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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가해자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손현주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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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가해자>는 그 제목에 이끌려 문제작이 될 것만 같아 제일 처음 집어든 책이다. <가짜 모범생>의 충격적인 내용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지만 어쩌면 가장 가까운 이가 가장 위험한 자일 수 있다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가정폭력이나 친구가 폭력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하지만 제목은 좀 과했다. 그 가해자는 위험하고 사악한 자가 아니었기에. 그렇더라도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탄탄하다.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년 주인공, 혹은 주변 인물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계도가 가능한, 근본은 선한, 나름 사연이 있어서 나빠졌거나 위선을 떨고 있는,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면 손현주의 작품에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나쁜 사람인 누군가가 등장한다. 그게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악한 존재를 이해해주어야 하는 건지에 대한 작가는 생각은 어디에 닿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감정을 싹 걷어낸 채 사악하게만 그려지는 영화나 드라마 속 가해자의 심정을 헤아려볼 때가 있다.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나서 두렵고 죄책감이 들었을 텐데, 인생이 끝난 절망감을 느꼈을 텐데. 가해자의 시점에서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접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저지른 주인공 준형이를 동정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아이의 행동도 그를 감싸는 부모의 행태도 어리석고 이기적일 뿐. 어떻게 정의를 구현하려고 소설은 이렇게 펼쳐지나 싶을 무렵 등장한 친구가 아니었으면 소설은 학원범죄물이나 전작처럼 비뚤어진 자식 사랑이 아이를 망쳤다, 류의 주제로 흘러갈 뻔했다.

 

손현주의 작품이 주는 씁쓸함을 어떻게 가셔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남학생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드문 이 청소년 소설계에서 제법 생각할 거리를 건네주는 소설은 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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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비밀 창비청소년문학 143
강은지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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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오늘의 교육> 2026년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청소년 소설은 재미있다. 나처럼 수십 권(후다닥)을 읽어대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을 법한데 절대 그렇지 않다. 어느 소설에나 성장의 서사가 있고 고난의 가정사가 있지만 때로는 판타지로, 때로는 음습하게, 그러면서도 빛나는 메시지를 담는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청소년들에게도 선택받아야 하므로 무지하게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소란한 비밀>은 거짓말에 대한 소설이다. 청소년기에 거짓말은 흔한 경험이다. 어쩌면 거짓말의 터널은 성장의 무수한 터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겪는 흔한 경험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관계를 해칠 수도 있고, 심지어 몸에 배어 영영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기도 하는, 중요한 경험이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많고 거짓 이라기보다 마음과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 상황도 있게 마련이다. 이 소설은 다섯 명의 청소년(소녀)들이 거짓말 무덤이라는 익명의 사이트에서 자신의 거짓을 털어놓다가 그것들이 세상에 다 까발려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청소년이라고 늘 희망적이고 교훈적인 것만 읽으란 말이냐고 반문한다면, 그런 것들이 읽고 싶다면 그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얼마든지 음습하고 끔찍하고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 반영들이 있으니 거기까지 독서력을 확장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사실은 결론은 다 나름 훈훈할지라도 청소년 소설에도 아동학대, 임신과 출산, 버림받음, 배신과 살인, 이간질과 악플, 지독한 가난, 가출 등 비린내 나는 현실이 난무한다. <소란한 비밀>에도 입양, 부모의 이혼과 재혼, 특히 외국에서 온 새엄마, 치열한 경쟁, 그리고 왕따와 같은 문제들이 뾰족하다. 추리소설처럼 거짓말한 아이들을 추적하고, 그걸 폭로한 아이를 찾아내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이러다가 모두 파국으로 가(진 않겠지만)면 어쩌나 싶은 위기의 단계도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 누구도 악인으로 흑화되지 않는다. 결말이 훈훈한 것은 독자와 타협을 했기 때문도 청소년 소설다운 올바름을 의식한 때문도 아니다. 실제로 거짓말을 하되 내면으로는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이겨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현실 속에 훨씬 많기 때문이다.

 

거짓말 무덤에 묻고 싶었던 각자의 거짓들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거짓이 드러나는 순간은 본인에게는 지옥문이 열리는 시간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말고는 그 거짓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따로 없어 보인다. 작가도 말한다. 솔직하게 말하고, 화내고, 울음을 터뜨리라고. 그런 소통이 아니면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네 마음의 지옥은 결코 헤어나올 수 없다고. 물론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을 털어놓을 수 있는 너 자신의 용기이겠지만 네 곁에는 꼭, 왜 그랬냐고 화내 주고, 그러나 다 들어주겠노라, 이제는 솔직한 네 마음을 들려달라고 곁을 지켜주는 친구나 가족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나, 빛나, 유진, 아율, 그리고 다온 이렇게 다섯 아이들은 거짓말 무덤을 열고 세상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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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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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매우 공감한다(물론 저자의 이후 작품인 하이데거론도 극장이라 붙이긴 했지만) 나라는 독자야말로 아주 드라마틱한 한 인간론을 극장에서 본 것 같은 느낌으로, 니체의 모든 삶과 말을 하나의 무대에서 다채롭게 보여주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으니까. 고명섭은 니체 작품들은 하나의 독특한 공간을 구성한다며 극장이라 이름 붙일 만한 공간이라고 했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이 매우 잘 지어졌다 생각하고 책을 즐겼다.

 

세 번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지만 끝을 맺은 적 없다. 난해해서일까? 난해하기로라면 <파우스트>도 만만찮은데, 맥락이 없더라도 아름답고 강렬한 문장만으로도 나는 그 책을 좋아했을 법한데 왜 끝까지 읽지 않았을까? 아마도 니체가 주창하려는 것과 나의 가치관은 번번이 삐걱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단 하나의 원전도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칼 융의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를 읽으며 니체가 궁금해졌다. 융이 니체를 일컬어 자아팽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래, 내가 그의 책을 읽기 싫었던 이유는 융이 지적한 대로 과잉된 자아(속세의 말로 하면 허세 쩌는 자의식이다)가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또 좋아하는 작가들이 니체를 언급할 때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니체를 말할 때마다 도대체 내가 보기에는 맥락이 합리적이지 않은 말들을 해댄 니체가 어떤 사람이길래 수많은 이들이 그토록 자기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그를 언급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고명섭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 고명섭이 니체 이야기를 한단다. 그래, 평론을 읽고 나중에 원전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 삶이란 게 원래 수많은 파생상품에 둘러싸여, 아니 더 멋진 파생상품에 둘러싸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도 하는,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이참에 어쩌면 나는 이상하게 마음에 껄끄러웠던 니체에 대한 오해를 풀고 정식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리고 내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 두껍디두꺼운 책은 너무나도 재미있다. 니체의 모든 작품을 다 해설해 주었고 얼마나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끼쳤는지 자세히 말해주었으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껄끄러워하는지도 설명해 준다. 그렇다고 그에 매몰되어 편을 들기만 하지도 않는다. 또 그렇다고 사실만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고명섭은 마치 아주 잘 소화된 이야기를 관객들 눈높이에 맞춰 들려주는 친절한 해설사 같다. 그런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왜곡이나 편파의 오류를 범하지도 않는다. 잠이 안 올 때 <니체 극장>을 읽으며 긴 시간을 보낸 날이 많다. 머리맡에 철학, 과학, 소설, 만화 등 다양한 책들을 쌓아 두고 이책 저책 섭렵하다 잠이 들곤 하는데, <니체 극장>은 다른 책으로 갈아타지 않아도 될 만큼 재미있었다. 하긴, 철학책이라기보다 인물사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니. 니체의 사상을 훑는 중간중간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보통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이토록 긴 시간 읽고 나면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생겨 책을 덮을 때 서운할 법도 한데 니체는 조금도 정이 가지 않았다는 것만 좀 특이하긴 하다.

 

나는 니체가 숭앙받는 현상을 두고 꿈보다 해몽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보다 더 많은 해석들, 그리고 해석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무수한 니체 파생상품들이 거대한 문화권력이 되는 현상.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천재이나 누구에게는 미친 자로 느껴지는 사람.자의식 과잉에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부조화와 불균형의 이상한 사람’, 헛소리를 정성껏 아름답게 써놓은 자. 다만 그 표현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친 천재를 숭앙하는 이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설득해주면 좋겠다. 왜 니체를 꼭 읽어야 하는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가인 고명섭조차 해내지 못한 그 일을.

 

작가의 시대성이란 게 있다. 도덕의 잣대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르다. 과거의 철학자를 현대의 도덕 관념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니체의 민주주의 혐오, 여성 혐오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게 너무 불편해서, 아무리 니체가 천재라 해도 그 예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다만 라캉의 승화개념대로 니체가 뛰어난 필력과 사고력으로 이와 같은 저서를 쓰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더 불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안에 들끓던 상념들이 사람들의 사고를 촉발하고 상상력을 북돋운 것, 비록 그의 가치관에는 문제가 많았을지라도 그로 인해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갈 상념들을 체계로 구축한, 그러니까 니체에 빚진 많은 문학가와 사상가들을 생각한다면 그의 승화는 고마운 일이긴 하다.

 

그래도 단지 재미만을 위해서 읽은 책도 아닌데 주인공인 니체에 대한 칭찬으로 끝을 맺고 싶다. 그가 던진 질문 중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다(아마도 니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문장들을 붙잡고 자기 인생을 경작하면서 니체에게 감사함을 느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너는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높이 끌어올렸는가?”

 

한때는 높고 고결한 가치가 인생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의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거웠던 시절이 지나 점점 내 가족의 안위와 나의 평안을 꿈꾼다. 그런 시점에서 저 질문은 다시 한 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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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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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급박한 사건의 전개, 퍼즐 맞추기처럼 뛰어난 플롯, 반전, 뛰어난 심리 묘사, 절묘한 문장.... 김애란은 어느 쪽일까?

이번 소설집은 사건이 주는 재미랄 게 딱히 없이도 끝까지 읽고 싶어지는 매력의 단편들이 가득했다. 읽으면서 내내 이 재미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도 한번쯤 겪어보았을 법한 미묘한 갈등이나 심리의 변화를 잡아내는데 그게 지루하지 않다. 그렇다고 기교를 부린 문장들이 난무하지도 않는데(최근에 본 어떤 인터뷰에서 놀라운 문장력을 구사하는 김애란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었구나, 감탄한 적이 있지만 정작 그의 소설에서는 문장의 화려함이 시그니처는 아닌 듯했다.), 빠져든다.

 

표제작인 <안녕이라 그랬어>는 온라인으로 영어수업을 하는 장면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이 왜 지방에서 직업도 가족도 없이 한적하게 지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온라인 영어 수업의 대화 중에 그런 곤혹스러움이나 외로움의 느낌을 납득하게 하지만 그게 그리 강렬한 사건들은 아니다. 그런데 영어 강사와 주인공 사이의 덤덤한 대화 사이에서 미묘한 흔들림, 특히 외로움 같은 게 섬세하게 묻어난다. 원래 우리들의 일상 대화도 별것 없는 대화와 대사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내 말투나 표현에 오해의 소지는 없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가.

절제된 감정을 뒤로 하고 마지막 수업에 남기는 인사, 그저 안녕’ - 그 무수한 뉘앙스의 안녕으로 끝을 맺는다. 새벽에 책을 읽다가 결말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다른 약속을 잡으려나, 약간의 고백이라도, 감사라도, 연정의 안개라도 피울까 싶었던 마지막 인사가 안녕,에서 갑자기 뚝 끊겨버린 결말. 잔잔한 가운데 낯선 충격이었달까.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한,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관점에서 내내 책을 읽은 신선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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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3
존 보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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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부유한 독일인 가족이 통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이들이 독일군 장교 가족이려니 했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은, 그래 수용소일 테고, 그렇다면 최근에 우연히 광고로 본 무슨 영화의 원작인가 싶었다. 그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수영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행복하게 사는 독일인들 이야기랬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검색해 보니 그 영화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동명의 다른 원작을 둔 영화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독일인들이 실제로 거주했던 지역이다. 영화도 그렇겠지만 내가 읽은 <줄무늬> 소설 속 이야기도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단다.

 

이 소설은 독일 장교의 아들인 아홉 살 소년 부르노가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낯선 곳에 이주한 소년은 무료해서 우연히 집 바로 뒤에 있는 철조망을 따라 걷다가 생일마저 같은 날인 친구 하나를 사귄다. 친구는 수용소에 가두어진 폴란드 아이다. 나이도 같고 생일마저 같은 두 아이는 각각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철조망을 사시에 두고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하지만 어쩌면 하늘과 땅 사이일지도 모르는 두 아이의 삶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어느 날 행복했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점,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놀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친구가 없다는 것까지도. 주인공 부루노 역시 친구와 자연을 잃고 갇힌 삶, 억압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전쟁은 그 누구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아야 하는 두 어린이는 서로 닮았고, 그렇게 사랑하는 친구가 된다.

 

소설이 뒤쪽으로 가면서 결말이 어떻게 날지 궁금했다. 아마도 주인공은 친구를 잃겠지. 부르노가 슬퍼하면서 어른이 되고 어린 날을 아프게 회상하려나. 우리에게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생생하고 아픈 문학작품이 많지만 가해자 입장에서 그 때를 돌아보는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로 수용소를 감시했던 이의 아들 눈에는 이 참상이 어떻게 비춰질까. 그리고 어른이 된다면 더더욱, 그것을 부끄러워 참회할까 혹은 최소한의 자기변명을 하려들까.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부루노는 어른이 된 후 이 일을 어떻게 가슴 아프게 회상하려나.

 

하지만 그런 상상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

 

내겐 이 소설의 결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끝을 맺을지는 몰랐다.

마치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대속하는 것 같은 결말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대속이든 뭐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용서될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새삼 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와 다를 바 없는 일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프다. 가해자들은 왜 모르나, 그런 일들이 결국 너희들 자녀에게도 상처가 되고 결국 그들도 다치게 한다는 것을. 하긴, 가해자는 손톱만큼도 자기 재산, 권력, 양심에 상처를 입지 않는 높은 곳에 앉아 있겠지. 끝끝내 후회도 반성도 하지 않겠지. 그의 명령에 따르고 그와 뜻을 같이 한 그 아랫것들, 그리고 그와 같은 국민들이 대신 욕 먹고 반성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복수를 당하겠지. 이 거악의 철저한 악함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으려나. 과거의 일 같지 않고 남의 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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