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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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쉽게 읽히는 책을, 나의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고민이 되었다. 읽기가 쉽다고 쉬운 책은 아닐 터이다. 줄거리? 어릿광대를 고리로 해서 줄줄 이어지는 이야기만 추리면 그래서? 하고 말 것이다. 어릿광대를 보고 구토를 동반한 혐오감을 갖는 주인공이 모리스 파퐁의 재판장에 어릿광대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주 작은 시위일 뿐이다. 그 앞에는 그가 끔찍하게 생각했던 '어릿광대 아버지'의 역사가 있고, 그 앞에는 죽음 직전에 어릿광대의 웃음으로 그 극한 긴장을 위무하던, 또한 가해자가 된 자신의 입장의 끔찍함을 어릿광대 노릇으로 스스로 극복하려 했던 한 어릿광대 출신의 독일병사가 있다.

마치 그것은 사랑의 쇠사슬처럼, 그 천박해 보이는 짓거리 뒤에 사람에 대한 눈물나는 위로 -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죽음 직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위로, 얌심으로서의 그 짓 - 를 연이어 하는 것이다. 물론 아들의 그것은 아까 말했다시피 위로라기보다 시위에 가깝지만.

적의 포로를 위해 광대짓을 한 독일병사나, 자기 대신, 자기의 실수로 죽은 전기공에 대한 참회로 광대짓을 한 초등학교 교사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사적 몸짓으로 광대옷을 입고 법정으로 가는 아들이나, 그들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역사는 파퐁처럼 '거물'의 행적과 그에 대한 심판과 단죄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그나마 그런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 나라도 이 지구상에는 있다!). 그러나 진실은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썩은 땅을 씻어내리는 맑은 물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아직 이 처참한 땅이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또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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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의 제국
에릭 슐로서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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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구석에 자본주의와 빈부격차, 식민주의, 분단, 인종주의 들이 숨어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생각하며 먹고, 입고, 쓰고 말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겠나.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은 일종의 삶의 철학으로 그 사람의 생활태도의 기본을 만든다.

햄버거 한 입을 먹어도 거기서 자본의 논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저 밑으로 흐르는 기본 철학과 관련된 문제이다. 게다가 논증의 방법이 발로 뛰어 검증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믿음은 돈독해지고 독자들의 삶에 변화를 줄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막 한국에 출판된 무렵 유럽 여행에서 맥도널드를 은근히 비꼬는 여행가이드로부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은 7차교육과정에서 법정 스님의 '먹어서 죽는다'라는 단원을 가르치면서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 그 내용의 일부분을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햄버거나 패스트 푸드를 몸살나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충격에 몰아넣어 당장 그것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15분 정도 들려주는 동안 아이들의 표정에서 최소한 유혹에 앞서 한 번쯤 망설이게 될 변화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단원을 마칠 때 '음식문화신문'을 만들면서 불건강한 육식, 특히 인스턴트 식품에 대한 경각심을 정리했고 때맞춰 TV와 각종 언론에서 채식을 부추기면서 어느 정도 그 '의식화'에 대한 상승작용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앉아서 쓴 글과는 다른 생동하는 매력이 때로는 소설보다 흥미있었던 글, 그러나 그 노력과 논증의 방법보다 일관되게 빛나던 문제의식이 더 돋보이던 책, 거기에다가(이것은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번역 과정에서 붙은 제목이 암시하는 그 바탕(패스트 푸드가 존재하고 번성할 수 밖에 없는 속성으로서의)... (그건 일종의 멋진 음식 고명 혹은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 괜찮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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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창고로 가는 길 - 박물관 기행 산문
신현림 글, 사진 / 마음산책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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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세기말 불르스'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뭐였는지, 사진이 조금 곁들여진 외국시모음집이었던가. 그녀는 솔직하다는 점에서, 한때 몹시 외로웠다는 점에서 나와 닮은 점이 있다. 게다가 자기를 미화시키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있다. 이땅의 30대(이제는 40대까지?) 젊은 여성 문인들이 아닌척 하며 자기도취적이고 미화적인, 그리고 시니컬한 글들을 쓰면서 비슷한 자아를 가진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고, 그리하여 많이 '팔아먹기'도 했다. 신현림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재치와 감성까지!

그래서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이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진, 박물관, 시인, 이 결합. 거기다 '기행'. 그래서 급히 가지고 싶어하고 기다렸던 책이, 아 글쎄 신변잡기 일기장 같이 보이는 건 왠일일까. 물론 일기가 문학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여지껏 신현림의 글쓰기가 마치 혼자 누구도 의식하지 아니하고 쓴 듯이 써서 더욱 솔직하고 발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리하여 빛나는 것과 그리하여 부족한 것 사이는 백지 한 장 차이란 말인가. 사진도 그렇다. 그런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책에 보여줄 것으로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사진을 놓는 편집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사진들이 조잡해 보이는 것도 거슬린다.

신변잡기 같이 보이고 넋두리 같이 들리지만 그 안에 빛나는 감성을 보며 즐겁던 신현림의 글귀들도 기록을 위한 기록, 혹은 출판을 위한 출판, 어린 사람의 일기장 같이 느껴지는 부족함으로 보여 영 거슬린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괜찮게 여겼던 작가를 덜하게 보게 된게 아깝다는 것이다. 이 책을 만나지 않고 한참 후 그녀가 정성껏 쓴 다른 책을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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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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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소설이 주는 재미, 긴박감, 논리적 해법, 이런 것들은 내가 평소에 즐기는 것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다른 추리소설도 이 정도를 갖출 수 있다면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매혹된 것은 그런 부분은 아니다. 에코가 중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읽으며 도저히 20세기에 쓰여진 책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중세로 우리를 이끈다.

아, 물론 중세 유럽, 카돌릭, 이것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요한묵시록도 내가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니었던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 있다면 중세 카돌릭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갖고 있던 관점이다. 그리고 윌리엄이란 사람의 미덕. 종교인으로서뿐 아니라 어니 세기 어느 곳에서나 윌리엄과 같은 인물은 (실존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으로서)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선지자나 현자나 지도자로서 보다는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졌기에 더 매력있다.

또 하나, 에코의 이 문장력! 이 책이 길고도 길었던 것은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었던 축복이었다. 소설도 어찌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을 때 밑줄도 치지만 중요한 페이지를 접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책을 다 읽은 후 접힌 부분을 펴면 대개는 밑줄도 없다. 연필을 들고 그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서 대체 왜 이 페이지를 접었는지 생각해 본다.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안는 곳은 아마도 강도가 떨어지는 어떤 귀절이 있었을 터. 과감히 접힌 곳을 풀어버린다. 어떤 곳은 그 묘사 전체를 갖고 싶은 곳을 수도 있다.

장미의 이름, 특히 하권에 무수히 접힌 자욱을 본다. 아드소가 여자 때문에 흔들리는 '3시과' 부분은 미간에 얼음칼을 들이댄 듯 서늘한 아름다움마저 있다. 그 심리 묘사의 탁월함, 그 신비한 분위기, 갈등... 알 것 같다, 알 것 같다....

물론 에코의 문장이 탁월했겠지만 번역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글들도 오만방자한 오역으로 인해 우리에게 졸문으로, 어렵기만 한 글로 다가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문학적 감각이 뛰어난 번역가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평가와 보상에 인색하다. 그 만큼 오역과 날림번역이 많았던 것이 탓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번역자가 누구인가 확인하고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관심으로 그가 많은 번역작이 있고 더러 소설을 쓰기도 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찾아 읽기도 했다. 소설이 내 취향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건 문학을 하는 사람이기에 더 아름다운 번역이 가능했겠구나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창작품만으로 충분히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움베르코 에코도 이윤기씨에게 조금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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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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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에 온갖 공상을 하고 뭐, 꼭 그걸 진짜라고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정말 이러저러한,- 어른들이 보기엔 시시껍절한- 일들이 참으로 나름대로 중요할 수 있다. 있었다. 나도 그랬다. 말 잘 듣는 아이 축에 들었지만 온갖 공상들과 사건들이 내 머리를 참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른은, 선생님은 어떤가? 그림책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사각모를 쓰고 나오는 근엄한 선생님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존의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부친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가령 그런 거짓말이 아이의 상상력에서든 불안한 현실에서든 강박증에서든 어떤 심리적 원인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번이라도 그걸 헤아려보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벌을 준다. 300번 쓰기, 벽 보고 서있기, 빈 방에 갇혀 있기...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걸까? 학교 가는 길에 하마나 사자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점잖아지는 과정이 교육이란 걸까? 더구나 3,400번 똑같은 말을 베껴쓰거나 가두어지면서? 그래서 비로소 존은 '학교가는 일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까지 교화된다. 그리고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은 고릴라에게 잡혀있다. 존은 자기의 상상력 속에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어린시절에게 그렇게 고한다. '학교에 고릴라 따위는 없다'라고.

이것은 한편 검은 옷과 사각모와 회초리와 벌과 쌀쌀맞은 말투로 상징되는 - 나도 교사이지만, 왜 고래로 항상 교사들의 이미지는 그런 것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 마치 '정치인', '위선적인 종교인', '권위적인 교사' 식으로 고정된 부정적 이미지.... 인정한다. - 교사, 학교, 교육에 대한 똥침이요 복수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달라져가는, 단정해져가는, 세계가 좁아져 가는 존의 성장기록이기도 하다.
불쌍한 존 패트릭 노먼 멕허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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