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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평점 :
이 책은 제목과 부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지난 2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미국 민주주의가 점차 쇠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민들이 공적 영역에서 함께 살아갔던 정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422) 저자의 용어를 따르자면, 대중민주주의가 점차 개인민주주의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로 인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두 저자는 400여 페이지에 걸쳐 미국 정치를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먼저 대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중민주주의는 엘리트들이 정치의 장을 장악하기 위해 비엘리트들을 동원해야 했던 방식이다.”(9) 행정과 조세, 그리고 국방이라는 국가의 기본 구성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민들의 대규모 동원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가의 요구에 단순히 순응하고 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헌신에 대한 대가로 투표권을 비롯한 다양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시민권이 확립되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된다. 이는 단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미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 즉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이러한 의미의 시민권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없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됨으로써 시민들은 정치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정치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시민을 배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시민권의 쇠락은 정부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높이려는 노력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89) 행정, 조세, 국방 등 국가 통치의 주요 분야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가는 시민들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운영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익 단체 및 시민 단체와 같은 다양한 이익 단체의 활성화는 오히려 시민은 역할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과거의 운동 방식과 달리, 관료들에 대한 로비와 법적 소송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방안들이 마련되자 정치의 영역에서 대중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각종 단체들은 소규모의 인원만으로 충분히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집단행동을 조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목적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공익단체는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149)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지지자들을 확보할 필요가 감소하자 단체의 유지가 더 큰 목적으로 대두된다. “단체들이 공공 기관과의 안정적인 관계와 조직의 하부 기반을 유지하는 데 투자하다 보면, 회원들의 이해관계를 강력하게 대표하는 것에서, 조직 그 자체를 건사하고 당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단체의 에너지를 전환할 수밖에 없다.”(206)
나아가 다양한 이익 단체들의 대립은 사법 권력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대중의 지지보다는 사법적 판단이 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정치인들은 대규모 지지자들을 동원하기보다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에 집중한다. “오늘날 폭로, 조사, 기소라는 정쟁의 전술이 한때 선거 동원이 차지했던 정치의 중심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181) 사정은 이익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의회나 선거 정치에서 경쟁자들은 이길 승산이 적은 지나치게 협소한 이익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토론장을 법원에서 발견한다. 법원에서는 판사만 설득하면 되기 때문이다.”(301)
이러한 변화가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반 대중들이 실종된다는 것이다. 로비나 소송은 시간적, 금전적 수고가 많이 요구되는 방법이기에 정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계층, 즉 높은 교육 수준과 경제적 여건을 가진 중상 계급 이상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양한 정치적 운동들이 소외 계급보다는 중상 계급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한때 정치·사회적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지지를 동원했던 가장 진보적인 정치 운동들조차 이제는 대중 정치의 장에서가 아니라 법원과 관료를 통해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이런 운동들의 목표는 중상 계급 지도부의 제한된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328) 소외된 계급의 절실한 목소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점차 소멸된다.
다시 말해 이제 더 이상 정치 영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민은 없다. 단지 정부의 서비스를 받는 고객만이 있을 뿐이다. 행정 영역이 다양한 방식으로 민영화되면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제공되던 공적 혜택은 국민들 개개인의 사적인 권리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교육 바우처는 학교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함으로써 공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더 나은 학교를 찾는 일로 바꾸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대중은 시민이 아니라 개인 고객들의 단순한 집합이 되는 것이다.”(360) 바야흐로 ‘탈정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오늘날 통치의 기술은 공공 정책을 사적 선택으로 변형시키는 많은 수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공 정책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은, 효율적인 거버넌스의 기술로서 권장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편리하다. 집단행동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든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른다.”(425)
이와 같은 미국 정치사에 대한 통찰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민주 정부 10년의 시기를 거치면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정치 참여가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참여가 대중 정치의 활성화를 가져왔나 하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탑 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외침은 더 이상 정치의 화두가 되지 못한다. 1987년 김대중의 여의도 연설과 같이 100만 명 이상의 대중들이 한 곳에 모여 정치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트위터 등과 같은 곳에서 던져지는 정치인들의 ‘드립’ 하나하나에 열광하거나 분노하고 말 뿐이다. 단지 정치인들의 트윗을 리트윗하거나 아무 효력도 없는 인터넷 청원서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