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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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국문학과에 입학하고 나서야 신입생인 나는 서정주가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찬양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외우고 다녔던 천재 시인에게 그런 피 묻은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놓고 대학 1,2학년 생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시는 시대로 인정해야 한다, <화사><자화상> 같은 시들을 어떻게 버리냐는 주장과 위선자가 재주를 가졌다고 해서 그걸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정주를 엄청 찬양하는 문학소녀는 아니었기에 개인적인 박탈감은 없었지만 다른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에게도 그런 이면의 역사가 있으면 어쩌나 두려워졌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충격과 배신감은 살면서 꽤 여러 번 느낀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 영화감독들에게서. 고은이 그랬고 조재현이 그랬다. 우디 앨런은 그냥 좀 웃겼지만 폴란스키는 꽤 허탈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예술가의 흑역사를 알게 되는 일은 사랑했던 사람을 지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특히 문학과 영화의 영역에서, 서구사회에서 유명한 작품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런 접근은 좋았다. 필요했고. 정치적 입장보다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주로 서양의 문학과 영화의 사회성/작가주의/참여문학적 영향력을 다룬다고 이 책을 요약해 본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인이 교양서로 읽을 책은 아닌 듯 싶다. 중간엔 좀 생뚱맞게 어조가 달라지면서 논문처럼 읽히는 글이 실리기도 한다. 우리가 읽기엔 흔히 접해지지 않는 작품도 많이 인용되고 당연히 알 것처럼 쓰인 (너무나 자세한) 사건들이 우리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렇다.

그리고 명백히 밝혔지만 저자의 입장은 사회성을 반영해야 하나 작품이나 작가의 상황에 따라 평가를 달리한다, 는 절충적인 입장이다.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이 가진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작품이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의 출신, 성별, 또는 성적 기호를 이유로 하는 혐오 선동과 물리적 또는 상징 폭력 선동을 포함하지 않는 한, 문화 생산 장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할 것을 요구할 것, 이라며.

범죄에 가까운 성차별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좀 단호하지만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을 수용한다고 할까. 세상 모든 일에는 이해와 오해의 영역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니 모든 사건은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억울할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라나 민족 간의 갈등도 명명백백하게 잘잘못을 나누어 살필 수 없는 어떤 경계도 있는 것이고.

 

그 유명한 바그너와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했다고는 하나 업적이 어마어마하다는 천재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고민이 된 적이 있었다. 용납이나 수용까지는 아니어도 세간의 평에 의존하지 말고 읽어는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아니, 세상에 얼마나 좋은 작가와 글과 예술 작품이 많은데 그런 자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사이에서 고민하던 바로 그 작가들.

이 책에도 마침 그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의 열렬할 반유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그너의 행적을 알고도 <니벨룽의 반지>를 듣는다. 하이데거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알라딘 장바구니에 고명섭이 쓴 <하이데거 극장>은 넣어둔다. 그래, 예술가를 좋아하는 것과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다른 거니까. 비판도 읽어보고 들어보고 해야 하는 거니까. 어떤 이는 그런 자들의 작품을 보아주는 일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할 테지만 나는, 세상사는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는 입장이니까. 저자인 지젤 사피로도 삭제보다는 비판을 하자고 한다.

물론, 범죄는 아무리 뛰어난 예술로도 덮어지지 않는다는 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이다. 그리고 또 물론, 나는 언행 일치, 사상과 행동과 작품이 일치하는 예술가들을 몹시도 사랑한다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바이다.

 

책 속에서 언급된 저작과 현실 참여 사이의 일관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에밀 졸라, 앙드레 말로,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베르톨트 브레히트, 엔체스베르거, 에메 세제르, 상고르, 모리슨, 옐리네크, 뒤르켐, 시몬 베유, 로이, 존 듀이, 푸코, 부르디외, 하버마스, 촘스키, 주디스 버틀러 등. 그리고 얼마 전에 읽고 참 좋았던 아니 에르노도.

아니 에르노는 <르 몽드>에 실린 논설에서 이민과 다문화를 비난하면서 프랑스 문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에세이를 비난하며 나는 작가로서의 내 작업을 타자와 나를 대비함으로써 정의한 인종, 민족 정체성과 연결 시키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분열을 강요하려 드는 이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그의 <세월>을 읽고 문학적으로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이에게는 이런 단단함이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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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의 발명 - 문자의 기원을 향한 탐구의 역사 Philos 시리즈 29
조해나 드러커 지음, 최성민 외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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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한 나 자신을 반성하는 바이다. 알파벳 즉 모든 문자들의 기원을 사회과학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풀어쓴 책일 줄 알았다. 유발 하라리 풍의 책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 담긴 오래된 알파벳들을 그려보고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너무 두껍고 지나치게 학술적이다.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당연한 걸 테지만 우리의 알파벳 한글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역자 주로 잠시 언급될 뿐). 내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샀어도 조금 실망했겠지만 이걸 학교 도서관에 신청하다니!

 

물론 학교 도서관에는 꼭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책만 들어오진 않는다. 교사 등 어른들도 학교 구성원이기 때문에 책을 신청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늘, 중학생인 우리 아이들도 한 번쯤 들춰볼 수 있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표지를 봐두었다가라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어질 책들로 신청하려 애써 왔건만... 이 책은 책깨나 읽는다는 어른들도 끝까지 읽기에 너무 버겁다....

솔직히 말하면 맨 앞과 맨 뒤를 중점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다양한 글자들은 베껴 그렸다’. 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콘트롤 + F10을 누르면 나오는 많은 문자표를 보면서 언젠가 저것들을 한 번 베껴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너무나 많고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 문자와 기호들! 이 책을 보고 만년필로 하나하나 그려본 알파벳들은 그때의 다짐을 되새기듯 신비했다. 의미와 소리를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알파벳들을 그리면서, 판타지 소설 작가라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구상하는 감독이 되어 신비로운 글자를 만들어보는 상상을 한다. 잠들기 전 온갖 색이 든 대여섯 자루의 만년필을 번갈아 써가며 스케치북에 써본 이국의, 고대의 알파벳들이 준 기쁨으로 이 책의 내용을 다 못 읽은 아쉬움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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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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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원소인 탄소 예찬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김상욱의 글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유시민의 <문과남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다. 죽음은 원자로 돌아가는 길이며 심상한 일이라는 결론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유물론자들의 과학 예찬은 이렇게도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 유명한 프리모 레비의 글을 60년 생애 처음으로 읽었다. 시사인에 연재한 김명희 씨의 명문에 감탄하다가, 그의 마지막 글에서 헌사를 읽었다. 사실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기대어 자신도 원소들 이야기로 세상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고. 과학과 사회학이 만나는 글을 읽으며, 인문학적 통찰이 과학에 뿌리를 두면 이렇게 멋질 수 있다를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이 덕분에 처음으로 프리모 레비를 읽는다.

 

이 책의 맨 마지막 탄소편은 통째로 글을 옮겨 적어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김상욱과 유시민은 이 책을 읽었던 게 아닐까? 다시 한번 나는, 모든 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죽음조차 끝이 아님을 탄소론에서 읽는다.

사실 모든 이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보면서 남편과 유물론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계관이다라면서도 재미있게 본 모순된 행동을 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 각종 종교들에 접근해 보아도 결론은 같다. 죽음은 끝이며 영적인 다른 세계는 없(을 것이). 다만, 원자로 돌아간 내 몸은 지구의 다른 존재를 위해 이로울 것이니 내 죽음은 여기서 끝인 게 아니라는, 아주 고대 그리스적이고 원초적이고 단순한, 데모크리토스스러운 유물론이 도달한다.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어쩌면 그래서, 그 모진 세월에도 잘 버텼던 프리모 레비가 명성도 얻고 평온도 얻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내 삶과 죽음의 무게는,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하되, 결코 죽음이 두려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 나는 그들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고 죽으나 소멸하지 않고 이 세상/이 우주 어딘가에 남는다는 것. 몸을 바꿔 달리 태어난다는 것(프리모 레비에 의하면 변화는 생명의 속성, 그러므로 죽은 후에도 나는 또다른 생명인 것이다)에 도달하여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유태인 학살, 세월호, 4.3, 광주...

모든 비극은 마주 대하기 끔찍하면서도 곱씹어야 할 이유가 있다. 돌아서 달콤하고 평안한 이야기만 즐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인류의 원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프리모 레비를 거듭 말했나 보다. 그리고 철학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3 제자에게 이 책을 권해 보았다. 네가 원하는 문학과 과학, 철학이 만나는 접점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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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좋은 어른이 될 거야 - 불평등의 최전선, 교육 현장으로 들어간 한 소셜벤처의 실험과 가능성
점프 엮음, 강승민 인터뷰어 / 옐로브릭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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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를 찾아온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린 좋은 어른이 될 거야>도 그랬다. 스물한 살 무렵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교사란 말 대신 쓴 강학이라는 자격으로. 나와 함께 한 학생들은 단 한 명을 빼곤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초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을 다니던 언니, 오빠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그들의 자취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새우깡을 나눠 먹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같이 시를 읽던 그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개개인의 현실은 아팠고 가르친다는 나 자신에 대해 한계를 느껴야 했으며 이런 세상에 대해서는 분노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이 책은 점프(JUMP)’라는 교육 소셜벤처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점프는 젊은 멘토(장학샘이라 부른다)들을 다문화 가정이나 이주민 청소년, 혹은 경제적으로 취약하거나 어른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멘티들과 연결해 학업을 돕는 단체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지원이다. 자기를 믿고 지지해 줄 어른, 실수를 하더라도 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점프는 주로 장학샘이 멘티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어른이 있구나하는 심리적 지지를 해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점프 프로그램이 감동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없이 성실하고 다정한 점프의 장학샘들은 그들 역시 성장의 도상에 있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점프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성장의 동력이 멘티들이었음을 깨닫는다. 가르치는 자였으나 나 역시 배웠구나’, 라고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 성숙한 인간이 된다. 인터뷰에 묻어나는 장학샘들의 공통된 겸허함의 정체는 바로 그런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다.

 

내내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 끝부분에서는 그만 눈물을 훔쳐야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학교에 난리가 나고 수업은 중지돼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고3들은 약속한 것처럼 한밤중에 학교에 모여 어른들이 버리고 간 강당의 담배꽁초며 쓰레기들을 주웠단다. 그날 밤 그 아이들의 마음으로 그 어둑한 학교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울컥했다. 점프는 단원고 3학년 회복을 위한 점프 학습 멘토링 프로그램를 진행했다. 대입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학습 지원이나 진로 특강뿐 아니라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까지.

인류가 수많은 재난을 겪고도 살아남은 이유가 무얼까. 슬픔을 겪은 사람에게 진한 연대의 손길을 나누는 인류애의 정체는 뭘까. 어떤 진화론자는 그것이 생존의 전략이었다 하고 어떤 역사학자는 소통과 공감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는 최고의 무기였다고 분석한다. 점프는 그 명제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나의 중학생 제자들에게 공감과 소통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문해력 읽기 자료를 만들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점프의 이야기를 넣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광주에서, 단원고에서, 그리고 온갖 참사의 현장과 고통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손을 내미는지에 대해 읽게 하련다. 너희들도 그렇게 손 내미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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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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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천재와 광기>에서 이 책 제목을 따왔다 한다. 광기가 있다 해도 천재가 되면 일반인과 달리 그 광기가 에너지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천재라 해서 도덕적으로도 옳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급하는 두 단어 천재, 광기,는 가치를 담은 단어는 아니다. 다만 천재는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큰 존재라서 탐구할 가치가 있다. 그렇게 접근했을 것이다. 제목을 따왔다는 그 책은 언젠가 읽어보리라.

 

루소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루소의 이 말, 나에게도 간절하다. 나에게는 언제 이런 격변이 있었나. 때로는 밀려오는 대박이 내겐 왜 없는가 생각할 때가 있다. 물론 나는 밀려오는 행운보다는 안정된 행복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별일이 없이 산다는 일이 지루하지 않고 이렇게 계속 별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발전을 바랄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나는그저 곰실곰실 나아가는 사람일 뿐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카프카

고등학교 때 <변신>을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 등등 다른 작품은 끝까지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얼마전 다시 카프카를 읽었다. 이 음울한 영혼이 가엾다고 느껴졌지만 막연하게 기괴하게면 여겨졌던 그의 작품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변신>이 말하는 벌레로의 변신은 단순한 환유가 아니라 느껴진다. 살면서 자기가 그저 돈만 버는 어떤 존재, 그러다 병들거나 망가지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겨지는 순간이 온다. 본인이 그렇게 느끼든 가족이 그렇게 여기든.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나, 감탄한다.

 

하지만 고명섭을 통해 본 카프카는 또 다른 놀라운 존재였다. 그는 2차대전 후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군인들을 위한 호소문 덕에 새 정신병원이 설립되게 한 사람이었단다. 정치적 행동을 하지는 않은 극히 개인적인 이념이었다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따뜻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 윤리적으로 올바른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이었단다.

어떤 이는 행동하지 못하는지성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만큼 각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그걸조차 하지 않는 게 문제이지 작은 일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카프카의 새로운 발견.

 

비트겐슈타인

문제적 인간들이 많지만 궁금한 사람 중 하나가 비트겐슈타인이다. 그 삶에 매혹되었다가 냉정한 인간성에 정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부유한 토대를 벗어나 스스로를 황야로 내모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렇게 깊게 생각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기질이나 유전의 문제일까. 원인이 없이 불행감을 느끼는 이는 드문데 무엇이 비트겐슈타인의 형제들을 자살로 내몰았을까. 부를 누리고 인생을 희희낙락하지 않은 근본은 무엇일까. 교사로 군인으로 살아본 그의 삶의 궤적은 궁극적으로 교수로, 유명한 철학가로 살았던 삶과 비교해 행복하긴 했을까.

정작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적으로 그의 철학을 접근하는 책도 읽어 보았지만 본질에 다가가긴 어렵다. ‘나의 말이 나의 세계라는 선언은 너무나 자기 멋대로의 해석을 낳기에 처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행보는 어디까지 사람들을 흔들었는지, 그 흔듦은 그저 철학자들끼리의 것인지,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끼쳐진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톨스토이를 존경했다 하고 마음으로는 공산주의를 추구했다 하니 그에게도 인간 보편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이루고 싶은 유토피아의 꿈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읽어도 우리가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하는 이에게 마음이 가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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