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혹은 98년.
그 당시 나의 일상은 한마디로 '휘적휘적' 거리고 있었다.
밤늦도록 통신을 하고 늦잠을 자고 아점을 먹고, 가방만 달랑 메고 종로로 나가 정처없이 싸돌아 다니다 영풍이나 교보에서 자리 잡아 뭉개기,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런데다 무슨 필수 악세사리인양 세상 다 산 사람같은 맥없는 표정과 느릿한 걸음걸이를 달고 다녔고, 덧붙여 스스로 일부러 만들어서 주렁주렁 달았던 꿀꿀함- 사실 무거워 죽겠지만 뭐 어쩌겠어요, 하는 어줍잖은 분위기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같잖다.
어쨌거나 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 때 내 눈에 확 띄어서 낼름 업혀온 책이 바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책이다. 김영하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젊은 소설가가 있다는 사실 만을 알고 있었을 뿐 전혀 접해본 바가 없음에도 일단 그 책은 제목으로 나를 확 사로 잡았다.
'파괴' 라는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이 그 대상인 '나' 라는 것에 살짝 꽂히면서 순간 자학적인 우울모드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은근슬쩍 '권리' 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면서 방향을 전환하며 뭔가 멋들어진 자유의지가 심어져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 문장, 나는 무슨 비법책이라도 전수받는 사람처럼 결연한 태도로 그 책을 집어들었다. 게다가 새까만 표지 가운데 박혀 있는 죽어넘어진 남자의 그림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 빨리 사라고 주머니에서 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며 읽기도 가뿐한 중편 정도의 분량에 결정적으로 가격이 4800원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볍게 이 책을 간택했다. 그리고 몇장을 넘기고 바로, 몽롱한 눈길로 나를 흡수해버릴것만 같은 클림트의 유디트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쁜 마음과 가쁜 눈길로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예전에 아메나바르 감독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았을 때 나는야 꿈 속이 좋아~ 어쩌구 했던 기억이 난다. 본 지 오래되서 자세히 기억 나진 않지만 그 영화에는 생명 연장 회사인가 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 회사가 하는 일이란 이름 그대로 영원히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는 소멸되고 정신 혹은 의식만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었고 대신 그 회사는 원하는 의식의 배경,을 무한하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계속 꿈을 꾸면서 그 속에서만 의식만이 끝도 없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인데, 의식만으로 내내 존재하는 것이 과연 생명의 연장이며 그것을 삶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럼 도대체 '나' 라는 존재는 육체인지 영혼인지 뭐가 뭔지, 하는 지리멸렬한 문제들이 영화를 보고나자 곧장 머리를 파고 들었지만 결국 단순한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그 생명연장회사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꿈을 제공해주는 것이니 원한다면 억만장자로, 세계적인 스타로, 천재과학자로, 얼마든지 입맛대로 고를수 있고, 실연을 당하거나 다치거나 죽으면 RESET, 다시 꿈을 꾸면 되며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다 싫증나고 재미없으면 또 다시 다른 꿈을 꾸면 되는,
그것은 의식의, 꿈의, 향연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꿈에서 깨고자, 다시 육체 속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결단을 내리는데, 육체와 정신,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된 그 복잡한 공존처럼, 영화도 내내 빠른 편집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점철되어 사실, 줄거리조차 모를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같이 본 사람들이 육체냐 정신이냐 어쩌고 두런두런 말을 할 때도 혼자서 어린애처럼 그랬다.
생명연장회사가 진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맘대로 되는 매력적인 꿈 속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결국 주인공처럼 훌쩍 뛰어내린다 할지라도 말이야.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한 것은,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혹은 책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직업이 떠오른 때문이다.
자살 안내업자 혹은 자살 도우미. 철저하게 가상적인 인물, 그 직업의 묘한 매력.
의뢰인의 삶과 의식을 흡혈귀처럼 흡수하고 그들의 육신을 떠나보내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며
압축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하다, 말하는 그 남자.
일상적으로 ~해서 죽겠다, 는 표현을 꼭 입에 달고 살아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정말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드라큐라 백작처럼 잘 생긴 남자가 어디선가 스윽 나타나서는 제 손을 잡아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누구의 마음도 불편하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되도록 도와줄게요. 용기를 가져요. 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악마적인 유혹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이 책의 화자와 유디트, 미미, 사르다나팔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것 처럼 말이다.
남루하지만 친근한 일상, 비루하지만 치열한 현실,
나를 둘러 싼 소설 무더기 속에서 김영하는 순간 강하게 빛나는 어쩌면 튀는, 존재였다.
책과 영화 속으로 탈출하는 내게, 책장을 덮고 영화가 끝나면 고스란히(혹은 더 암울해진 마음으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어쩌면 가장 소극적인 탈출만을 일삼으며 숨을 쉬던 내게,
그는 모처럼 머나먼 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새로 등장한 교주였다.
지금의 나는 이제 그가 어떤 소설을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
처음엔 도시에서 막 돌아온 방물장수처럼
이런건 처음 봤지, 이것도 신제품이야, 하면서 처음보는 진기한 것들을 주르륵 꺼내놓는 그에게, 그 낯설음에 반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신기한 이야기를 해박하게 풀어놓는 그 입심에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그의 '이야기'가 좋다.
하지만, 첫(?)소설의 제목을 눈에 띄도록 잘 뽑아준 그에게 늘 고맙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에서건 처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행도 끝도 어차피 어불성설이 될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