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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사유와 열정의 오선지에 우주를 그리다 ㅣ 문화 평전 심포지엄 3
마르틴 게크 지음, 마성일 옮김 / 북캠퍼스 / 2020년 1월
평점 :
사춘기 때와 대학 시절 가슴 속에 깊이 품었던 질문은 바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 거기서 거기일 게 분명한 같은 구조의 존재가 선과 악의 끝과 끝을, 고귀함과 미천함의 끝과 끝을 달리는 일이 많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 질문은 점점 옅어진다. 인생 거기서 거기다, 위대함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그토록 어마어마한가? 이런 회의도 들게 된다. 훌륭하다는 인물들 삶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나약함, 현실주의, 위선이 존재하던가.
하지만 베토벤을 읽고 들으면서 다시 그 질문을 돌이켜본다. 한없이 하찮기도 하지만 한없이 위대할 수도 있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그 질문을.
사실 베토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음악은 흘려들어 아는 정도였고 인성이 괴팍한 천재 정도로 여겼으니까. 마르틴 게크의 <베토벤>은 그 문장이 훌륭하다는 서평을 어디선가 보고 궁금해서였다. 문장 그 자체의 아름다움은 내 관심사 중 하나이다. 공부 삼아 읽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책을 읽고 거기 언급된 그의 음악을 하나씩 찾아 들으면서 읽게 되었다. 게다가 집에는 남편이 사 온 얀 카이에르스의 <베토벤>도 있어 같은 장면이나 음악을 언급할 때 두 책을 함께 펴놓고 읽었다. 마침 이채훈의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책 세 권으로 베토벤을 만난 셈이다.
제일 먼저 <에로이카>를 들었다. 나폴레옹과 얽힌 에피소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새삼 나폴레옹에 대한 새로운 상념과 더불어 음악이 궁금해진 것이다. 책 속에서 ‘독일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헤겔, 휠덜린, 베토벤은 1770년생 동갑내기로 한 살 위인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 후 휠덜린이 쓴 <축제의 제후>는 가상인물이며 헤겔은 나폴레옹 체제를 기껏해야 ‘이성 국가’로 가는 과도기로 보았고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주려던 교향곡 <에로이카>의 헌정 표지를 찢어버렸다.’ 라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예술가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거리는 조금씩 다를 수 있을 수 있으나 삶과 세상에서 동떨어진 예술은 없다는 게 나의 의견이고 예술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대목에 마음이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은 침략자이고 독재자이며 권력욕의 끝판왕으로 평가받지만 이 세상을 근대로 나아가게 한 대단한 사람임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헤겔이나 베토벤 등은 나폴레옹을 통해 세상의 격변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때의 격정은 베토벤의 다른 음악에도 자주 등장한다. 베토벤의 음악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웅장하고 비장하고 장엄하게 해준다. 실제로 그는 그런 가치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멀리서 프랑스 혁명에 동조했고, 나폴레옹이 그 혁명을 마무리하는 사람일 것이라 기대했다. 만약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에로이카>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다면 베토벤은 자신이 숭고하게 생각하는 거대 담론 가치를 그대로 독재자에게 바치고 현실정치와 손잡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런 권력욕과 타협하지 않았다.
<월광> <템페스트> 정도나 들어보았고 다른 교향곡도 잘 알려진 악장이나 테마 부분 정도나 들어보았던 내가 3번, 5번, 9번을 거쳐 6번까지 차례로 다 들어본다. 집에서 20년 넘게 자리만 차지하던 클래식 cd 세트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출퇴근 차에서 오롯이 나와 음악에 집중해 베토벤을 들으며 2021년 가을을 보냈다. 가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음악을 들으러 간다. 3층 c열 등받이 높은 좌석에 앉아 듣다가 졸다가, 이렇게 나만의 시간을 즐기곤 하지만 그건 음악을 감상한다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음악’을 듣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아프고 바빠 다른 세계의 것으로 밀어두었던 음악의 세계로 들어간다. 제2의 인생은 이런 것 아닐까?
<합창> 교향곡 가사를 보면서 그 장대한 스케일에 감동을 받았다. 당연하고 위대한 거대담론인데 뻔하지 않은 가치를 담고 있다. 실러의 시라고 한다. 뻔한 듯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들은 소중하다. 당연하지만 자주 이야기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삶의 작은 부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때로는 인간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언급하고 공유하고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틴 게티는 ‘우리는 음악을 관통하는 위대하고 실존적인 메시지를 감지해야 한다.’ 고 썼다.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기도하는 듯한 태도는 청자를 강요하지 않고 숨 쉴 수 있게 하는 모차르트의 ‘연극적 태도’와 대비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왜 내가 베토벤에 더 끌리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즐겁게 살기보다 기도하듯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물론 이다음에는 모차르트를 살펴볼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