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란 말은 처음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어휘이다. 처녀림이니 처녀비행, 처녀지. 장소를 명명할 때의 쓰임이 많고, 너무 일반화된 단어라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나 역시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다.
얼마 전 어떤 분이 글 제목으로 처녀란 단어를 써서 처음이란 말을 지칭할 때 불편함을 느낀적이 있다. 불편함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왜 처음을 지칭할 때 꼭 처녀란 말을 써야하는지, 왜 처녀란 말을 처음과 연관시켜서 써야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분과 댓글을 주고받다 나 역시 즉각적인 불편함 외의 합당한 논리가 없다는걸 알았다. 처녀란 말은 뭐가 문제일까.
처녀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건 숫처녀, 혼전순결, 처음이란 의미로 사유화된 여자의 몸, 질주름(처녀막) 등이었다. 처녀란 말에서 느낀건 일상적인 용어이되 누군가로 하여금 불편함을 야기시키고 있고, 처녀이지 못한, 처음일 수 없는 몸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 그건 처녀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로 하여금 '처녀'이기를 강요받는 몸이란 자각 때문이었다. 굳이 '왜 총각이란 말은 그렇게 안 쓰면서 처녀 가지고만 의미를 규정해서 써'까지는 아니어도 처음에 속하는 처녀의 몸에 덧씌워진 의미체계들이 불편했고, 그분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했다. 그런데 좀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그분을 계몽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그럴 깜냥도 안 된다.) 수긍하지 않더라도 그분 나름의 호불호와 취향에 관련된 것이니 왈가불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말들에 대해 그는 돌려서 완곡하게 표현을 했지만 '극단으로 치닫는건 다른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한다. (역시 돌려서 표현했지만)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으니 자긴 더 이상 나의 불편함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다'란 요지의 말을 했다. 충분히 이해받고, 공감될거란 기대를 한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뚱맞은 반응에 다시 얘기를 진행하는 것보다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는게 낫단 결론에 도달해서 글을 쓰게 됐다.
나는 평소에 그분이 보여주는 진보적인 생각들과 약자의 입장에 서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을 좋아했다. 그래서 '처녀'용법의 사용에 대해서 일정 정도 동의가 될거란 생각에 댓글을 남긴 것이다. 처녀라 명명되는 약자니까 나 좀 봐줘요도 아니고 단지 순결과 연관된 처녀란 의미를 환기시키는 '처녀'용법에 대한 불편함을 제기한 것만으로 내가 여성우월주의자이고 극단으로 치닫아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드는 주체란 말인가? 만약에 내가 어떤 단어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서 다른 상대방을 소외시키거나 불편함을 야기시켰다면 나는 좀 더 생각하고 내가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모색했을 것이다. 물론 그분에게 나와 같은 방식을 요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 수준의 범위를 넘어서는 반응에는 역시나 생뚱맞단 말밖에 안 나온다.
'다음에 보자'란 말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건 일상적인 말이지만 시각장애인이 들었을 때는 폭력적이다. '본다'란 말의 여러 활용구들은 시각장애인을 소외시키고 배려하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보면 내가 하룻동안 얼마나 많은 폭력적인 언어들을 쓰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에게 상처주지 않고, 유동하는 나의 정체성 중 어느 한부분이 덜 상처받기 위해서 말을 안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난 서로 배려하고 행여 타인이 나의 말에 타인의 말에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약자라거나 우월하단 얘기를 하는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당신도 그 부분에서 동의가 된다면 '처녀'란 단어의 용법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였다. 그래서 굳이 '처녀'란 말을 처음의 의미로 쓰겠다는 당신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이 여성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가감없이 드러난 부분이 좀 유감스럽다. 모든 사안에 열린 태도로 접근할 수 없고, 사람마다 마지막 보루로 지정해놓은 지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보루란게 충분한 검토와 숙고 끝에 나온게 아니라는 점, 앞으로도 그럴 여지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쉬울 뿐이다.
나는 감히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없다. 그건 아직 내 앎과 삶, 인식 수준, 예민함이 고통을 겪으며 성장한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겁이 나거나 역차별을 이용하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될수만 있다면 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