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詩作法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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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책 속에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발견했다. 읽으면서 새삼, 문학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늘 문학작품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책들도 읽고 다른 취미생활도 하고 일상을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문학은, 종교는, 가족은 그런 것이다. 늘 거기에 최선을 다하지는 못해도 나의 가장 최후의 보루이며 품인 어떤 것. 오랜만에 그걸 깨달았다.

 

안도현의 글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다. 물론 <연어> 등 산문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기쁘게 해준 작가이지만 수업 강의록으로 보이는 이 책도 재미있게읽었다. 약간의 유머감각마저 느끼며.

시를 잘 쓰는 비법이란 게 있을까? 아무리 천재가 아닌 노력과 탐구가 중요하다고 모든 작가들이 시인들이 강조할지라도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영역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감정이 아니라 이야기를 실어 시를 쓰라는 말이다.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그 어떤 문학작품도 없다. 가장 깊은 시와 소설은 일상과 역사와 생활과 실제에 뿌리를 둔다. 그래, 그 짧은 시 <너에게 묻는다>에도 얼마나 많은 서사적 상상력이 발동되는가 말이다.

 

그는 시를 쓸 때 지키라는 계명조차 시처럼 썼다. 단지 그 제목만 옮겨적어 보아도 감정이 약간 격앙된 격문처럼 읽힌다. 비상계엄이라는 블랙 유머가 펼쳐지는 대한민국 2024년에, 오래전 쓰인 한 시인의 시 이렇게 써라격문. 다시, 세상을 살게, 살아남게 하는 것은 문학, 그리고 유머감각과 발랄함, 이라고 생각하며 읽어 보자.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어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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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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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의문이 든다. 83년생인 작가는 어째 엄마의 입장을 더 많이 대변하고 있을까,

곤란한 처지에 놓인 엄마, 허름한 집 한 채 있는 게 다인, 요양보호사로 살아야 하는 팍팍한 삶의 엄마. 그리고 박사까지 되었지만 시간 강사일 뿐인 곤궁한 딸은 집에 들어와 살겠다 한다. 그리고 동성의 애인까지 함께.

 

취업 준비생인 장성한 아들딸과 한집에 사는 나로서는 장성한 자녀와 한집살이가 어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나의 딸애는 책 제목만 보고 엄마, 이 책 왜 읽어?” 한다. 찔렸다며... 그렇게 킬킬거리며 미안함과 불편함을 서로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그 위의 아들은 결국 나이도 많은데 얹혀사는 게 미안하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든 동거든 한국 사회가 사회적 문제로 겪고 있는 청년 실업과 장기적 공시 준비생들의 고뇌가 우리집에도 거한 것뿐이라 생각한다. 물론 소설에서처럼 동성 연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문제 위에 문제를 얹지 않았을 뿐. 비슷한 사정의 집들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비슷하게 얹힐 수 있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부분은 동성애인을 가진 딸을 보는 엄마의 복장 터지는 상황이 아니었다. 딸애가 세상 불의에 맞서는 장면은, 그 기질은, 대한민국 30대 여성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아서 생각에 잠기게 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열정을 진보적으로 펼치는 존재들의 중심에는 30대 여성이 있다. 나의 딸 말마따나 처음에는 페미니즘의 관점, 즉 여성 인권에 눈을 떴지만 생각의 확산은 정치적 진보, 인권, 소수자나 이주민의 상황에 대한 이해, 자연, 기후 위기, 심지어 동물권(그리고 비거니즘, 환경론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이 그토록 환멸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을 안으로 똘똘 뭉쳐 진보적인 사람이 되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는 딸의 진보적 열정이 시간강사들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삶에 찌든 엄마는 그런 딸과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세대 간 갈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젊은 독자들은 외롭고 고단하고 강퍅한 딸의 삶에, 나이 든 독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자식 세대에 대한 푸념으로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했을지 모른다. 나는 한때 교사이기도 했다면서도 사유를 확장할 노력을 하지 않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세대로는 엄마 세대이나 의식으로는 딸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이상한 관점으로 소설을 읽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를 눈 번쩍 뜨게 한 것은 소설의 결말이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로서 한때 약자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이라는 노인을 돌보고 있었다. 가족이 없이 치매를 앓고 있던 그이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자 요양원은 젠을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무용한 병자로 취급한다. ‘엄마는 그에 맞서 싸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곧 그의 딸 그린의 모습이었다. 그린이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움에 나서는 것처럼 약자를 돌보던 엄마의 사유는 요양원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된다. 엄마는 무기력하고 보수적인 사람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고단한 삶은 같은 길로 수렴한다.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부당함에 맞서는 태도는 어떤 깊은 공부의 다음 단계가 아니라 인성이고 삶의 태도이다.

 

이 소설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끝, 혹은 각자의 이야기를 구시렁거리다 끝, 이 세상의 중심은 나야, , 하는 자아소설의 끝판왕, 그런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구호로 외치는 소설도 아니다. 그래서 아마 세상은 이 소설에 주목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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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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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대해 다시 읽고 싶어하다가 <왜 사는가>라는 책을 발견하고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다시 이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의 방점은 물론 죽음에 찍혀 있지만 본의 아니게 현자들의 삶에 푹 빠져 한참을 지낸 셈이 되었다.

 

죽음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또 세사를 접하면서 죽음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늘 생각하면 살긴 하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죽음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류의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생각을 말하라 하면 나는 과학적 관점에 의거,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영혼은 없다, 라고 생각한다. 환생을 믿지 않으며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자연으로 돌아가 원자와 분자로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다른 존재로 환원될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이생에 이루어 놓은 정신적 가치가 다시 내게 추억으로 돌아올 일은 없다. 그저 생물로 태어난 생명의 의무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물론 가치 있는 죽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로 회귀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남아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좋은 죽음.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내 죽음이, 아니 삶이 그나마 좀 나아지려면 이런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도 해준다. 죽음 앞에 초연하기란 예수도 어려운 일이었겠으나 조금이라도 의연해지기 위해 품위 있게 살아볼 생각이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어떤 힘이 내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그게 내 노력과 반드시 비례하란 법 없음을 알지만 적어도 요행을 바라거나, 내 노력으로가 아니라 그저 주어진 어떤 행운에 대해 오만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저자 고미숙이 그들을 선정한 기준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 말고도, 죽음에 초연했다는 것, 삶의 태도 역시 죽음을 그렇게 바라본 것처럼 명랑하고 발랄했다는 것.

 

한없이 엄숙 진지하기만 했던 대한민국 진보 진영에 발랄한 진보를 외치며 그에 기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영향과 더불어 많은 21세기 젊은이들이 명랑하고 유쾌한 진보적 운동을 펼치면서 한국 정치와 문화가 발달했다. 아니, 문화적 변화가 정치적 변화로 이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20세기, 1980년대 학생운동과의 차이이다. 이런 변화의 선두에 고미숙 같은 학자, 엄숙을 떨쳐버린 학자가 있었던 것이다(그가 제시한 연암론의 신선함이란).

다만 세상의 많은 시인, 문인, 학자들이 변혁을 꿈꾸며 거리로 나가고 총을 들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 나를 포함하여, 책상 앞에서만 진보는 논하는 사람들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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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3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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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나혜림

 

악마가 유혹하기 딱 좋은 지독한 가난, 거기 놓인 한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악마가 자기 신분을 밝히고 거래를 하자고 덤비는데 미끼를 문다? 바보 아닌가? 나라면... 이러면서 그깟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의연함이 내게 있는 듯 으스댔다. 하긴, <파우스트>를 처음 읽을 때가 고 2땐가 그랬으니 세상을 온통 관념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성과 육신이 불일치하는 노인이라면 그런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 같다. 늙어가기 시작하니 조금은 알겠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은데 몸이 늙어가니 어쩌누, 싶은데 파우스트처럼 영민하고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성이 몹시도 아까워 악마와 거래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혜림의 <클로버>에도 자칭 자신이 파우스트와 거래했다고 하는 악마가 등장하는데, 이번에 거래 대상은 찢어지게 가난한 중학생 소년이다. ‘만약에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악마와의 거래가 성사되는, 갖고 싶을 것이 너무나 많은 소년 정인. 할머니와 폐지를 줍고 악덕 사장이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해야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복지관에서 주는 햇반과 라면으로 끼니를 이어야 하는, 절대적 가난에 놓인 소년이다.

 

악마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정인에게 영혼을 팔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대상을 잘못 잡았다. 악마의 거래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 정신이 핍약한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정인은 건강한 아이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이토록 많은 플래그를 붙인 적은 없었다. 명문과 박학다식, 현란한 말솜씨에 드라마로 만들면 좋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런 글을 보면 역시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나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1인으로서). 청소년 소설들 품질이 엄청 높아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재미와 줄거리가 중심에 놓여 문체라든가 철학적 성찰이라든가 주제의식 면에서 심오한 것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미도 있으면서 뭔가 성숙한 느낌을 주는 청소년 소설을 만난 기분이다. 심지어 나는 기억에 남는 문구를 입력해 놓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나의 느낌 주석도 붙여 본다.

 

악마는 부잣집에도 찾아가지만 가난한 집에는 두 번 찾아간다 순정한 영혼으로 태어났으나 가는 혹은 부족한 부모 탓에 불행해진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

 

인류 역사 3400년간 전쟁이 없었던 날은 268, 고작 97820일뿐이었어. - 전쟁의 위험을 걱정하는 이시대를 살며, 내가 살아온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악마가 휴가갔던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감사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하다. 다시 전쟁의 시대를 물려줄 것인가? 내가 사는 이땅에서가 아니라 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전쟁은 어찌할 것인가?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 - , 이 반어법이라니. 이 상대성이라니!

 

악마에게 식욕은 없다. 식탐만 있을 뿐. - 잘먹고 잘 사는 이 시대에 갈수록 사람들이 더욱 맛있는 것을 갈구하는 모순.

탐욕은 모든 등식을 부등식으로 만들거든. - !

 

정인은 재아의 손바닥 앞에 제 손을 펼쳤다. 패티를 데우다 생긴 화상, 폐지를 줍다가 노끈에 쓸린 자국이 있는 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과 돈을 버는 손은 묘하게도 닮았다. - 처지가 현격히 다른 두 아이가 우정의 교감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소돔에서 나는 사과는 겉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재의 맛만 난다고 함. - 지옥의 유황냄새나는 꽃밭처럼, <기억전달자> 속 무채색의 디스토피아처럼, 맛과 향을 지닌 이 소소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

 

몸은 급하게 크는데 안쪽은 옹골차게 차오르질 못하고 비었는지, 정인은 눈동자가 깊고 말이 없는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그 휑한 안쪽에선 분명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급하게 철들며 포기해야 했을 욕심들이 소년 안에서 뭉근하게 숙성되었기에. 너무 일찍 밥값의 무게를 알아버린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은 소년의 영혼에 풍미를 더해 주었고, 소년이 곱씹어 삼킨 외로움은 근사한 고명이 되었다. - 정인을 악마의 먹이로 표현하는 대목. 배고픔이 아이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싶어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장면이기도 하다.

 

복지관에서는 오래된 박스 냄새가 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복지관 건물이 골판지로 지어진 것도 아닌데. - 세상이 함께 힘을 합쳐 가난한 아이를 도와도 어딘가 종이밥을 먹는 것처럼 허전하고 허청하다.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왜 인간은 불운에게만 묻는가? 행운에겐 왜 나인가? 묻지 않으면서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 행운이 왔을 때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만약 그 모두가 신의 가호도 악마의 장난도 아닌 그저 우연이라면, 모든 우연에 대해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지옥은 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그럼 지상은? 여기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데?” - 악마는 이렇게, 얄밉지만 옳은 말을 한다.

 

돈 낭비하는 방법도 진짜 다양하고 창의적이네요.”(호텔에서 악마와)

산통 깨는 방법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것처럼” - 정인과 악마의 티키타카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 우와, 이거 시() 아닌가?

 

집안 곳곳에 누군가 빨간색 색연필로 오답표시를 해놓은 것 같았다(호텔에서 돌아온 뒤 곰팡이, 뒤틀린 문, 깨진 타일을 가진 집을 보고 느낀 정인의 감정) - 인생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토록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가에게 경의를.

 

인생도 마찬가지고. 마냥 어두운 것 같아도, 그 밤이 지나고 햇빛이 비출 때 어떤 모습이리지는 너희가 결정하는 거다 ; 정인의 국어 선생님의 말(소설 속에서 멋진 말들은 주로 국어샘들이 한다. 나도 국어 선생인데, 우리 아이들에게 저런 통찰력 있는 이미지로 보이긴 하려나?)

 

돌아서는데 찍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붙어 있던 운동화 갑피가 밑창에서 떨어진 거였다. 정인의 자존심도 기어코 찢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 심리학에서 신체화라는 표현을 쓴다. 마음의 아픔이 몸의 아픔으로 나타나는 것. 정인은 삶이 무너지는 장면을 아슬아슬했던 운동화가 찢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그럼에도 괜찮다, 괜찮다...’ 읊조릴 수 있는 성숙한 아이다.

 

악마(간디를 인용하며); 말을 믿지 마, 차라리 빵을 믿어 세상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신이 빵의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 있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잖아

 

폭력은 비디오 게임, 전쟁은 뉴스 속보, 착취는 초콜릿, 생명 경시는 모피 코트, 환경 오염은 아보카도와 스포츠 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 그렇게 악마와 손을 잡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

 

한 칸짜리 집에는 갈등을 넣어 둘 수납 공간이 없다. 이런 격언이 있다니!!

 

공기 중에 만약에가 가득 차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정인의 머릿속에서 만약에는 풍성하게 포자를 터뜨렸다. -상념에 가득찰 때 내 머릿속은.. 그랬구나, 곰팡이 포자가 퍼지듯, 그래서 잠도 못들고 마음이 아팠던 거구나..

 

보호자 대기실 문을 나서려던 정인은 제가 걷어찬 슬리퍼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슬리퍼를 아줌마 쪽으로 다시 밀어주고는 나갔다. -그래, 정인이는 착한 아이라니까?

 

만약에를 백 번 해도 네가 있어야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정인의 등을 감쌌다. - 이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자꾸 들려줘야 한다.

 

저 미성년자예요. 면허 없어요.”

그놈의 미성년자, 미성년자! 너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를 선결제로 한 삼십 년 당겨 쓴 사람 같은데.”

철이 당겨서 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그러자 악마가 웃자란 식물에게는 늦거름을 줘야지.”라고 말한다. - ,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드라마 캐스팅을 하였으며 두 배우(악마역/정인이 역)가 틱틱거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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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이푸로라 옮김 / 마인드큐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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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궁금해질 때마다 사춘기 때 그랬듯이 예수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다만, 그가 신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 신앙을 갖진 못한다). 내 삶이 늘어진다거나 슬프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이를 떠올리면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얼마 전에 그런 책들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권력도 돈도 갖지 못했던 이들, 살아생전 고난과 핍박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면치 못했던 세 사람. 인간은 운명 앞에 나약하고, 아무리 좋은 운명을 지녔어도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고통을 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정신의 고결함을 유지하는 자율성을 지니기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다. 예수와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그런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정점에 있는 이들이다.

 

붓다라 불린 사람은 2500년 전 북부 인도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스인 소크라테스는 약 2300년 전 아테네에 살았으며 예수는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무덤이나 유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폐나 고고학적 흔적도 없다.... 그런 흔적이 없는 이유는 이들이 한 번도 권력을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지 않았으나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역설이다. 이런 역설은 역사에 부지기수다. 애초에 그들 삶의 목적이 무언가를 남기는 것도, 유명해지는 것도 존경받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가 '모든 사람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을 들었다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델포이 신전에 쓰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무지를 일깨워주는 사명을 좌우명으로 갖게 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치열하게 살았던 것, 알아 왔던 것, 쌓아왔던 기능과 지식들이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자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명한 늙은이는 늙을수록 자기가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야말로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공부할 게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된다. 간장 종지만 한 세상에 살고 있는 이는 오만을 못 벗다가 자기가 세상 최고인 줄 알고 살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만 지혜로운, 그리고 겸손한 노인이 되고 싶다.

부처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엄근진(엄숙근엄진지)이지만 예수와 소크라테스에게는 유머 감각을 본다. 부처도 농담을 하는 이는 아니었더라도 자애롭고 따뜻한 이였나 보다. 유머 감각은 여유에서 나온다고 했다. 너그러움은 세상과 우주를 넓게 이해하는 이에게나 가능한 덕목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량없이 푸근하기만 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때로는 단호하고 엄격했으며 특히나 그 엄격함의 잣대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던 이들이다. 1. 자신에게 엄격하고 2. 기득권 세력에게 냉철하며 3. 약자에게 너그러운 지도자.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을 살며 자신을 벼리는 기준으로 삼아아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한없이 슬프고 우울할 때마다, 내가 못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토록 예수의 삶을 되짚어 보려 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발견한 책이지만 이 책처럼 치우침 없이 세 존재의 삶과 행적을 어렵지 않게 들려준 책이 있었나 싶다. 나이가 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봐야겠고 철학과 종교에 대해 알아나가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이, 특히 지성으로 접근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으로 첫 발걸음을 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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