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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브 광장의 작은 책방
에릭 드 케르멜 지음, 강현주 옮김 / 뜨인돌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석 같은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부분이 없다. 책 속 서술자가 나였으면, 싶었다.
나는 지금 중학교에서 선머슴 같은 남자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문학을 가르친다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저 강아지 같은 소년들과 윤동주를 말하고 자기 시를 쓸 때의 진지함을 말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며 잘 살고 있다. 이 충분한 교감이 상처받지 않고, 가장 아쉬울 때 퇴직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퇴직하면 시골집에 작은 어린이 도서관을 갖는 게 꿈이다. 으리으리하지 않은, 그냥 ‘시골집’에서 그냥 막 자라는 풀꽃들로 마당을 삼고 가끔씩 찾아오는 어린 손님들을 위해 책을 준비하는 그런 도서관 말이다.
나탈리는 물론 나보다 더 에너지 넘치는 서점 주인이다. 아름다운 남프랑스, 햇살이 좋은 위제라는 작은 시골 마을 에르브 광장에 서점을 열었다. 부럽다. 광장이 내다보이는 서점도, 그녀의 집 -‘우리 정원은 몇 그루의 올리브나무, 세 그루의 커다란 편백나무, 아가판서스 꽃과 라벤더 꽃이 이는 토스카나 분위기의 잘 정돈된 마당에 가까웠다’ 는- 도. 유럽은 유럽의 것. 나는 나만의 것으로 마당도, 책이 많은 책장도, 책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햇살도 갖고 싶은 것이다.
나탈리는 서점에 온 손님들에게 책을 권한다. 기꺼이 대화를 나눈다. 그가 단지 서점 운영자이고 장사꾼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나탈리는 ‘책으로 맺어진 형제’라 칭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가진 재능을 사람들과 나눌 의무가 있다. 책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책을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복무일 것이다. 나탈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낸다.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선생처럼, 가끔은 친구처럼, 몰래 애인처럼 말이다. 글을 모르는 이국의 젊은 새댁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여행자에게 여행지에 대한 책을 권하기도 한다.
고리타분한 독서에 딸을 가두는 엄마와 거기서 탈출하려는 딸 끌로에 이야기는 인상 깊다. 나탈리는 ‘몇몇 학교나 가정에서 문학은 19세기에 멈춰 있다’고 말하면서 ‘어린 학생들이 감성을 키우려면 고전문학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게 나탈리가 권하는 책으로 자기만의 독서를 시작한 소녀의 날갯짓으로 그 가족으로 불통에 기안한 가족의 아픔마저 치유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나 역시 교사로서 상처받은 아이와 그 상처의 근원이 된 가족, 아이의 부모와의 대화를 시도하곤 했지만 소설과 달리 나의 개입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해피엔딩적이지도 않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문제는 밖에서의 관심이나 돌봄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뿌리가 깊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서나마 이런 행복한 결말들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이후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해본다.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고전소설 같이 단순한, 그런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단순명쾌한 문제해결이 현실을 극복하게 할 리야 없지만 잠시라도 그런 기쁨을 맛보고, 맛보게 하고 싶다고.
끌로에는 자신이 책에서 읽은 여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도 그녀처럼 되고 싶어요. 아주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에요.
나에게도 소년들을 독서의 길로 이끈 경험이 많다. 국어시간을 통해서도 그러하고 담임으로서도 그러하고 두레일기를 쓰거나 학급문고를 운영하거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도 그렇다. 아이들에게 책 선물을 자주 하는 편인데 이보다 좋은 생활지도가 없다. 아무리 거칠게 행동하는 아이도 아무리 상처가 깊은 아이도, 자기에게 책을 선물로 주는 어른 앞에서는 자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대개의 아이들이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해 일탈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아무 책이라도 좋겠지만 자기 이야기를 반영한 책, 자기가 정말 읽고 싶었던 책, 읽고 나서 독서나 삶의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한 책을 건네주는 어른이 있다면 그 아이는 살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아이가 있었다. 녀석은 학폭위가 열려 징계 명령을 받은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것처럼 보였다. 급식시간에 치마를 입고 온 내 뒤에서 ‘아이스케키’ 동작을 하는 것을 유리창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전까지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잠을 자도, 친구를 때렸다고 해도, 껄렁대며 무리들을 이끌고 다녀도 다 ‘어린아이라 그렇지, 뭐’ 하고 용서가 되었던 녀석이 몹시도 싫어졌다. 도대체 자기에게 늘 다정하고 너그러웠던 교사에게, 그것도 나이가 50이 넘은 선생에게 그런 장난을 왜 하는 걸까? 이맘때 남자아이들은 위악을 떨면서 무리에서의 서열을 정비하는데 녀석은 아마도 ‘나 이렇게 교사도 능멸할 수 있는 놈이야, 내가 두목 맞지?’ 이런 걸 아이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춘기 때 허세 떠는 남자아이들의 심리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복도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늘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아이에겐 건성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 담임에게 그러더란다. “안정선 선생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늘 다정하셨는데 요즘은 안 그러셔서요.” 웃고 말았다. 아이들이 미워질 때도 많지만 열 번에 열 번 용서하고 보듬지 않으면 선생일 수 있으랴 싶다. 그래서 그녀석이 사회봉사를 가기로 한 전날 나는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아들이 군대에 가 있을 때 내가 보내준 시집, ‘검열필’ 도장이 찍힌 시집 <딸아 외로울 땐 시를 읽으렴>을 건넸다.
“이 책은 내가 제자들에게 많이 선물하는 책이야. 하지만 이 도장, 이거 보이지? 이 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샘 아들의 군대 가 있을 때 내가 보내 준 책, 제대하면서 가지고 나온 거거든. 이 책 너 줄게. 네가 올해 겪은 일들, 너에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누군가를 때리고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 나쁜 일을 겪기 전에 배우고 성찰한 계기로 삼는다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어. 사회봉사 가서 생각 많이 하길 바란다. 선생님이 이 책을 주는 마음도 헤아려 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라고 말하며.
그래서 아이가 천사가 되었느냐고? 현실에 그런 드라마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그 아이는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사회봉사를 다녀와서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의젓하게 말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훗날 어른이 되면 중학교 때의 자기가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서서히, 조금씩 성장한다는 걸 잘 아니까.
나탈리는 문학과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은 사다리가 되어주는 이런 문학을 좋아한다. 그 흔적을 통해서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
나는 책들에 둘러싸인 채 혼자가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럴 때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탈리는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서점을 운영하고 도서관을 관리하고 문학교사가 되고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교사가 된 사람, 문학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 생계의 수단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즉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더라도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그런데 나탈리는 ‘진심으로’ 문학과 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는 직관력도 뛰어나고 그 사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다만, 딸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는 좀 불안하다. 심리적으로 딸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보이고, 아마도 그로 인해 딸과 불화가 생겼겠지 싶은 태도들이 있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너그럽고 객관적인 나탈리가 오직 딸에게만은 작은 일에도 금방 상처받고 화를 내는 이유가 무얼까. 기질적으로 나탈리는 안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고 딸은 예술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인 듯 보이는데, 딸의 에너지를 품고 이해하기엔 나탈리는 조금 소심한 엄마인 건지도 모르겠다.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가 딸을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개는 엄마들이 딸에게 자기 자아의 희망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젊은 딸은 언제나 넓은 세상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하고 늙은 엄마는 딸이 별일 없이 살기를 바란다. 클로에에게 엄마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가 자기 세계를 개척할 때 좀더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던 나탈리는 그 이야기를 자신의 딸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딸이 자유로워져야 엄마도 자유로워진다. 영원한 숙제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