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 차남'
위계 질서를 어느정도 중시하는 집안에서 내가 갖고 있는 계급장이었다.
더구나 형과 누나는 나보다 빼어난 모범생이었고, 우등생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형의 중학교 입학식은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과 같은 날이었다. 마침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치른 배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낸 형은 입학생 대표 선서를 할 예정이었고, 나의 입학식은 위기아닌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내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나와 동행한 이는 바로 나의 외할머니셨다. 8살짜리 꼬마의 손을 잡고 교정에 들어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할머니는 당시 예순일곱살이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 어머니의 연세와 딱 일치한다.) 입학식의 기억은 눈이 어두운 할머니와 함께 반편성 배치표에서 내 이름을 어렵게 찾아내던 장면으로 끝이 난다. 혹여나 그날의 나는 나의 입학식을 제쳐두고 형의 입학식에 참석하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외할머니에게 투정과 짜증으로 풀어놓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나지만, 광주로 이사온 이후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외할머니가 사셨기 때문에,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과 기억들도 적지 않다. 어린 시절 포악스럽기 그지없는 성깔을 자랑했던 내게 '구저구저(성깔이 궂다는 의미로)'라는 별명을 붙여주시기도 하셨고, 내가 대학에 입학할때엔 쌈짓돈, 용돈을 아껴가면서 모으신 거금 20만원(당시로서는, 그리고 할머님 당신에게는 더더욱, 거금이었다)을 축하한다며 내 손에 쥐어주셨었다. 항상 깔끔하고 얌전한 성품이셨던 외할머니는 자손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장수를 누리셨다.
그리고, 지난 주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외할머니의 부음을 듣게되었다. 콩주때문에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광주에 도착한 시간은 어느새 밤 9시를 지나 있었고, 3일간의 장례에 참석하면서, 외할머니와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을 남겼다. 향년 아흔 다섯, 수명이 길어진 요즈음에도 보기드문 호상이었지만, 피붙이 간의 영원한 이별은 언제나 가슴 아픈 법. 칠순을 훌쩍 넘긴 이모님이나 지하철 무임 승차 연령이신 어머니,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있는 두 딸은 눈물을 흘리시며 당신들의 어머니를 보내셨다.
1912년 생이시니, 그 살아온 역정을 어찌 다 말로 풀어놓겠는가. 한국사의 굵직한 질곡을 모두 겪으셨을 할머니의 지난했을 인생에 머리가 숙여진다. 망월동 공원묘지에 외할머니를 모시던 날은 초겨울 치고는 무척 햇살 따뜻한 날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지 바로 옆에 누우신 외할머니. 문득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보니 돌아가신 연도가 1955년이다. 50년이 넘어서야 다시 만나신 두 분은 못다한 인생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계실까.
초등학교 입학식날, 양산을 들고 내 손을 잡아 이끄시던 외할머니의 고왔던 한복 자락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