 나쁘진 않아요. 그럼.

어디에도 2004-08-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나쁘진 않아요.흠흠.(뭐냐 이건;)

그러면 주소 얼렁 줘요. 내가 머리에 꽃달고 가든지, 상자 속의 책이 가든지,
아니면 꽃 달고 제가 책을 안고 가든지 암튼 결단을 내릴테니까요. 흐으.

urblue 2004-08-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저보고 웃긴다더니, 님이 더 웃겨요.
님이 머리에 꽃달고 회사 앞에 서 있다가, 제가 지나가면서, 저 여자 뭐야?, 하면 충격먹지 않겠어요?

urblue 2004-08-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나저나 아직도 그 단편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송경아 였던가... 일본 작가였던가...흐흑...

어디에도 2004-08-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여자 뭐야, 라니요! 저 남자예요.(디게 썰렁하다. 하지만 제가 남자인 것도 나름대로 좋은, 응응응한 구석이 있잖겠어요?;)

단편... 저도 궁금해요. 워낙에 그런 음험한 내용을 좋아하는지라.
기억나면 꼭 말해주세요~

hanicare 2004-08-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 제목, 김 영하의 창작 아닙니다. 프랑소와즈 사강이 마약사범으로 붙잡혔을 때 내뱉은 말이랍니다.그 사실이 책 '어디에도' 없더군요.

어디에도 2004-08-1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어디선가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그럼 김영하가 아니라 사강에게 고맙다고 해야하겠네요.^^
좋은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04-08-19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8-1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사강이 저 말을 했을 때는 뭔가 추하게 들렸는데 김영하는
쌈빡하게 살려놓았죠?
우리가 그 제목에서 바라는 온전한 의미로...

2004-08-2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08-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디에도님 XY였어요? 0_0

tarsta 2004-08-2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서,설마 저,저,정말??)

아영엄마 2004-08-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좀 난해한 글과 코멘트가 난무하고 있어서 뭐라고 적어야할지 모르겠어요..ㅜ.ㅜ
그..그런데 어디에도 님의 성별이?? 모르는 척하고 휘리릭~~==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