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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9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원래 한국 추리나 스릴러에 관심이 없다. 하도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에 열광했고 홈즈와 루팡에 푹 빠져 지냈으며 10살 때 엄마 몰래 읽은 시드니 셀던의 <게임의 여왕>은 나에게 최고의 스릴을 선사해주기도 했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마이클 클라이튼과 로빈쿡의 전작을 읽었고 앨런 폴섬의 <모레>나 러시아 여성 작가 마리아와 그 외의 작가들의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한국 추리, 스릴러를 읽어보았는데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극찬한 <건축무한육면각체>나 최근의 <팔란티어> 등등 왜 그렇게도 세간의 평가는 과장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나서 '이게 대체 뭐야'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구성도 평이하고 사건도 인상적이지 못하고 반전이 특이하면 문장력이 바닥을 기고 있기 일쑤니 이건 뭐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한국 추리, 스릴러물과는 달랐다.(물론 실망감이 심해서 한국의 것은 많이 읽진 않았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소문이 들리면 꼭 읽어보았으나 실망했기에 그 외의 것은 말할필요도 없으리라.) 플롯과 문장력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리고 한정된 공간의 갑갑함을 벗어던지고 미국과 중국까지 아우르는 스케일은 시원함을 주었다. 인물 또한 일관된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으며 우연의 남발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단편적이지 않은 인물의 성격이었다. 여자는 끊임없는 애정을 갈구하며 상대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킬러지만 우리가 흔히 보던 완벽한 킬러의 모습은 아니었다. 감정적이고 소심하고 인간적이다. 남자 역시 퇴출당한 부패 형사지만 주위의 평가와는 달리 충직하지도 착실하지도 않았다. 다들 다름의 목표가 있지만 인간이란 완벽하지 않은 법, 여타 스릴러에서 보여지는 완벽한 모습의 캐릭터가 아닌 살아 숨쉬는 캐릭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외국의 스릴러가 아니라서 낯설지 않은 지명과 상표 등이 친숙했다. 그 점이 더욱 이 책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외국 스릴러를 읽고 있으면 머리 속에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명도 낯설고 해서 인물과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자잘한 부분은 대충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종로와 동대구와 롯데리아가 등장한다. 심정적으로 아주 가깝다. 외국 스릴러에서 느끼던 거북살스러움이 말끔히 해소되면서 우리의 스릴러가 주는 편안함과 무의식적 이해를 만끽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건이 너무 평이하다는 것이다. 쫓고 쫓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건은 그다지 큰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그저 원한 관계였어도 상관없었다는 소리다. 아니, 차라리 그러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마지막 충격적 반전은 사건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비밀을 감춰둘 수도 있는 사건을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약간 김이 빠지기도 한다. 사건만 독특하게 잘 포장해서 한번에 팡!! 하고 터트릴 수만 있었다면 별 다섯개가 아니라 열 개도 줄 수 있었다.
한국 스릴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전의 한국 스릴러는 사건, 문장력, 플롯 이 세가지 요소 중에 한, 두가지에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기발한 착상의 소설은 대부분 문장력이 떨어졌고 탄탄한 문장과 구성을 지녔다면 사건이 평이했다. 물론 이 책 또 사건은 약간 평이하달 수 있지만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별 네 개를 준다.
이 책의 충격적 반전은 명의 정체에서 시작해서 전직 형사의 딸내미에서 끝난다. 인간이란 동물에 부여하는 반전은 사실 사건의 반전보다 울림이 크다. 끝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독특함이나 왜?라는 질문에 집중하는 독자라면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