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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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원 단편선의 첫 작품 <수염>에서 주인공은 한국인 특유의 내시같이 듬성듬성한 콧수염을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핀잔을 들어가며 길러보겠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면도해 주는 이발사가 '이거.. 기를 생각이십니까?'라고 대놓고 물어보진 않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콧수염을 지켜내다가 결국 멋들어진 수염이 자리잡은 것을 보고 희열을 느끼면서 단편은 마무리된다.  

  초창기 단편이라 그런지 그 이후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일관성과는 조금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수염>이다. 하지만 이 단편소설을 맨 처음 배치된 것 역시 이해가 된다. 박태원은 약국을 경영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난다. 이광수에게 문학을 사사받을 정도로 엘리트로 성장하고 작가가 된다. 그런 그가 사조가 아닌 유행이라는 측면에서의 모더니즘의 광풍 속에서 콧수염과 지팡이와 양복을 추구하면서 패션의 선두에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리고 박태원과 거의 동일선상에 있는 화자가 수염을 기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이 단편선의 시작점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이후 박태원의 행보로 선택된 나머지 단편들은, 작가가 되었고 그래서 모더니스트라고 자칭하고 다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소설가가 되었지만 식민지인이라는 현실 속에서 모더니즘의 키워드라 할만한 욕망은 억압을 받게되고 점점 소설 속 화자들은 이중성을 겪으면서 번민하다가 결국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체념하거나 길들여진 것에 순응하고 마는 식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세속적 욕망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가족과의 행복, 돈, 여인의 사랑등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허전함을 벗을 통해 찾으려 다방을 하루에 4번이나 들락거리는 인물의 하루가 그려져있다. <애욕>에서는 구보의 친구 하웅에게 여자가 생겼는데 좁은 종로바닥에서 그 여자에 대한 소문이 많이 안좋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하웅은 그저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웅은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께서 점찍어둔 처녀와 결혼하여 정착하려고 하는데 결국 그 여자가 찾아오자 다 내팽겨치고 그 여자를 만나러 뛰쳐나가면서 끝이 난다. <길은 어둡고>에서는 카페 여급일을 하는 여자가 같이 사는 샌님같은 남자가 지긋지긋해서 군산으로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 군산행 기차에서 내려 다시 그 남자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고, <비량>에서는 <길은 어둡고>와는 반대로 남자가 동거하는 카페여급이 지긋지긋해서 동거를 그만두려다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만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현실에 대해 지쳐가지만 결국 한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생활인들의 이야기가 이 단편선의 주를 이루고 있다. 주변인물들은 하나 같이 세속적이어서 아버지는 매춘하는 딸을 모른척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다 식민지 시대라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려도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면 그곳이 식민지 상태든 아니든 가난한 예술가가 있고, 그 주변에 성을 파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 때문에 한끼 겨우 먹어 삶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예술가랍시고 자본주의의 총아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단편선에서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을 법한 사람들을 서술하고 있다. 현실이 마음에 안들어 벗어나보려하다가 벗어나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가고 마는 소시민이 내가 아니라고 하지 못한다. 욕망은 있지만 그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게끔 사회는 제기능을 못하는 것부터가 현재와 식민지 시대와 다를바가 없다.

  식민지라는 상황이 욕망과 현실이라는 이중성을 더욱 비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막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이 흘러들어온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억압받고 강제된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은 더욱 비틀어진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식민지 한국이 아니라고 해도 비루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은...... 

  특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광장>을 쓴 최인훈 뿐만 아니라 여러 작가들에 의해 패러디된 작품이다. 왜 그렇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지 이 단편선을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그것을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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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도서관 2010-07-2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강의에 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ddmlib/63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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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눈이 멀었다, 그녀만 빼고.   

  밖은 이 백색공포가 더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안은 그녀만 빼고 눈이 먼 이백 여명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그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눈이 멀었는가 하는 것이다. 눈이 먼 것은 그저 눈이 보이는 사람과 다른 것일 뿐이다. 하지만, 흔히 우리 사회가 그러하듯이(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를)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어버렸다. 백색공포가 전염된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다른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공포는 당연한 결과로써 폭력을 낳는다.  

  작가는 눈이 멀었다는 육체적인 다름을 통해서 사상, 이념의 범주로 확대해도 좋을만한 메타포를 남기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인간과 자연 등은 단지 다를 뿐이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를 적대시했고 인간은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 자기보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자연을 짓밟고 있다, 인간은 단지 힘을 가졌을 뿐이데 말이다.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온갖 악은 사람을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공포로 인해 힘이 있는 사람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끼리 권력이라 할만한 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또 다시 악을 이끌어냈다.  

  이 책은 내내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있게 탐구하고 있으며 마주하기 불편한 진실을 까발리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더 추악해질 수 있으며, 더러워질 수 있는지 말이다. 작가의 시선에서는, 인간은 선하지도 막하지도 않은, 단지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공포와 마주쳤을 때 힘이 없으면 복종하고 힘이 있다면 군림하려는 인간의 특성은 본능처럼 느껴진다. 책의 말미에 성당의 그림과 조각들, 예수까지 눈이 먼 상태로 있는 장면은 신조차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그녀를 통해서 작가는 사회가 유지되려면, 아니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혹은 여성성일수도 있다. 비폭력적이며 가족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특성 혹은 어머니의 특성이 무너져가는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눈이 멀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도 하고 기꺼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약육강식의 세계로 뛰쳐나가고 궂은일을 도맡아한다. 길 잃은 개조차 그녀에게 이끌려 그녀의 보호자겸 위안자의 역할을 할만큼.  

  이타적인 태도야말로 정신과 윤리가 눈 멀어가는 현대사회를 지켜낼 수 있고, 그래야만 눈이 보일 수 있을 때까지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충고는 곱씹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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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접목 / 나무들 비탈에 서다 - 황순원전집 7
황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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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를 겪으며 작가 황순원의 인식은 변하기 시작한다. 시와 단편 소설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에 관해 천착하던 그가 전쟁을 겪으면서 드디어 인간의 추악함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접목>,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은 황순원이 인간의 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악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나무의 속성과 이미지를 사용해 직접적으로 나무와 인간을 대입시키고 있다. (아직 <움직이는 성>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읽어볼 작정이다)

  <인간접목>에서 작가는 인간의 악이란 거울에 낀 때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접목>의 원제가 '천사'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원래 천사같은 존재지만 사회에 의해 악이 때처럼 표면에 붙어버린다고 작가는 말한다. 주인공 종호가 소년원 아이들을 씻겨주면서 그 아이들의 때가 벗겨지고 피부가 드러났을 때 작가의 목소리가 그대로 종호의 입장에서 드러난다. 제목이 '인간접목'인 것도 나무를 접목시켜 더 나은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인간도 접목하듯 개량하여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작가의 악에 대한 인식은 변하기 시작한다. 과연 악이 표면적인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결국 작가는 악은 내성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유리조각이 살갗을 뚫고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 그것이 악이다. 농업용어로 가지치기를 뜻하는 '전지'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인간의 악은 닦아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어서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장편 소설로써의 미학적 성취를 이뤄낸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등장 인물들은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전쟁에 의해 누군가를 죽이고 또 전쟁의 폭력성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다.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숙이마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서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이념에 의해 다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쟁에 대해, 인간의 악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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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 춘원문화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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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초반에 씌여진 소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설적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 며칠 전에 <만세전>을 읽으면서 작가의 계몽성에 약간 눈살을 찌푸렸는데 <삼대>에 와서는 자신의 리얼리즘을 확고히 다지면서 완벽한 소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먼저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 있어 30년대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인간의 보편성을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의 불안 등과 같은 문제는 지금 읽어도 같은 주제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돈과 이념과 욕망 등의 문제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하다. 돈에 눈이 벌개지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보수적인 이념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은 21세기에도 여전한 모습이다. 그런 보편성이 있기에 지금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인간의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나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경애는 결국 누구와 맺어질 것인지, 덕기는 필순이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을 것인지, 할아버지는 결국 자연사 한 것인지 등등 인물 사이의 사건을 계속 던져주면서 궁금해서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배기고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통속소설이 되지 않았던 것은 작가의 깊이 있는 인간에의 성찰에 있다. 단순히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서 특수했던 시대의 흐름에 따른 고민도 엿볼 수 있었고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도 볼 수 있기 때문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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