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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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는 우리나라 혁신학교의 중요한 교육철학적, 방법론적 기반이 된 이론이다. 도움이 될 만 한 좋은 이론이자 실천의 생산물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배움의 공동체를 접하면서 씁쓸했던 점이 있다. 89,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그 전신인 전교협의 활동은 이미 그 이전부터 계속되었다. 전교협, 전교조 초기 시절 많은 교사들이 꿈꾸었던 학교 현장의 변화그 첫 번째가 바로 교실에서 구현되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업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 두레 수업이었다. 오늘날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게 된 모둠수업의 뿌리이다. 배움의 공동체와 두레수업은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활동을 중심에 놓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게 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20년도 더 된 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동체 수업은 그 이론적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도는 신세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아직도 전교조에서는 참교육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방학마다 현장에서 굳건히 뿌리내린 수업방식이나 학급운영 방식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교육적 이론도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잇는 전교조의 근간 정신도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역시 전교조 조합원이지만 전교조의 큰 과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집단은 되었는지 몰라도 학교 현장을 개혁시키지는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은 많은 변화를 이루었음에도 그것이 이후에 더 큰 발전의 역량이 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 놓고 뒤늦게 일본에서 배움의 공동체이론이 들어오자 다들 거기에 열광한다. 우리가 지고 있던 더 좋은 열매를 내던져버리고 남의 것을 좇는다.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업 정말 잘해볼 열정과 의지가 있는 좋은 교사들인데도 말이다.

 

우치다 열풍도 그렇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땅에서 교육혁신을 꿈꾼다 하는 젊은 교사들이 솔깃해 하는 이름이다. 우리에겐 그만큼 꼭지가 될 만한 수장이, 이론이, 지도자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그 이름에 혹해 책을 펼쳐 보았다. 솔직히 그 이름을 언급하여 열풍에 어떤 식으로든 가세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실제보다 큰 옷을 입은 명망가들이 참 많다. 적어도 그런 허세에 바람을 더 넣어주고 싶지는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치다는 허세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거나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추앙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진단한 일본, 특히 일본의 교육은 우리의 것과 많이 닮은 듯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교육현장을 진단하는 데 우치다를 많이 언급한다.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닮은 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약 20년의 간격을 두고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교육의 여러 가지 현상에서 일본가 걸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하고 예견이 되는 것도 많다. 그러니 일본을 진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정확한 진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치다의 일본 진단은 정확한가? 일단 그의 시각은 올바른가? 즉 그가 올바른 시각으로 일본을 정확히 진단했는가와 그런 일본 사회 진단과 분석이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가, 이 조건들을 다 충족시킨다면 그의 글과 말은 주목받을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로는 아니다.

  

일단 우치다의 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물론 사회학이라는 게 정량적 분석이 불가능하긴 하다. 경험들이 모여 분석의 근거가 되므로 100프로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학자나 언론인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의 자료를 모으려 애쓴다. 우치다의 예시들은 그런 노력이 없다.

 

또 우치다의 시선은 올바르지 않다.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한데 그의 눈높이는 매우 보수적이다. 일본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다 보니 흔히 말하는 루저들, 학교와 교육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올바르게 보지 않는다. 고작 유의미한 시선으로 꼽아보자면 그들이 학교 수업을 거부하는 것은 무기력하고 나타하고 도태된 인간들이라서가 아니라 일부러그리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정도다. 일부러 그러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주목하고 우치다의 혜안을 칭송한다. 그럼 왜? 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해석은 없다. 대안도 없다.

가끔 일본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허망한 지점이 있다. 주인공들은 매우 시크하게 자기자신을 객체화 시켜 현실의 아픔에 젖어들지 않는다. 딱 거기까지. 그래서 현실을 어떻게 극복했다거나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없다. 냉소로 끝.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 냉소함. 오벼 파이는 것은 나의 내장일지라도 나는 마취제를 맞고 누워있으므로 얼마든지 고통 받는 나의 내장을 냉소할 수 있다. 멋지지? 이렇게 끝나는 수많은 일본소설들처럼 우치다의 거부자들에 대한 시선 역시 그러하다. 우치다는 그들이 왜 학교와 수업을 거부하는지, 그래서 그런 이들을 학교는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 혹은 일본 사회가 앞으로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를 무엇으로 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작 일부러 거부하는 거라고, 이거 내가 알아낸 거라고, 그러면 쓰겠어? ?! 하고 야단도 친다. 사회학자연하는 사람이 호통을 치고 가르치려 드는 건 또 뭔가? 지나친 냉소적 거부에 대한 지나친 열정적 개입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이래 다같이 사이좋게 도우면서 살자라는 가치를 버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같은 기치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공동체(비록 그것이 건전한 것일지라도) 아래 가능했던 것이고 그와 같은 공동체의 가치는 마르크스의 노동자의 단결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금은 자본의 기치 아래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끼리는 단결이 가능하겠지. 마치 두 가치가 하나의 뿌리인 양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오류는 범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본인의 민족성 같은 것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그런 개별화와 분열에 대해 참견하는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대안이랍시고 내놓고 있다.

니트족에 대한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도 방치하면 노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봐야 소용없단다. 가정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미 늦는다고. 그런데 니트가 나오는 가정은 대체로 소득이 낮다는 분석은 하면서 그 사회적 구조나 상관관계는 염두에 두지 않는가? 가난한 가정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분석하지 않나? 원인을 빈곤가정에서 찾았다면 사회에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빈곤가정에서 가정교육도 못 받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아 니트족이 되지 않도록 방지할 것인가와 같은 대안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닌지. 그런데 대안이랍시고 주제넘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라’, 체험교육을 하라,종교적 인간을 길러라...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답답했던 것은 우치다가 아니다. 그렇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름 그 책만큼의 무게로 유의미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열광하는 한국의 교육관련 종사자들이다. 그것도 꽤나 진보적이고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 말이다.

우치다의 모든 담론이 다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열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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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5-05-1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 ^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주셨네요 ^ ^

박상희 2016-04-2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지 못한 얘기들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양의계곡 2021-07-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너무 속시원한 리뷰!!!
대체 왜 이런 구닥다리 책에 열광하는 건지 원...
한국에도 그만큼 꼰대가 많다는 방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