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부드러운 주걱이었다. 밥을 풀 때 쓰는게 아니라 주먹 모양처럼 둥글게 말려있는 주걱. 주걱이 끈적거리는 손 안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손은 진득할 뿐 허투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손은 주걱을 건성으로 휘두르지만 주걱 끝이 아프지 않을 지점을 알아낸다. 매번 작은 알갱이가 떨어진다. 알갱이는 미끄러지듯 쏟아지고 작은 홈으로 졸졸 흐른다.
난 그만 좀 행복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주걱이 긁는 느낌, 참 오랜만이라,
생리불순은 좀 있었지만 생리불순을 넘어서서 무월경이라고 의사가 무심하게 진단을 한건 최근 일이다. 무월경 원인이 되는 경우의 수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주책맞게 눈물이 삐질거리며 새어나오려고도 했다. 꾹 눌러 참으니 머리가 띵해져서 그만, 무슨무슨 검사를 받으라는 의사에게 됐다며 쌀쌀맞게 말하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선선했다. 괜찮겠지. 뭐, 언젠간 하겠지. 지가 안 나오면 어쩌겠어. 그러고 나서도 한의원을 찾아다녔고,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녔다. 다 맘을 편하게 갖으라고, 곧 생리를 할거라고 말해줬지만 맘대로 되지가 않았다. 8체질 요법으로 치료한다는 한의사조차 원인진단이나 치료보다는 기다리는걸 의식하지 않은 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치만 무슨 첫사랑 우연히 마주치는 주문도 아니고 신경을 안 쓰며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그러다 왔다. 흔적만 내비치고, 그래 이 정도면 어때가 아니라 제대로, 콸콸. 자궁이 들썩거리며 생리가 왔다. 자위해서 맛본 첫 오르가즘보다 더 생생했고, 사실 그보다 배는 더 짜릿했다.
다시 주걱으로 돌아가자면
주걱은 이제 처음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서 벗어나 등치를 키워 자궁 곳곳을 부잡스러운 아이처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배가 아려오고, 질도 조여왔다. 미끄덩, 생리혈들이 서답으로 튀고, 서답은 얘네가 반갑다고 힘껏 안아준다. 비릿함이 진동을 하다 냄새가 텁텁하게 바뀌면서 서답은 변색되었다. 생생한 피, 덩어리진 피, 내 자궁 속에 있던 나의 피와 자궁 내벽에서 생생하게 살아숨쉬던 녀석들. 서답을 찬물에 담가놓고 빨간색이 물 속에 섞여들어가는걸 지켜봤다. 핏빛으로 점점 빨개지는 물색이 좋다. 피의 냄새도 좋다. 얘네들을 빨면서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팔뚝에 힘줄이 솟는게 좋다.
빨래한 생리대를 널고 투박한 서답을 팬티 위에 받히고 드러누웠다. 배를 손으로 문질러보기도 하고, 서답의 두툼한 부분을 짚어보기도 하고, 며칠동안 단단했던 가슴이 좀 풀어졌는지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그렇게 하고보니 참 우스운 짓이다 싶었다. 누군 생리통 때문에 이놈의 생리일텐데 난 무슨 몇 년만에 애를 낳은 사람처럼 이렇게 수선을 피우다니. 대체 생리가 뭐라고. 임신이 어렵다는 것? 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 한달을 그냥 지나치는게 서운해서?
나와 전우애로 투닥거릴 사람을 꼭 닮은 아이가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한적이 있다. 예전의 '그'를 만날 때 문득 이 녀석과 튼튼한 아들들(아들들이라니!)을 낳아서 키우고 싶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생각일 뿐이고 불임이라고 판정이 난 것도 아니고, 완경기란 확정선고를 받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친구의 말처럼 자의적인게 아닌 강제된 '어쩌면 불임'에 두려웠던걸까? 내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랑 같이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있을테니 꼭 불임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꾸준히 관리되어온 여성의 몸, 특히나 28일 주기로 일정해야만 하는 월경 강박 때문인 것도 같다. 분명히 개인차가 있고, 스트레스에 의해 불규칙할 수 있다고 전제를 달긴 했지만. 정상성이란 기준에서 약간 어긋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로인한 불안감이 꽤 컸다. 본래의 건강 염려증에 더해져 모두들 '잘'하고 있는 생리가 나만 안 된다는 사실이 신경쓰인거였다.
이 애가 얼마나 내 몸에 착 달라붙어 한달에 한번씩 나를 보러 올지는 모르겠다. 금세 변덕을 부리는 뒷간 전후의 사람 맘처럼 '사실 떠나기 전에 한번 들른거야'라며 다신 얼굴을 안 내비치면 어떡하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8체질 한의사 선생님을 조금 더 압박하고, 다시 호르몬 검사를 하는 수 밖에.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다시 찾아온 주걱의 손길을 찬찬히 느끼는거지. 가끔씩은 두 다리를 꽉 오므리고선 요놈을 옴쭉달싹 못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