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울어진 평등 - 부와 권력은 왜 불평등을 허락하는가
토마 피케티.마이클 샌델 지음, 장경덕 옮김 / 와이즈베리 / 2025년 5월
평점 :
피케티가 한참 부상할 때 <21세기 자본>을 구입했지만 앞부분만 읽고 미뤄두었다. 책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자료와 통계로 글을 이어가는 방식이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화제가 된 신간은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읽어야 할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에 그때의 통계자료는 벌써 낡은 것이 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진정한 독서가 아닌 남이 쓴 리뷰나 기사로만 접한 피케티, 이번에 <기울어진 평등>을 통해 알고 보니 이렇게까지 진보적일 줄이야. 그는 스스로를 ‘민주 사회주의와 연방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옹호’한다고 소개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재미있게 읽어 이미 알고 있던 마이클 샌델보다 토마 피케티의 발견이 즐거웠던 책이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과 토마 피케티의 경제학 대담집이다. 짧고 간결하지만 ‘공정한 경제’의 방향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두 학자는 유럽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1/3 이상을 소유(미국은 더 함)하는 등 지금 전세계적으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과거의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세계는 더 평등한 쪽으로 움직여 왔다고 본다. 유발 하라리가 20세기 이후 세상은 전에 비해 더 안전해졌다고 주장했던 것이 떠오르면서, 어쨌거나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보다는 그나마 세상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희망을 가져본다(물론 트럼프가 전횡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식으로 희망을 이야기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두 학자는 불평등의 세 가지 문제점(이슈)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접근권(교육, 의료 등), 정치적 평등, 인간적 존엄성으로 본다. 그러면서 이런 기본적인 평등권에 대해 탈상품화냐 급진적 재분배냐에 대해 논의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모든 기본권들이 ‘상품화’되어 있는 현실을 벗어나는 게 중요한데, 아예 근본적으로 ‘이것은 상품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주장하고 쟁취하는 것이 탈상품화인 듯하다. 의료보험을 민간자본이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하는 것, 교육을 공적 영역으로 두는 것 같은 것이리라. 급진적 재분배는 조세 정책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더 많은 복지를 행하는 것이겠다. 뭐 이게 딱 이분화될 수 있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정치는 섬세하게 탈상품화와 재분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으니까. 물론 두 사람은 학자들이니까 좀 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리라. 그들의 책이 많이 팔리고 강연이나 주장이 널리 퍼지고 영향력을 가질수록 세상이 달라질 테니까.
피케티는 말한다, ‘평등’이야말로 현대사회가 더 높은 번영을 이룬 핵심이라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지구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샌델은 전체 경제의 25% 가까이 되는 교육과 의료에서의 평등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사회적 국가 -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 에서뿐 아니라 20세기 몇십 년 동안 소득세 최고세율이 8, 90%까지 올랐던 한때의 미국에서도 이때 노동 시간당 국민소득이 높았었다고 입증한다. 지금의 미국이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된 이유는 보수정권의 반평등 정책 때문도 있겠지만 민주당의 탈노동자화, 친자본주의화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한다.
지금 세상의 불평등을 부추기는 능력주의는 이제 미국 공화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당은 진보라기보다 중도 보수에 가깝다고 말하는데(진보/보수를 선악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미국 민주당, 유럽 사민당, 영국 노동당 등 원래는 노동 계급과 중하위 계층을 옹호하는 정당. 미국 민주당 집권 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정당화함(클린턴, 오바마 등) 금융위기 때 오바마는 금융과 자본의 관계를 개조할지 복원할지 선택해야 했는데 그는 후자를 택했음.)처럼 보수화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진보 정당이 출현하기를 기대해 봐야 할 것 같다.
미국에서 샌더스가 열풍을 일으킬 때 응원하는 마음을 가져보았지만 결국 세력이 흐지부지돼 버리는 것을 보면서 1930년대에 불같이 일어났다가 억압 속에 사그라들었던 미국의 진보적 노동운동이 떠올랐다. 급진적인 진보는 늘 기득권 세력의 억압에 취약하지만 어떻게 시민들 속에 스며들어 함께 하느냐에 따라 소수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미국에서는 실패한 이유가 뭘까? 아니, 그게 성공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면 시민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경우가 흔치 않구나.
한때는 왜 우리에게는 프랑스와 같은 혁명의 역사가 없는가, 우리는 왜 늘 실패하는 민중의 역사만을 가져왔는가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다. 조선 시대의 모든 민란이 그랬고 동학혁명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의 투쟁, 해방공간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투쟁들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의 실패들이 밑거름이 되어 현대사에서 비민주, 반민주의 현장마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맞서는 경험으로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심지어 1987년 이후에는 그런 민중의 봉기(시민의 저항)이 성취감을 맛본다. 직선제를 쟁취하고 소고기 수입을 막아내고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시켰다. 지구상에는 그런 역사를 경험한 나라들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실패의 역사를 가졌다고 슬퍼했던 내가 틀렸던 거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샌델이 대입에서 추첨제를 주장하는 장면이다.
스탠포드 등에서는 한 해 소득이 9, 10만 달러 못 미치는 가정 학생들이 수업료나 기숙사비, 식비, 책값 등을 내지 않게 하고 있지만 문제는 소득 하위 50% 가정 출신 학생들 다 합친 것보다 상위 1% 가정 학생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계급 계층이 교육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은 전세계적 현상이겠지만 미국이나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이런 미국 대학에서 저소득층에 대해 특례 입학 등 공개적 압력과 도덕적 압력이 필요하다면서 센델은 대입 추첨제를 제안한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대학의 한 해 응시자가 6만 정도이고 입학 정원은 2천 명 정도인데 응시자 모두를 대상으로 입학사정위원회가 3만 명 정도를 추리고 그들 중 2천 명을 추첨해서 뽑자는 것이다.
예일대 대니얼 마코비츠 역시 대학들이 입학 설계할 때 저소득층 자녀가 전체 정원 2/3가 되도록 설계하라고 주장한다. 이 제한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는 것으로 하자면서.
얼핏 허황돼 보이는 이 제도의 장점은 ‘당신의 입학에 많은 행운이 따랐다는 사실을 일깨울 것이고 떨어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란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경쟁이 과열되는 것은 아마도 인재들이 많이 입학하고, 졸업하면 좋은 곳에 취업이 잘 되고, 뭐 이런 것들이 계속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의 높이를 낮추면 경쟁도 낮아질 것이다. 이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제도가 추첨제라는 것이다. 물론 극강의 경쟁과 성취로 자본주의 세상의 성장을 최고조로 올려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늘 그랬다. 이게 옳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런 주장에 설득되어 가만히 앉아서 기득권을 내주는 왕, 귀족, 부르부아, 부자들은 없었다. 그걸 얻어내는 과정에는 설득, 여론의 형성, 개혁뿐 아니라 부단한 투쟁, 때로는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의 긴장을 낮출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대입 추첨제가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신박한 주장이긴 하다. 우리나라도 오직 시험 성적만이 대입이든 취업이든 입문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 성적(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인성이나 적응력에서 아쉬운 인재들 – 그들은 또한 출발선부터 불공평하게 경제적으로 뒤처진 집안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센델의 말처럼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그것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로 여기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만약 그의 주장대로 입구를 넓히고, 그러니까 기준점을 하향하여 성적이 좀 낮더라도 다른 장점을 가진 젊은이들이 아예 좁은 경쟁률에 희생되지 않도록 다음 단계에서는 추첨을 통해 대입을 결정한다면, 대학의 몸값 자체가 그렇게 높을 이유도 없다. 과장된 긴장을(말하자면 ‘어깨뽕’을) 빼는 데 유용한 제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렇게 우수한 대학의 희소성을 희석하면서 서로 다른 계층이 무심코 어울리게 하는 것은 공유성을 되새기게 하는 효과도 따라온단다. 최상위층 자녀들과 빈곤층 자녀까지, 빈부격차를 넘어 젊은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는 학교가 최적의 장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공간의 차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군대와 학교만큼은 겉으로라도 공평하고 공정해야 하고 모든 계급 계층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또한 이 공간에서의 경험이 공정과 공평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확고히 하는 데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퇴행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보적인 목소리의 학자들이 중심을 잡고 있는 서구 세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의 학계와 대학가는, 가장 가난하고 허약하던 80, 90년대야말로 가장 진보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어떨지라도 적어도 학계에서는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을 논할 수 있던 그 시절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군부독재에 의한 탄압으로 진보적 목소리가 소멸한 것이 아니다. 취업과 돈과 연구비 경쟁,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 경쟁적 취업에 젊음의 열정도 학구열도 말라 죽어버린 젊은 대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대학은 더 이상 이상을 논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여러 논의들은 허공에 둥둥 뜬 이야기,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우리나라야 말로 불평등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곳 중 하나일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니다. 정치적 현실은 불안하긴 해도 지금 2026년 대한민국 정치의 방향이 아주 불길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한계가 있을지라도 ‘평등과 공정’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들이 있으리라. 그걸 막으려는 세력들이 아직 준동하지만 이제는 그 세력들에 그저 굴복만 하지 않는 시민의 힘이 수십 년 축적되어 대한민국을 지탱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진보적인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러니까 진보적인 학자들이여,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도 용서할 테니, 조금은 땅에서 너무 발이 동동 떠 있는 것 같아도 들어줄 테니 힘을 내서 더 나은 세상,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희망을 잃지 말라고, 통계든 역사든 경험이든 주장이든 모아서 이론으로 만들고 책으로 쓰고 강연을 하고 대담을 하며 학자의 역할을 다해 달라. 우리 세대는 이제 늙고 있지만 내 자식 세대, 더 어린 제자들의 세대,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더 어린 세대의 아이들이 아직 누리고 살아야 할 시대는 제발 덜 아프고 덜 불공정하기를, 자괴감과 열패감의 상처를 덜 받는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