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수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삶의 해를 구하는 공부
카를 지크문트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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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과학이나 수학 에세이를 읽는다. 이 책 <어떻게 수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도 그 매혹적인 제목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그러다 뒤로 가면서 연산 어쩌구 하며 식이 나오는 지점부터 남은 페이지를 세기 시작하는 나. 대충 읽어야지 하면서도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인 줄 아는 미련한 사람인지라 이 책을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메모해 놓은 부분을 노트북에 정리한 후 서평을 쓰는데 역시나, 내가 플래그를 붙여놓은 곳들은 수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설명이나 어떤 서사들이다. 그래, 수학책이라고 꼭 수학적 역량을 높이는 데 써야 하나?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이야기로 읽는 것이고, 인문학 공부를 한 사람의 시선으로 볼 수도 있는 거지. 특히나 요즘 열심히 철학책들을 읽고 있는데 많은 철학자들이 수학자이기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어떤 수학적 연구를 했다는 건지 몰랐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나와 재미있다. 우리가 아는 어지간한 철학자들은 수학자였거나 수학을 연구했다. 왜 아니겠는가. 철학은 그저 세상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헤아리려다 보면 논리가 필요하다. 철학과 논리학, 수학은 그렇게 연결돼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학 2학년 때 우리 국문과 수업도 아닌데 논리학수업을 들었다. 선배들이 타과생들에게 점수가 박하기도 하거니와 너무 어려워 수강 포기하는 애들도 많다고, 우리 과 천재인 아무개도 쩔쩔맸다더라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동해 수강신청을 했다. P가 어떻고 Q가 어쩌구 하는 그 수업은 재미있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뭔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학점은 B 언저리 받았던 것 같다. <어떻게 수학을> 책을 읽다 보니 버트란트 러셀이 모든 철학을 수학으로, 모든 수학을 철학으로 치환하고 싶어 했다는데 그때 내가 받은 수업의 논리학 수식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책의 앞부분에 도형 이야기 중 플라톤의 정다면체 이야기가 나온다. 오래 전부터 나의 삶, 직업, 아무 것과도 상관이 없지만 플라톤의 이 다섯 정다면체를 종이로 그려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교직원 품앗이 연수 할 때 수학 선생님에게 요걸 강의해 보시라고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렇게 책은 멀게 가깝게 우리에게 온갖 아이디어를 준다. 소크라테스가 노예소년에게 정사각형의 넓이를 구하게 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다만 이 책의 단점은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잘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로 잘 자리에서 책을 읽는 편인데 이런 식으로 적절히 알아들을 만한 수학 이야기가 나오면 그걸 이해하느라 잠을 놓치는 일이 있다. 인터넷에서 용어를 검색하기도 하고 답을 제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어딘가 답이 있지나 않을까 찾아보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 그리고 연수의 아이디어를 준 점 등 이 책에 고마운 점을 찾아 보았다. 수학에 넌더리를 내는 남편이 쉬운 수학 문제집를 사서 풀어볼까? 하길래 그러자, 그러자!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아마 초등 4학년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목표가 없는 공부만큼 무해하고 즐거운 공부도 없다. 해보자. .. 아이들이 다 취업에 성공하고 아프신 노부모 몸이 좀 좋아지고 우리가 퇴직을 하고 나면 그때. 모든 세사의 고민들이 별 거 아닌 게 되고 조곰조곰 늙어가는 우리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초등 수학 문제를 푸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또 아는가, 그때 우리에겐 우리보다 수학을 더 잘하는 손주가 생겨서

옆에서 연산을 가르쳐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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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있는 생각 - 소프트커버 보급판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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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상의 책무를 다하고 나서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얼까.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고 인형이나 옷을 만들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쓰고 마당에 호박을 심고... 물론 내 안에는 그런 놀이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 기쁜 선물이 되거나 돈이 되거나 명성이 되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다.

이수지 작가의 성취가 부러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단할 것이다. 만약 그 과정 자체가 열정에 사로잡혀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고 미치겠는 열망의 결과물을 냈는데 그게 대단한 것이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만질 수 있는 생각>은 작가가 그림책을 만든 과정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이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이나 편집자들을 만나는 과정이 잘 담겨 있으니 실용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는지가 담겨있다. 독자가 읽고 아, 이런 열정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 같다. 그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든 다른 창작자가 되고 싶든 말이다.

 

나도 최근에 쓰고 싶은 글이 있어 밑작업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가 자기 안에서 퐁퐁 솟아난다는데, 나는 그것들을 짜맞추고 쥐어짜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열정에 휩싸여 휘몰아치듯이 그 일만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행복한데, 아무래도 글쓰기는 내게 그런 영역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수지는, 그랬단다.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일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아이들이 잠들면 얼른 그림책 작업을 하고 싶었더랬다. 머릿속에 발상이 들끓고 손은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것도 괴롭겠지만 일을 할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었어도 열정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렇게 어떤 노작을 이루어냈을 때에는 이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일단 기쁘다. 그러다가 그것의 성공이 미약할 때 오는 현타가 있다. 좌절, 열등감, 분노, 무기력감으로 이어지는. 혹여 약간의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다음 작품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따라온다. 무언가 성취를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이런 과정을 작가 이수지도 겪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그림책 작가 중 손에 꼽히게 성공을 경험한 이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이는 자신의 작품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도록 열심히 발로 뛰었다. 출판사나 편집자와 연락하고 글작가와 소통하는 노력 와중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어필한다. 그 모두의 조화가 오늘날 이수지라는 작가를 만들었다.

 

그림책 작가라는, 내 관심 영역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이 분야 이야기를 열심히 읽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삶의 태도 자기 작업을 즐기는 와 더불어 어린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철학도 한몫했다. 자기 작품 중 하나에 대해 언급하면서 헤엄치는 아이 곁에 항상 드러나는 듯 드러나지 않는 바다사자를 그렸단다. “바다사자도 말없이 아이 곁을 지킨다. 어른은 그런 존재다.”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자기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아이를 앉혀 놓고 책과 함께 놀곤 했지요.”라는 말에서는 그가 어떻게 그림책 작업이라는 노동을 놀이로 승화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주 독자인 어린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가 드러난다. 책에서 눈에 띈 매우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이 있다. 나도 처음 그의 명성 때문에 그림책을 보고 ? 일반적인 아이들 그림책 느낌이 아닌데? 이건 뭐지?’ 싶었던 것처럼 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귀엽고 따뜻한 내용과 거리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지 자주 질문을 받는가 보다. 그에 대해 작가는 “‘귀여워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귀여움의 대상보다 항상 우위에 있다.... 귀여움의 대상은 자기 의견이 없어야 귀엽다. 의견이 있더라도 귀여운 정도의 의견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귀여운 -’ 존재라 생각하며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쉽고 귀여운 내용이나 읽어야 해,’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수지라는 작가는. 이런 사람이어야 그림책 작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 땅의 교사들,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들,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 애쓰는 어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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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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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권여선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읽은 소설이라고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한강의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정도가 생각난다. 아이들 한창 성장기라 바빴고, 다른 책 읽느라 바빴던 이유도 있지만 90년대부터 소설이 , ,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던 것 같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읽혀야 하기에 주로 청소년 소설 등 관련 작픔을 많이 읽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여간 청소년 소설가가 아닌 이상, 그리고 신문, 주간지 책 소개 리뷰를 통해서가 아니면 한국 소설가 이름을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노라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다가 어느 기사인지 리뷰인지에서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소설가, 필사하고 싶은 소설 등등에서 중 권여선 이름을 보았다. 이전에도 권여선의 이름은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잘 쓰기에 소설가들이 뽑은 소설가에 그 이름이 올랐을까, 언젠가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궁금함을 일단 그이의 소설 대신 <술꾼들의 모국어>로 해소한 점, 소설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씀 전한다.

 

농담 삼아 나도 언젠가 술 이야기 좀 써보련다 호언장담했던지라 유명한 소설가가 쓴 술 이야기가 안 땡길리 없다. 읽어 보니 사실은 술 이야기가 아니고 술안주 이야기에 가깝긴 하다. 안 그래도 한국 사회의 먹방 문화에 넌더리를 내는 입장에서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하지만 술안주 없는 술 이야기가 가능하겠나. 내가 모르는 남도 음식 혹은 권여선 가문의 독특한 음식도 등장하지만 음식 이야기를 떠나서 적어도 그의 맛깔스러운 문장에 입문하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술꾼들의 모국어>는 술이나 음식에 대한 공감보다는 세사에 시달려 잠 못 드는 밤에 마음을 달래는 마지막 책(잠자리에서 여러 권의 책을 읽다가 겨우 잠드를 스타일인지라) 읽기 의식으로 쓰였음을 고백한다. 편안하고, 푸근했다. 그런 위안의 책 한 권은 꼭 있어야 한다. 가만히 보면 어쨌거나 그런 책은 꼭 문학작품-주로 수필-이었던 것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 메리 올리버, 류이치 사카모토, 에마 미첼, 강맑 실...

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술과 음식 이야기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것 같다. 같은 음식, 평범한 음식도 실감을 느끼게 하고 공감하여 그 술을, 음식을 차리고 맛보고 맛 보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기에.

 

책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장면으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어느 날인가도 어묵을 먹으면서 채소를 주문했다. 어묵 국물을 충분히 섭취하고 채소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데 뭔가 기분이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집에 가서야 내가 어묵만 먹고 채소만 받고 아무에게도 돈을 내지 않고 왔다는 걸 알았다. 곧바로 돈을 치르러 갔더니, 분식집 여자는 그냥 서비스로 드셔도 되는데하면서 웃고, 채소가게 알바 여자는 어머, 난 받은 거 같은데해서 주인 여자의 어김없는 눈 흘김을 받고, 나는 내 정신머리가 그나마 붙어 있는지 나가는 중인지 모르겠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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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詩作法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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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책 속에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발견했다. 읽으면서 새삼, 문학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늘 문학작품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책들도 읽고 다른 취미생활도 하고 일상을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문학은, 종교는, 가족은 그런 것이다. 늘 거기에 최선을 다하지는 못해도 나의 가장 최후의 보루이며 품인 어떤 것. 오랜만에 그걸 깨달았다.

 

안도현의 글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다. 물론 <연어> 등 산문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기쁘게 해준 작가이지만 수업 강의록으로 보이는 이 책도 재미있게읽었다. 약간의 유머감각마저 느끼며.

시를 잘 쓰는 비법이란 게 있을까? 아무리 천재가 아닌 노력과 탐구가 중요하다고 모든 작가들이 시인들이 강조할지라도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영역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감정이 아니라 이야기를 실어 시를 쓰라는 말이다.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그 어떤 문학작품도 없다. 가장 깊은 시와 소설은 일상과 역사와 생활과 실제에 뿌리를 둔다. 그래, 그 짧은 시 <너에게 묻는다>에도 얼마나 많은 서사적 상상력이 발동되는가 말이다.

 

그는 시를 쓸 때 지키라는 계명조차 시처럼 썼다. 단지 그 제목만 옮겨적어 보아도 감정이 약간 격앙된 격문처럼 읽힌다. 비상계엄이라는 블랙 유머가 펼쳐지는 대한민국 2024년에, 오래전 쓰인 한 시인의 시 이렇게 써라격문. 다시, 세상을 살게, 살아남게 하는 것은 문학, 그리고 유머감각과 발랄함, 이라고 생각하며 읽어 보자.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어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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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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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의문이 든다. 83년생인 작가는 어째 엄마의 입장을 더 많이 대변하고 있을까,

곤란한 처지에 놓인 엄마, 허름한 집 한 채 있는 게 다인, 요양보호사로 살아야 하는 팍팍한 삶의 엄마. 그리고 박사까지 되었지만 시간 강사일 뿐인 곤궁한 딸은 집에 들어와 살겠다 한다. 그리고 동성의 애인까지 함께.

 

취업 준비생인 장성한 아들딸과 한집에 사는 나로서는 장성한 자녀와 한집살이가 어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나의 딸애는 책 제목만 보고 엄마, 이 책 왜 읽어?” 한다. 찔렸다며... 그렇게 킬킬거리며 미안함과 불편함을 서로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그 위의 아들은 결국 나이도 많은데 얹혀사는 게 미안하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든 동거든 한국 사회가 사회적 문제로 겪고 있는 청년 실업과 장기적 공시 준비생들의 고뇌가 우리집에도 거한 것뿐이라 생각한다. 물론 소설에서처럼 동성 연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문제 위에 문제를 얹지 않았을 뿐. 비슷한 사정의 집들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비슷하게 얹힐 수 있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부분은 동성애인을 가진 딸을 보는 엄마의 복장 터지는 상황이 아니었다. 딸애가 세상 불의에 맞서는 장면은, 그 기질은, 대한민국 30대 여성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아서 생각에 잠기게 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열정을 진보적으로 펼치는 존재들의 중심에는 30대 여성이 있다. 나의 딸 말마따나 처음에는 페미니즘의 관점, 즉 여성 인권에 눈을 떴지만 생각의 확산은 정치적 진보, 인권, 소수자나 이주민의 상황에 대한 이해, 자연, 기후 위기, 심지어 동물권(그리고 비거니즘, 환경론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이 그토록 환멸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을 안으로 똘똘 뭉쳐 진보적인 사람이 되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는 딸의 진보적 열정이 시간강사들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삶에 찌든 엄마는 그런 딸과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세대 간 갈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젊은 독자들은 외롭고 고단하고 강퍅한 딸의 삶에, 나이 든 독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자식 세대에 대한 푸념으로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했을지 모른다. 나는 한때 교사이기도 했다면서도 사유를 확장할 노력을 하지 않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세대로는 엄마 세대이나 의식으로는 딸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이상한 관점으로 소설을 읽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를 눈 번쩍 뜨게 한 것은 소설의 결말이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로서 한때 약자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이라는 노인을 돌보고 있었다. 가족이 없이 치매를 앓고 있던 그이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자 요양원은 젠을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무용한 병자로 취급한다. ‘엄마는 그에 맞서 싸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곧 그의 딸 그린의 모습이었다. 그린이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움에 나서는 것처럼 약자를 돌보던 엄마의 사유는 요양원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된다. 엄마는 무기력하고 보수적인 사람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고단한 삶은 같은 길로 수렴한다.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부당함에 맞서는 태도는 어떤 깊은 공부의 다음 단계가 아니라 인성이고 삶의 태도이다.

 

이 소설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끝, 혹은 각자의 이야기를 구시렁거리다 끝, 이 세상의 중심은 나야, , 하는 자아소설의 끝판왕, 그런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구호로 외치는 소설도 아니다. 그래서 아마 세상은 이 소설에 주목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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