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하고 룸메이트를 구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이 올거라고 생각했던 그녀, 갑자기 들이닥친 해사한 얼굴을 지닌 조용한 스물 세 살 청년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 놀라며 저어한다. 하지만 곧 그 낯선 소년은 서서히 놀랍도록 완벽하게 그녀의 생활에 스며든다.
갖 이사 온 어지러운 집안을 혼자서 모두 정리하고 청소해주고 그녀의 옷을 빨아서 널고 마르면 곱게 다림질까지 해서 개어주는 녀석. 그녀를 위해 매번 맛깔스런 음식들을 준비하고 심지어 맥주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까지도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사다 놓는 녀석. 항상 깔끔한 거실과 서재, 반들반들한 냉장고, 식욕 돋는 식탁으로 채워진 작은 집. 그 속에 존재하는,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하며 공과금도 처리해주고 스케줄까지 미리 알아 아침 일찍 깨워 주는 완벽한 룸메이트.
너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구나...... 말할 정도로 어느새 그녀의 일부가 되어 버린, 마치 입안의 혀 같은 그 소년. 그런데 알고보니 그 녀석은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과거의 사랑이었다.
무심결에 TV를 켰다가 보게 된 <베스트 극장> '완벽한 룸메이트'. 누워서 한없이 뒹굴거리다 <베스트 극장>이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아- 오늘이 벌써 금요일인가- 하며 옆구리를 득득 긁던 나는, [원작/극본 황경신], [연출 황인뢰]라는 글이 화면에 뜨자마자 이불을 걷어차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간만에 보는 건데 이게 웬 횡재냐- 혼잣말을 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티비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낯선 한 존재가 내게로 걸어들어와 함께 살부딪히며 생활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친한 사이일수록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저 가끔 만나서 웃고 노는 것과 매일 아침 눈꼽 낀 눈과 봉두난발 머리를 마주대하며 뭐 먹을까 투닥대고 청소는 네가 해라 말아라 하며 함께 생활하는 것은 어쩌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일이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낯선 이성이라니, 룸메이트를 구하는 누구인들 움찔, 저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역시 제목처럼 그 낯선 녀석은 금새 이물감을 사그라지게 하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완벽한 룸메이트' 가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모든 집안 일과 골치아픈 일까지 마치 우렁각시처럼 스사삭 해결해주는 드라마 속의 그 녀석, 진짜로 훔쳐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들이 서로 서서히 친해지면서 집이 따뜻한 분위기로 채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그 사이사이에 스며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마치 곧 끊어질 것 같은, 아주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한 올의 가느다란 실처럼...... 지극히 완벽한 것에는 늘 그렇게 지독한 반전이 숨어 있기 마련인걸까.
그들의 관계는 삼각관계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 할만하다. 40대의 유부남은 20대의 자기 제자를 사랑하다 버렸고 다시 30대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둘 중 누구도 순간의 사랑 그 이상으로 나아가서 보려하지 않는다. 소년은 복수심으로 그녀를 일부러 찾아가서 '완벽한 룸메이트'가 되어 온통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지만, 매순간 그 여자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와 그는 '왜 그렇게 아픈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리석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드라마는 뒤로 갈수록 늘어지고 비현실적이 되었고 특히나 마지막에 세 사람이 같이 바다로 가서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모습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싶었다. 양성애자, 동성애자, 불륜이라고, 무조건 그렇게 아프고 괴롭고 외로운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닐텐데, 그 아픈 사랑이 망가지고 엉킨다고 해서 삶 전체를 포기할 필요까진 없을텐데,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정말 외로운 삶의 진정한 탈출구이며 한 인간의 모든 것을 휩쓸고 파괴해버릴만한 대단한 것인지, 아주 많이 궁금해졌다. 하긴,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본 나 같은 인간이야 이밖에 무슨 생각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는 원래 현실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을 뿐인 비현실의 축제이고, 더군다나 삶 그 자체 또한 어쩌면 모두 지나간 꿈처럼 허망하고 가짜같은 것이 아닌가. 지금이 설령 꿈 속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저그저 살아가야겠다, 고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마음 먹는다.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작위적으로 단정지을 때 조차도 삶이라는 병 밑바닥에 찌꺼기로 말라붙어 있을지언정 결국엔 그것들이 늘 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 말이다.
황경신의 <초콜릿 우체국>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성석제 아저씨의 추천글처럼, '반드시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모든 것이 한결 나아져 있'게 되기를 한 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