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개전
조흔파 지음 / 아이필드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음의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남궁동자, 나일등, 차억만, 공영칠, 모귀남...
혹은 이승현, 손창호, 진유영, 강주희, 김정훈... 

설사 저 위의 이름들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신다 할지라도 '나두수'라는 이름은 기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두수'라는 이름에도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얄개'라고 하면 그제서야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도 모르시겠다구요? 그렇다면 아마 저보다는 조금 늦게 세상구경을 하신 분들일 것 같습니다. 뭐 그렇더라도 너무 신경쓰지는 마십시오. 이제부터라도 그 이름을 알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얄개전>은 1950년대에 씌여진 우리나라 청소년 학원 문학의 선구가 되는 작품입니다. "얄개"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얄망궂고 잔재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얄미워 보이지만 미워할수 없는 장난꾸러기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조흔파 선생이 50년대 중반에 <학원>지에 연재했던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청소년 명랑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기념비적인 소설입니다. 연재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최요안 선생이나 오영민 선생등이 비슷한 장르의 소설들을 발표하며 인기를 모았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 조흔파, 최요안, 오영민 등의 작품들이 학원 소설 문고인 <아리랑 문고>로 출판되고 있었지요. <남궁동자>, <억만이의 미소>, <2미터 선생님>, <꼬마전>, <개구장이 나일등>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수많은 학원 명랑물들 중 가장 뛰어나며,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다름아닌 <얄개전>입니다. 70년대에는 영화로도 각색되어 이승현, 손창호 등이 주연한 <고교 얄개>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80년대 이후 만화가 전면에 등장하고 여타 각종 다른 오락물들이 청소년들의 문화 세계를 점령하고 나면서 이러한 학원 소설들은 침체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새로운 변변한 창작물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입시 경쟁이 심화되면서 순수 오락물인 청소년 소설을 읽을 만한 여유도 줄어 들었겠지요. 시대상도 맞지 않는 옛날 옛적 고리짝 소설들을 읽느니 차라리 전자 오락실이나 영화관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아졌습니다. 요새는 인터넷이나 PC 게임등에 몰두 하겠지요. 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오락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얄개전>은 KK 중학교 1학년생인 나두수를 주인공으로 그가 벌이는 여러가지 기발한 장난과 풋사랑, 분투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학년생인 나두수가 KK 중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된 것은 그의 화려한 장난 이력서에 기인합니다. 교장 선생님부터 누나, 매형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장난 대상에는 성역이 없습니다. 공부보다 장난을 꾸미는데 더욱 열중하는 그가 낙제생이 된건 필연인듯 합니다. 동갑내기들이 3학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1학년에 머무르고 있는 나두수군. 이제 심기일전, 모범생이자 신진 인격자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신진 인격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나두수가 장난을 거를수야 없는 법. 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종일관 밝고 따뜻한 유머로 독자를 편안한 웃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 시절의 중학생들은 어떤면에서는 굉장히 어른스럽고 또 어떤면에서는 아주 아이답습니다. 영악함이 없어서 일까요.

학원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입시 경쟁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 요즘의 삭막한 학교에서 과중한 수업과 학원 수강등으로 지쳐가는 학생들이 <얄개전>을 통해 잠시라도 50년전 이땅의 선배 청소년들이 가졌던 낭만과 치기, 순수함과 열정 등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0여년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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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8-1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 고등학교때 열심히 찾아다니며 보고 듣던 영화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군요...이덕화, 임예진, 김현도 있었습니다. 개구쟁이였지만 오늘의 학원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장난들...세상은 변했습니다...인정해야 합니다.

oldhand 2004-08-1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변했지요. 뭐 좋아진 점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자꾸 안좋게 변한것들만 더 크게 보이는 법이죠. 이덕화, 임예진, 전영록 등이 주연을 한 "진짜 진짜" 시리즈가 있었죠. 아 파란여우님은 그 시절에 극장에서 그 영화들을 보셨겠군요.

파란여우 2004-08-12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진짜 좋아해, 진짜찐짜 잊지마, 진짜진짜 가지마..등등...임예진은 거의 부잣집 딸이거나, 백혈병에 걸려 죽는 역할..전 임예진을 중1때(1977년) 직접 가까이서 보았고, 그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도 했습니다. 뭐, 거의 엑스트라 수준이었지만요...영화제목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우리 학교 교정에서 촬영했는데 제가 지나가면서 한 마디 던지는 역할이었지요..제 싸인 필요하세요?..헤헤

oldhand 2004-08-1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파란여우님이 전직 영화배우셨군요!!! 女宇가 아니라 女優 신걸요. 나중에 정말 싸인 받아야 겠어요. 으하하. 저보다 좀 나이어린 친구들은 임예진이 "당대의 청춘 스타" 였다는걸 잘 못 믿더라구요. 대학가요제 사회도 보고 그랬는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은 김내성의 원작 소설을 참 재밌게 읽었었지요. 아마 영화도 티비에서 할 때 한번쯤 봤겠죠? 그럼 어쩌면 파란여우님도 봤었겠네요?
 

3. 제 2의 고향 광주

다섯살되던 해의 봄, 나는 광주에 왔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도시로 온 젊은이는 아니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서.
형과 누나는 다니던 학교를 옮기는 등 큰 변화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앞길에 개울이 없어졌고 집의 마당이 조금 좁아졌다는 정도의 변화였을 뿐이었다.

새로 살게될 집의 마당은 길다란 편이었으며 마당 구석에 연탄창고가 있고 창고위로 장독대가 있었다. 이 구조는 매우 긴요한 것으로 후일 눈싸움등을 할 때 좋은 요새가 되어 주곤 했다. 그리고 마당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꽃밭겸 화단이 있었는데, 아주 큰 향나무가 있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그 화단은 오래지 않아 갖가지 꽃들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여러 색깔의 철쭉, 수국, 앵두나무, 장미 등이 계절에 따라 우리집을 수놓았다. 꽃 피는 계절에는 마당에서 기념사진 한판 찍는것이 우리의 연중행사가 될 정도로. 이 화단은 굉장히 울창해져서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들어가면 거의 찾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고 후일에는 다람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새 집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과 부엌방 사이, 재래식 부엌의 위에 위치한 다락은 어린 나의 놀이공간으로,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있는 보물창고로 부족함이 없었다.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던 어둑어둑한 다락방에서 나는 책도 보고, 낮잠도 잤다.

나는 새로운 집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으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친구가 생겼다. 옆집에 살던 남자아이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우리는 창틀에 올라 매달린 채 타잔 소리를 신호로 해서 담 너머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그 친구는 우리 동네 딱지치기계의 1인자였으며 아직 딱지에 입문하지 않았던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수업료는 비쌌다. 나는 강자인 그에게 번번히 패했으며 그때마다 뒷마당에서 혼자 맹렬한 연습을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나는 어렸을때 성격이 꽤나 포악했다. 반면 나보다 다섯살이나 위인 형은 무척 관대하여 나는 늘상 형을 이겨보려고 덤비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무엇때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가난 나는 형을 쫓아다니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마당을 뱅글뱅글 돌며 추격전을 펼친끝에 장동대 계단에서 형을 몰아세운 나는 내 키만 한 삽을 들고 형을 위협했다. 장난치듯 방어하던 형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사고가 터졌다. 삽모서리에 내 머리가 찍힌 것이다. 크게 찢기진 않았지만 피가 얼굴로 줄줄 흘렀고 나는 자지러질듯이 울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형도 무척 놀랐으리라.
요새 같으면 응당 병원으로 달려갔을테지만 때는 70년대 중반 아닌가.
나는 폼나는 환자가 되는 대신 된장을 바르고 쑥을 입히고 머플러로 머리를 감은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것도 성냥팔이 소녀 스타일로 말이다.

시간은 흘러 나는 학교에 입학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나에게 학교는 처음으로 '제도'라는 것을 가르쳤다. 부모님 말씀만 잘 들으면(듣지 않을때가 훨씬 많지만) 세상을 살아 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감으로써 책임과 의무, 규칙에 대해 배운다. 사실 그것들 중 진정으로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 몇개나 있을까?
'아, 이곳이 그토록 내가 동경해오던 학교의 정체인가?'
오늘도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지나간 자신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처지를 돌이킬수 없음에 괴로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초등학교 시절 잠시 외삼촌이 우리집에 지내게 되면서 새로운 심부름이 생겼다. 바로 그것은 '담배 심부름'.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담배라는 물건은 내게 꽤나 생소했다. 당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피우던 담배는 500원짜리 '거북선'과 '태양'(일명 썬). 외삼촌은 5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눈썹이 휘날리게 가서 거북선 한갑 사오너라"
담배가게에 거북선도 떨어지고 태양도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거북선은 아니지만 거북선이 그려진 담배를 샀다. 그 담배는 바로 '한산도'. 가격은 330원.
'어라? 거북선이 한개도 아니고 여러개 그려져있는데 값은 더싸네? 크하하. 칭찬받을지도 몰라'
결과는?  '은하수'로 바꾸기 위해 나는 다시 열나게 뛰어가야만 했다.
돈이 마침 떨어진 외삼촌이 100원짜리 담배을 사오라고 시켰고, 100원짜리 담배가 어딨냐고 반항하다 두들겨 맞고 울면서 가게에 갔던 일도 있다.
"잉잉.. 아저씨, 100원짜리 담배 하나만 주세요"
"여기 있다"
'엉? 정말 100원짜리 담배가 있잖아? 으... 이럴줄 알았으면 매 맞기 전에 사오는건데..'
내심 억울했던 나는 지금도 주황색 포장의 100원짜리 담배 '환희'를 기억한다.
세월이 적지않게 흐른 지금, 50줄에 접어든 외삼촌은 오래전에 담배를 끊으셨고 10년 넘게 애연가였던 나도 금연을 위해 노력중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광주는 서울보다 눈이 많이 온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순천 등지에서 자라던 나는 광주에서 처음 눈오는 광경을 보고 신기해했다. 기온이 높아 녹는 속도도 빠르지만 그것은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위에서 일뿐, 80년대 초반까지 동네 어귀의 골목은 비포장 흙길이었던 우리 동네는 눈이 한번 오면 응달은 봄이 올때까지 눈이 쌓여있곤 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눈이 내렸다. 당시 내 무릎이나 정강이까지 눈이 쌓이는 일이 빈번했으니 말이다.
눈 내리는 겨울날 누나와 밖에 나가 동네의 눈쌓인 비탈길에서 썰매를 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던 기억이 난다. 너무 늦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릴 찾아 나서기도 하셨다. 겨울의 빙판타기는 부모님의 꾸중을 각오할 만큼 신나고 재밌는 놀이였다. 눈쌓인 비탈에서 비료부대를 타고 질주하는 그 재미란!


.....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성에 대통령이 죽고 그 이후 이어지던 숨가쁘던 정치상황. 12.12 사태, 서울의 봄. 계엄령...
그리고 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의 유년시절의 막바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철없던 내가 당시의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을리는 없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혼동되던 그 시기는 나에게 합법의 탈을 쓴 국가권력이 절대적으로 선한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철없이 멋모르고 까불던 나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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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8-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음편에는 청소년기의 방황이 그려지겠군요. 기대 됩니다. 이것은 서사시입니다.^^

oldhand 2004-08-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이거.. 이게 마지막인데요.. 6년쯤 전에 썼던 글을 약간 손봐서 올린겁니다. 서사시씩이나요. 지금이라도 청소년기 이야기를 쓰자니 제가 너무 평범해놔서 별로 쓸 이야기도 없구요. 흑흑흑.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해요. 흑흑흑.
 

2. 대덕과 고흥의 짧은 추억

순천에 사는 동안 아버지의 근무지가 몇번 바뀌었고, 그에 따라 몇달간 어머니와 누나, 나 (방학중에는 형까지)는 아버지의 근무지에서 보낸 적이 있다.

대덕, 충남에도 대덕이란 곳이 있지만 여기서 대덕은 물론 전남에 있는 지명이다. 아주 작은 면으로 전남 장흥군에 속해 있다. 바다가 가깝고 이조백자 도예지가 있는 대덕, 내가 3-4살때 몇달간 지낸, 아주 몇몇의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 있는 곳이다.

 - 오토바이 아저씨
당시 아버지의 직장에 근무하던 아저씨 였던 것 같다.
내 눈에 그야말로 신기하고 멋있어 보이던 커다란 오토바이(실제로는 커다랗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를 타고 다녔으며 우리집에 자주 오셨었다.
당시 우리가 머물던 집은 관사에 해당하는 듯한 집이었고 마당이 굉장히 넓고 앞뒤가 트인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었다. 마당에는 개구리들이 굉장히 많아서 개굴개굴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오토바이의 뒤에 나를 태우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던 아저씨의 넓은 등과 신이 나서 더 태워달라고 조르던 내모습이 생각난다.

 - 풍차바지와 찐빵
어머니는 가끔 누나와 나를 집에 남겨두고 외출을 하셨는데, 집에 남겨진 어린 남매는 TV를 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 나는 풍차바지(어떻게 생겼는 지는 아실것이다.)를 입고 있었다는데 내가 넓은 마루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흘려놓은 '부산물'들을 6살배기였던 누나가 다 치워 주곤 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런 지저분한 기억은 추호도 없다.)
지금도 누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조숙했던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며 공치사를 하곤한다. 물론 풍차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놀림도 빼놓지 않고.
그 때가 겨울이었는지 어머니는 외출하셨다가 집에 오실때 꼭 찐빵을 사가지고 오셨는데 그때의 찐빵 맛은 기억이 없지만 모락모락 김이 나던 봉지에 들어있던 하얀 찐빵의 탐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고흥, 광주에서도 차로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남해의 끄트머리에 불쑥 튀어나온 고흥반도에 자리잡은 곳. 국립 나병환자 요양소가 있는 소록도가 있고 다도해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나로도, 외나로도가 있는 곳이다. 4살때 몇달간을 보낸 고흥의 기억은 대덕에서의 어렴풋한 기억에 비해 비교적 소상하다.

고흥에서는 세를 들어 살았었는데, 주인집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조였다. 가운데 있던 마당에는 화단이 있었고, 해바라기가 많이 피어있었다.

 - 막냉이 이모
주인집에는 딸이 둘 있었는데, 언니는 하얀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던 고등학생이었고, 동생은 단발머리의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동생을 나는 '막냉이(막내) 이모'라고 부르며 무척 따랐었는데, 자주 주인집에 놀러가 '아카시아꿀'에 밥을 비벼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막냉이 이모도 나를 좋아하여 우리는 자주 동네의 놀이터에 놀러가거나 이런저런 놀잇감을 찾아 나와 놀아 주곤 했다.
막냉이 이모... 지금은 40대 중반의 중년 부인이 되어 있겠지.

 - 어깨동무
당시 초등학생이던 형과 누나는 방학때 고흥에 와 있었는데, 어머니를 졸라서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를 사보게 되었다. (익히 아시겠지만, <어깨동무>는 <새소년>, <소년중앙> 등과 함께 70-80년대 어린이 잡지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었다.) 눈오는 날 어머니가 사들고 온 75년 1월호 <어깨동무>, 그로부터 10 년 가까이 -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몇번 빼먹지 않고 열심히 구독했던 잡지이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주먹대장', '요철발명왕', '도깨비 감투'등은 글을 모르던 나에게도 만화라는 매체의 마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어린 시절의 감성과 교양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단한권도 남아 있지 않지만 <어깨동무>는 유소년기 나의 보물이었다.

아버지는 고흥에서 다시 광주로 발령을 받으셨다. 순천의 집을 정리하고 어머니는 고흥에 있던 몇몇 짐을 싸서 우리는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커다란 트럭에 짐을 싣고 트럭 앞자리의 어머니 옆에 앉아서 광주로 향하던 그날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나에게 세상은 굉장히 넓었으며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큰 도시인 광주는 새로운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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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4-08-1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흥 살던 그 시절에 먹었던 기억은 납니다. 어떤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 좀 호사스러웠나요? 핫핫. 어차피 얻어먹은 건데요 뭐.
 

98년 당시 활동하던 하이텔의 모 작은 모임에 올렸던 잡글을 옛 글의 보관 차원에서 약간 수정하여 올림

요사이 부쩍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어머니나 형, 누나 등 식구들이 모이면 우리 어릴적 이야기가 주요 화재가 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사나 보다.

1. 나의 살던 고향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순천시이다. 지도를 보면 전라남도의 동남쪽, 여수반도의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다. 6.25 전쟁전에 여수.순천 사건이 있었으며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광주로 이사오기전 5살때까지 나는 순천에서 자랐다.
나는 자잘한 일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아주 어렸을적 지냈을 뿐이지만 제법 많은 고향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초반 그곳은 행정구역상 '市'였지만 시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순천을 떠올릴 때면 집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집앞에는 제법 큰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시멘트로 된 다리가 있었다.
어린 나의 눈에는 무척 큰 개천과 다리로 기억되지만 다리에 난간이 없었던 점이나 누나가 다리에서 떨어졌으나 이마만 약간 깨진 일등을 미루어 볼때 그다지 큰 하천도, 높은 다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물이 맑아서 동네 아이들이 물에 들어가 물장구도 치고 송사리나 피래미도 잡으며 놀았지만 불행히도 나는 너무 어렸었는지 냇가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던 기억은 없다.

우리집은 뒷마당이 꽤 넓었으며 뒷마당 맨 구석에 화장실(변소라 함이 옳을듯)이 있었고 마당을 빙둘러 화단이 있었다.
형과 함께 마당에서 공을 차거나 세발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며 안방인지 건넌방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으나 창문에 매달려 뒷마당을 내다보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앞마당은 약간 좁았으나 무화과 나무가 있어서 곧잘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무화과의 그 달콤한 맛은 어린 나에게 큰 유혹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나무에 올랐었다. 어머니에게 들켜 혼난적도 있지만 할머니께서는 눈감아 주셨던 것 같다.

내가 어느정도 문밖 출입을 할 수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미 형과 누나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나에게는 자연스레 친구가 생겼다.
앞집에 사는 남자아이 였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살 많았으나 키는 내가 더 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사귄 친구였기에 당시에는 눈만 뜨면 친구를 찾곤 했다.

하루는 그 친구와 집앞 길에서 놀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너희 몇 살이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세살이요"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는 꽤나 오래전 일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다지 중요한 일인것도 아닌데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도 미스테리이다.)

집 뒷쪽 냇가 옆으로 언덕이 있었고 언덕너머에 군용 비행장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언덕에 올라가 헬리콥터나 경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당시의 주요한 놀이중 하나였다.

우리집이 있는 골목 끝의 모퉁이에 할아버지가 주인인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고 구멍가게의 좌판에 놓여있던 과자, 풍선 따위를 구경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그 중 나의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던 좌판위의 물건이 있다.

바로 그것은 '하얀 밀가루를 발라 놓은 분홍색 막대기 풍선'. 한 뼘 정도의 크기지만 불면 꽤나 커진다.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막대기 풍선에는 밀가루가 발라져 있었다. 아마도 고무로 된 재질이 서로 늘어 붙지 않기 위함이었을 듯. 요새 어린 아이들은 막대기 풍선하면 야구장에서 나눠주거나 판매하는 응원용 막대기 풍선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밀가루가 발라진 막대기 풍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꽤나 선명했던지 아직도 어렴풋하게 분홍색 막대기 풍선의 영상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풍선이나 과자를 샀던 기억은 없다. 단지 구경만 하는 것으로도 어린 나에게는 흥미진진한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당시 전자제품 구입에 굉장히 선구적인 의욕을 갖고 계셨다.
당시 우리집에는 동네에 흔치 않던 TV, 선풍기, 세탁기등이 있었으니 부자도 아닌 우리집으로서는 초호화판 전자제품으로 중무장 한 것이었고 그것도 TV나 선풍기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니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TV는 긴 다리가 4개 달리고 여닫이 문이 있는 고전 TV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그 TV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영웅이었던 '타잔'을 만날 수 있었고 영원한 어린이의 친구 '우주소년 아톰'과 '배트맨과 로빈'도 볼 수 있었다.
당시 몇년간은 보자기를 목에 묶고 배트맨 흉내를 내는 아이들(슈퍼맨이 국내에 등장하기 전이다.)과 "아아아~~~아아아아"를 외치고 다니는 작은 타잔들로 동네 골목길들이 시끌벅적 했었다.

어릴적 아이들에겐 학교는 동경의 대상이며 미지의 영역이다.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꽤나 학교에 빨리 다니고 싶어서 안달을 했었다.
형과 누나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를 졸라서 갔던 것 같다.
학교에 가서 봤던 끝없이 넓던 운동장!
우리집 뒷마당 보다도 100배는 넓어보이는 운동장!
운동장 구석에 있던 능목, 구름다리, 시소, 그네.
그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있는 학생들.
쉬는시간이면 각 교실에서 떠들석거리며 밖으로 몰려 나오는 아이들.
아, 나도 빨리 학교에 다녔으면!

그러나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나는 결국 그 학교와 운동장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 놓지 못한다.

그리고 몇몇 기억의 단편들을 남기고 '순천시 매곡동' 우리집과 동네는 나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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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4-08-0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감상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되는것 같아요.
 
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나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즐겨 읽는 추리 소설과 간혹 여름마다 한 번씩 집어 들고 읽는 삼국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순문학적 소설을 읽어본것이 얼마만인지. (98년에 읽었던 <아홉살 인생>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것도 외국인 작가의 소설을!  평소에 "한국인에게는 한국 사람의 정서를 가진 소설가에 의해 한국어로 씌여진 소설이 번역된 소설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재미있다."라는 소신(아, 물론 즐겨읽는 미스테리 소설 등 장르 문학은 예외이다. 장르문학은 작가의 국적이 작품의 색깔을 나타내는 중요 요소라고 생각한다.)을 갖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례적인 독서였음에 틀림없었다.

<적의 화장법>이라는 책에 대해서 듣고 "아멜리 노통"이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었는데, 그 작가의 처녀작이 나왔다고 알라딘의 대문에 큼지막하게 떠서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쉴새없는 대화에 의해 진행된다는 소설에 대한 소개글은 끝없이 이어지는 젊은이와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갈파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야말로 탐정소설의 기원이라는 존 딕슨 카의 농 섞인 주장(모자 수집광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모처럼 특별요리를 먹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은 과연 쉴새없이 품어져 나오는 유머와 독설, 그리고 문학에 대한 견해와 이름도 미처 몰랐던 구미 작가들(특히 프랑스 작가들)의 문학세계에 대한 피력등으로 섬섬히 수놓아져 있었다. 문학적 지식도 부족하고, 소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생각하긴 어렵지만, 모처럼 읽은 순문학이라서 그런지 지루함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긴장하지 않고 그냥 술술 읽어도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그 촌철살인의 대사만으로 보는 재미는 충분히 넘쳐흘렀으니까.

프레텍스타 타슈의 과거의 숨겨진 사건의 내막이 드러나고 그가 걸렸던 연골암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의 의미가 드러나는 부분은 이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주제를 갖고 있는 날카로운 이 소설을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중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고, 그러한 중화 작용이 이 책의 완성도를 한결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온것 같다. 처녀작 답지 않은 작가의 노련함이 베어나온다.  굳이 부족한 부분을 찾자면, 니나의 등장 이후 타슈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다소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아아.. 더 이상의 심도 깊은 리뷰는 내공이 부족해서 못할 것 같다. 어쨌든 재밌게 읽었으니 나는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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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4-08-1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두려움과 떨림> 이후로 노통은 한동안 쉬고 있었는데,
"처녀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혹을 또 얼마 동안 뿌리칠 수 있을런지..
oldhand님의 별 네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도서관에 이 책이 들어왔으려나?

oldhand 2004-08-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흑. 소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저의 별 네개는 염두에 두시는게 큰 도움은 못될듯 합니다. 많은 분량이 아니니까 그냥 심심파적 삼아 읽으신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