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성 글을 써놓고, 민망함에 실시간으로 브리핑을 보다 그럼 그렇지, 인적 드문 서재의 문제가 소외감 뿐이겠어라고 자위(마스터베이션 아니다. 이건 유머도 뭣도 아니고)를 하고 있는데 W님과(자주 등장하는^^) H님이 댓글을 남기신게 보였다. W님은 가타부타 말씀이 없고 답답하단 얘기를 해주셨고, H님은 영화 얘기를 해주시면서 당선 축하한다는 말씀을 건네셨다. 

 응? 당선? 

 할매꽃 후기 당선?(이 김칫국) 승주나무님께 제발 후기를 쓰지 마셔서 Arch에게도 알라딘 적립금을 한번 맛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던 할매꽃 후기가? 아니었다. 영화 리뷰 당선이랜다. 응? 내가 따로 쓴게... 아, 전에 썼던걸 카테고리 옮기면서 다시 올린게 당선된거구나. 이건 정말 자다가 웬떡이냐 싶다가도 전에 쓴건데 이주의 영화 리뷰에 뽑혀도 되는건지, 다시 적립금 뺐어가면 아깝긴 하지만, 그리 잘 쓴 것도 아니고, 전에 쓴건데 내가 적립금 받아도 되는건지 고민이 된다. 착한체 하는거냐고? 절대 아니다. 이실직고 고백하는거다. 우려먹은 리뷰로 당선됐다고! 혹시라고 규정상 '우려먹은 리뷰라 다시 내놔, 아치!' 이래도 할말은 없지만 고스란히 알라딘에 환원할테니 어떻게, 안 되겠지? 점점 가관. 

 안 뺐을거라고 혼자 상상하고선, 저 지금 주문하러 갑니다. 사이코북스에서 나온 성도착, 무의식, 감성 시리즈 등등 스테디셀러 목록 위주로 살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건강한 소비자가 된 것 같고, 그간 음지에서 소외받아온 서재살이가 이렇게 적립금 하나로 며칠간은 빵빵하게 신나겠구나란 생각을 하니 이놈의 머리통은 단세포 구조인가란 생각도 들고, 그런데도 신이 나서, 고민이라고 했지만 실은 자랑이 짙게 묻어나와서 이렇게 글을 또 주렁주렁 써보았어요. 

 적립금을  너무 많이 받아서 책 사려고 돈을 써본적이 없다는 분들이나, 이거 웬 호들갑하며 혀를 차실 분들께 해드릴 말은,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고 자주 일어날 염려가 없으며 행여나 보는 눈이 달라져서 자주 일어나도 지금처럼 난리법석을 피지 않을걸 약속 드릴게요. 정말로요. 진짜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제 주접을 넘어가주셔요.  

 아,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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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3-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축하해요~ 그걸로 뭐할거유?

웽스북스 2009-03-2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님은 가타부타 말씀이 없고 답답하단 얘기를 해주셨고
ㅋㅋㅋ 가타에요 ㅋㅋㅋㅋㅋ

Arch 2009-03-2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 휘모리님 뭐할거라고 다 써놨는데 정신이 좀 없는 글이라 안 보였나봐요.
웬디양님, 가타! 난 그럼 부타^^

무해한모리군 2009-03-26 16:17   좋아요 0 | URL
잘 보이는데~ 축하글 달면 뭐 떨어지는거 없수~~

Arch 2009-03-26 16:24   좋아요 0 | URL
근데 왜 뭐 할거냐고 묻는게요! 으음, 키스라도?
전 돈이 필요없는 키스를 아주.... 미안, 이건 정말 유머도 아니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휘모리님을 위한 스페셜 비밀이 있다고.
시간이 지나니 그 비밀이란게 색이 바래지고, 누추해져가고 있으나, 그래도 '저 아직 있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3-26 17:1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럼 얼른 데이트해서 스폐셜 비밀을 들어야겠네요 ㅎㅎㅎ

Forgettable. 2009-03-2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부럽다.................................
저는 막 괜히 오늘 중고샵구경하다가 진짜 사야겠다. 라고 결심한 책들이 대거 나와있어서 다 사느라고 원래 살려고 벼르고 있던 책들은 눈물을 머금고 보관함으로 이사했음... (원래 살려고했던 책이 아닌게 있긴 한가요)
저도 열심히 리뷰를 올려야겠어요!!

Arch 2009-03-26 15:52   좋아요 0 | URL
아, 저 따옴표 먹고싶다.^^ 따옴표도 저정도면 진~ 짜 부러운거 맞죠? 흠흠.
저도 일년만에 있는 일이라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미친듯이 사고 왔어요. 사람이 맘을 비우면 된다는 말이, 연애에만 통용되는게 아닌가봐요.
중고샵 좋은데 있으면 같이 나눠보아요.

다락방 2009-03-2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축하해요!!

정말 좋겠다, 진짜 좋겠다, 캡 부러워요!!

Arch 2009-03-26 18:09   좋아요 0 | URL
오옷! 캡 감사해요. 다락방님은 뭐든 이렇게 특별하셔라^^
 

 청평 갔다온 얘기나할까 하고 느즈막히 알라딘에 들어왔는데 구속, 체포, 침묵 등 한차례 난리가 난 것 같다. 슬그머니 로그아웃을 하고 빠져나가고 싶었다. 혹은 몇개의 댓글을 달고, '이 정도 했는걸' 하면서 자위하고 싶었다. 불편한 느낌, 어떻게 해야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모르는게 약이다는식으로 넘겨버리고 조금 속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곧 어떤식으로든 내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난 엄살이지만, 그들은 절박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 살기도 퍽퍽한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일로 나서는게 의미있을까란 회의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야한단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명하기도 지치고, 시위에 못나가는 죄책감이 맘에 묵직하게 가라앉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맘으로 응원 밖에 없을까? 

 마냐님의 페이퍼를 보다가 '부끄러움 없는 정부는 따로 대기업에 전화를 해서 광고를 싣지 않도록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고 하는데'에 눈길이 갔다. 예전 촛불집회때 경향신문에 광고를 낸걸 기억은 하고 있을런지. 그때처럼 알라디너들이 광고를 내보는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하게 '다 이명박 때문이야.'라고 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남은데다 정치적으로도 정씨의 삽질로 인해 딴나라당의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조차 안 보이니. 가만히 앉아서 화난다고 할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기획하고 실천하는건 어떨까? 

 지금은 촛불집회때처럼 뭔가 들끓을때도 아니고, 알라디너가 나설 경우 사이버 모욕죄 일순위게 들 수 있는 위험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잖아.'라고 말해주는 언론에 힘을 보태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광고를 낼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그때처럼 세부적인 안을 짜서 추진할 능력도 안 된다. 이런게 있어요, 수준이지만 뜻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촛불집회때처럼 명확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당신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요.'가 다겠지만.

 살기 어렵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럴때일수록 자신 안의 분노와 좌절감을 무력감으로 팽개치지 말고, 잘 다스려서 멋지고 재미있는 발상으로 전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알라디너가 시작이 된다면 다른 매체들도 앞다투어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싣지 않을까란 예상도 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지금 다른 사람들은 그러고 있는데 이건 순전히 뒷북일지 모르겠고 개인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괜히 설레발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만족하는 습성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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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게요.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0-01-27 15:11 
     나는 혼자 들떠 일벌이는걸 즐, 아니 잘 한다. 맨날 긁어부스럼인데 즐거울리가 없잖은가. 일년 전쯤에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실어주면 어떨까란 제안을 한적이 있다. 굳이 광고를 실어야할까, 내가 신문을 보면 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있었지만 같이 할 수 있고 가시적인 내용물로 자극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추진했던 터였다. 신문사에 전화를 해보고, 의견을 모은다고 했지만 실행은 커녕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가끔씩 나
 
 
웽스북스 2009-03-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보내는 지지.
힘이 없음이 무기력으로 이어지지는 말아야할텐데, 싶은 요즘이에요!

무해한모리군 2009-03-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한게 있으면 연락 ^^

Arch 2009-03-2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웹디양이라고 쓸뻔, 웬디양님, 자기가 전에 지식채널 PD가 써준 글 올린거 기억해요? 난 그거 하나 믿어요. 내가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맘을 가지고 자꾸 우와 좌로 부딪혀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웬디양님이 나보다 더 잘 알거라 믿어요.

휘모리님의 조직이 필요해요.

Arch 2009-03-2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은 없으시고, 추천만 날려주시니, 호응인 거겠죠?
음... 한겨레측에 어떻게하면 광고를 낼 수 있는지 문의했어요.
추천 다섯명과 저 위에 W양과 F양의 적극 동참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중에 나 몰라라 하면, 아치는 민망해서 점이 될지도 몰라요.
메일이 없네요.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어러다 흐지부지 될까, 흐흠.
 

  난 지하철 계단만 올라도 숨을 헉헉대기 일쑤고, 조금만 뛰어도 귀까지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부실하다. 혹자는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고, 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후에도 여전히 헥헥대는걸 본 다른 혹자는 타고나길 뭔가 없이 타고났다며 혀를 끌끌 찼는데, 여기서 혹자는 다 우리 아빠다. 

 아빠는 씨름을 해서 황소를 타올 정도로 우람한 체격에 운동을 잘하신 분이라,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숨차하는걸 보면 참 안타까워하셨다. 이런 아빠도 꼼짝 못하는 실수가 있는지라, 그 말 한방이면 바로 열심히 운동하란식으로 온건한 대응을 해주신다.

 초등학교 5년 동안 가을 운동회만 되면 우리 아빠는 응원가를 부르듯이 

- 저기, 애들이 다 결승점에 왔는데 100m 멀어진데서 뛰어오는 아치를 봐라. 

 이러기 일쑤셨다. 100m 경주에서 내가 굼벵이도 아니고 그건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워낙에 아이들 약올리는데 수가 트인 아빠에 그 딸인지라 별로 개념치 않고 들었건만 그래도 괜히 약올라서 낑낑대면 아빠는 혀를 끌끌차며 계속 '먹어대' 배가 나와서 그런게 아닌지 심각하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셨던 아빠가 6학년 가을 운동회 때 다른 아이들의 아빠들과 함께 릴레이 경주를 했다. 당연히 이길줄 알았다. 설움과 오욕의 시간이 앞으로 펼쳐지더라도 그렇게 승승장구했던 아빠니 당연히 이겨야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뭐, 

 당신께서 제일 발이 빠르니 마지막 주자를 한다며 거드름을 피우던 우리 아빠, 동네분들하고 어울려서 달리기 전에 술을 한잔 하셨던 우리 아빠, 딸에게 1등 선물은 우리꺼라며 포효하셨던 우리 아빠, 바톤을 받고 달릴 준비를 해야하는데 옆에 사람들이랑 무슨 얘긴가를 하는 우, 리 아빠, 바톤이 쥐어진 그 순간 미친듯이 달려야하는데, 그래 달리고는 있는데 와하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일그러지는 표정의 우,리, 아,빠. 

 아빠는 거꾸로 달리고 있었던거다. 과음을 하셨고, 흥이 나있었던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가끔 발휘되는 아빠의 쇼맨쉽이 기민하게 반응한 의도적인 결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그래서 우린 동점. 더 이상 달릴 일도, 달릴 수도 없는 노쇠한 아빠를 보면서 동점을 미리 만들어놓은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내가 중년이 될때까지 결승점에서 100m로 계속 날 약올렸을테니.

 마초란 말이 허지웅에 의해 (네, 저도 검은비님 리뷰보고 후다닥 그의 홈피에 갔다왔더랬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내품고, 네꼬님의 영화리뷰 덕에 은근히 꽤 괜찮은 세계관이란 생각이 드는 요즘, 모임을 갖고있는 사람들 중에 

진보마초, 인천마초, 여자마초(이건 나다. 쳇)까지 있는 사상적, 지역적, 성별적(이건 어떻게 의미지어야할지) 마초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요즈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전, 기존에 마초란 말의 통념에 기대어 보자면 멋있지 않고, 권위적이기만한, 평생 부양이란 짐을 내려놓고 한시름 쉴만하니까 이젠 뛸 수도 없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우리 아빠. 마초와 가부장이 이꼴은 아니겠지만, 그 어긋나는 지점에서 아빤 가부장쪽에 가깝겠지만, 혼자 가끔 빛나고, 제멋대로이고, 사고뭉치였지만 사람들, 아니 나에게 기억에 남는 해프닝을 가져다준 우리 마초 아빠.  

 나와 같이 뛰거나 예전처럼 날 약올리지 않지만 요즘 아빠는 가끔 내게 문자를 보내신다. 

 한창 때 술 드시고 전화를 해서 괜히 사랑한다며 화냈다 웃었다 하실때처럼 가끔씩 문자를 보내신다. 사랑한다는 말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조그만한 목소리로 나를 응원하는 노인의 숨결을 느낀 것도 같다. 보내는 문자마다 간결하고, 내용도 늘 같지만 난 가끔씩 그 문자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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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3-2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흐뭇해지는 페이퍼라니..

Arch 2009-03-25 17:11   좋아요 0 | URL
나도 미잘의 흐뭇해지는 페이퍼 보고잡다. 실은 흐뭇은 별로고, 경악, 좌절, 혼란, 회오리(응?), 격동, 반전의 페이퍼가 더 어울리겠지만.

프레이야 2009-03-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아빠 생각나요. 저도 달리기를 워낙에 못해서 100미터를 2박3일로 달렸다구용 ㅎㅎ
그때 울아빠 말씀, 혜경아, 거꾸로 달리면 일등이다 너..~

Arch 2009-03-26 15:48   좋아요 0 | URL
^^ 혜경님, 제 서재뽐뿌질의 장본인!
전 제가 달리기 못한다고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어요. 그저 남들이 너무 빨리 달린다는 정도?(잉?) 외람되지만 혜경님 아버님도 한 유머 하세요. 아버지들은 따로 아버지를 위한 유머코스에서 수업을 받으시나봐요. 모자란 자식들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유머들 위주로.
 

산의 자리에 정원을 넣으면 책 이름, 패러디는 아니고 문득 그 제목이 생각나서 적어봤다. 

 승주나무님 말대로 F/A(free agency)가 아닌 그저 청년백수가 된지 5일 정도 됐다. 날백수가 됐으니 남들과 다른 패턴으로 살아보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여행을 생각해봤는데 딱히 가고 싶은데가 없었다. 여행, 여행하지만 실은 가라고하면 괜히 발을 빼게되는 여행이랄까. 워밍업 차원에서 경춘선을 생각해냈고, 전에 대성리와 춘천은 가봤으니 가평이나 청평을 가볼까하고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다. 당연히 재기발랄하며, 맘을 동하게 하는, 꼭 가보고싶게 만드는 내용의 블로깅이나 글은 없었다. 죄다 애인과 펜션에 가려는데 어디가 좋냐, 뭐가 맛있냐, 뭐하고 놀지 등등.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단 열차 시간표만 보고선 어떻게 되겠지란 심정으로 길을 떠났다. 애인없이 펜션이 우글거리는 동네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부아가 치민게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에 방점이 찍힐거란거 아는데도 절대로 아니랜다. 

 길을 떠난다, 떠난다란 말, 참 좋다. 내 맘엔 어쩌면 나그네가 되고 싶은, 길 위에서 정처없이 걷고싶은 로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산객 할머니 할아버지 틈바구니에서 '한 아이'를 읽다 졸다 덜컹거리다보니 어느새 청평이다. 역은 모름지기 이래야한달까, 청평역은 소박하고 정겹운 모양새로 나를 맞아주었다. 휘둥그레하게 크기만한 역보다 작고, 낡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이 좋다. 고속철 사업으로 몇몇 역들이 헐린다는데, 그런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매일 그 길을 지나는 통근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주자의 입장이 아니니 내가 사는 곳은 편리하게, 남이 사는 곳은 보존이란 식은 아니다. 역사니, 유적이니 이런 차원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갔던 그 곳, 누군가의 숨결이 스민 곳이 한두개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밀고 새로'보다는 아취가 느껴지게 보존하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밀리오레와 영화관의 틈바구니에서 애닮프게 끼어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신촌역. 그곳에서 어느 여름 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지린내가 나는 역사에서 머물던 기억은 여전히 애잔하다. 더위를 달랜다며 입에 대었던 폴라포의 달짝지근한 맛과 끈적거리는 여름의 냄새, 내 옆에서 한발짝 멀리 앉아있던 상대방의 표정까지. 깨끗하고, 정숙한 요즘의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청평역을 나와보니, 옳거니, 청평 관광안내 표지판이 있다. 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호명산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를 해놨다. 600m남짓. 만만해보였다. 정상을 지나, 호수까지 가서 다른 역으로 내려오는데 5시간까지 걸린다는데 그 정도까지야 싶었다.(대체 이런 섣부른 판단력은 어디서 주워온건지.) 그래, 여기로 가야겠군.  

 호명산은 옛날 산림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을 때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는데서 명명되었다. 산의 남쪽 아래로는 청평 호반, 서쪽 아래로는 조종천이 흐르고 있어 정산에 올라서면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듯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 국내 최초로 건설된 양수식 발전소의 상부 저수지로 호명산의 수려한 산세화 더불어 저수지는 백두산 천지를 연상시킨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600m남짓. 콧방귀를 뀐게 나중에 얼마나 큰 실수인지 깨닫긴 했지만 처음엔 문제 없었다. 잠도 푹 잤겠다, 돌도 씹어먹을 것처럼 의욕도 넘쳤으니까.  

 주위에 동네분들이 쌀쌀한 봄볕을 맞으며 역사 근처에 앉아 계시길래 여쭤보았다. 일종의 확인 차원. 

- 저기, 호명산에 가려고 하는데 갈만 하겠죠? 

- 으응,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작년인가 거기서 어떤 남자가 죽어가지고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난리도 아니었지. 

- 네? 저, 가고 싶은데. 

- 그럼,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시체를 사람이 못 들고 나오니까 헬리콥터가 끌어내리더라고. 

- ...... 

 아주머니가 호명산과 원수 졌거나 헬리콥터 이미지가 너무 박혀서 그러려니 싶어 그 옆에 분에게 다시 여쭤봤다. 

- 괜찮겠죠? 

- 응, 그럼 좀 힘들어서 그렇지.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요새 멧돼지들이 배가 고프니까 자꾸 나오나봐. 

- 네? 멧돼지가 있어요? 

- 있지.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낮이라 괜찮을거야. 낮에는 멧돼지가 보이니까 도망가면 되잖아. 

- 아, 네. (정말, 내가 도망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겠지?)

 가지말까? 그래, 다른 곳에 청평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을거야. 너 산도 못타잖아, 날도 추운데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거나 갑작스런 산타기로 숨차면 어떻게해. 게다가 거기엔 사람도 없다는데. 머릿 속에선 오만가지 생각이 튀어나오려고 난리인데 나는 태연하게 호사모(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분들이 안내해준 약도를 보며 산을 향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내가 어리버리해보이니까 괜히 놀리는걸 수도 있겠다 싶었고, 정상에 올라서서 청평과 인근 지역을 내려다보고 싶기도 했다. 사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호명산 말고는 이곳, 청평에서 딱히 가볼만한데, 겪을만한데가 없었다. 골목길을 돌고,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을 구경하는건 산에 갔다와서 해야지. 그리고 크게는 아니었지만 뭔가 해내보고 싶다란 생각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울이라 인적 드문 을씨년스러운 유원지를 지나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경사가 만만치 않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직이다. 그냥 돌아갈까? 바람도 너무 차갑고, 가다가 포기하느니 지금 그만두는게 낮지 않을까? 아예 없었던 일처럼 말야.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산을 인생살이와 비유한 예시들이 떠오르자 더더욱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발 내딛고, 다시 다음 발을 내딛었다. 15계단 정도였는데 계단 위에 오르자,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쿵쾅쿵쾅댔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고, 무릎 부근이 땡기기도 했다. 저질 몸이 실력발휘를 하는 중이었다. 

 어, 그런데 넌 누구니? 

 옥찌들과 월명산을 오를 때 가끔 청솔모를 보긴 했지만, 얘는 다람쥐였다. 

 털이 민들레 홑씨처럼 보들거리고 책에서 본것처럼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 작고 귀여운 녀석이 인기척을 느끼고 산 위쪽으로 물결치듯이 튀어오르는데, 민들레 홑씨 꼬리가 바람에 흩어지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다람쥐라니. 

 잠깐, 평소에 못보던 다람쥐가 사는 산이라면 정말 멧돼지도 있는거 아냐? 그런데 쉴데는 없는거야?  심장이 계속 뛰는데, (심장은 원래 계속 뛰고 있었다고.) 호사모 전화번호라도 저장해놔야하는거 아냐? 죽어서 헬리콥터 타면 그래도 헬리콥터 타봤으니 괜찮게 죽었네라고 자위해야하는거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리 있나, 아냐아냐.

바람이 솨하며 불자, 호명산이 금세라도 호랑이 소리를 들려줄 것처럼 들썩였다. 이봐,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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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3-2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흥미진진한데요~

Arch 2009-03-2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휘모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진진은 아니고 진지해질지 몰라요. 뭐래.
바람구두님, 잘 이해 안 되는 말이라, 그러니까 바람구두님 등산과 관련되었단 건가요? 아니면... 어흠어흠

무해한모리군 2009-03-26 08:46   좋아요 0 | URL
전 당신의 진지도 좋아할거 같아요 ^^*

Arch 2009-03-26 11:3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음... 제게 너무 반하신거 같아요. 조금만 반해주세요. ^^

바람구두님, 아항, 제가 좀 느리답니다. 그런데 각오 단단히 하셔야해요. 요근래 캠핑 코스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장난 아니게 힘들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는데 바람구두님이 산행 갔다온 후, 별거 아니었다 이러면 공식적으로 즈질 체력인게 드러나는거지만, 헬리콥터와 멧돼지를 기억해주세요.^^
 



안녕, 이건 내 하트야.
 

 몇주 전에 군산 갔다오면서 민과의 알력 다툼 기타 등등에 대해서 쓴거 같은데 옥찌들 소식을 궁금해하는 아주 W,H님을 위해 작성하는 페이퍼예요. 내 눈에만 예쁜 조카들인지라 자꾸 사진 올리고 그럼 남들도 이뻐할까봐(이게 반전이냐!) 아껴뒀는데 이힛! 

 일이 일찍 끝나서 토요일날 집에 갔다. 옥찌는 부쩍 살이 빠져선 핼쓱해보였고 민은 여전히 씩씩하고 명랑했다. 같이 스티커도 나눠 붙이고 놀다가 내일 산에 가자니까 좋은 생각이라며 이모를 칭찬해줬다. 모처럼만에 받아본 칭찬에 좀 으쓱해졌다. 앗흥^^


우리의 공식 포토존. 배경은 후지고, 주위는 산만하지만 난 이 장소 참 좋더라. 해가 얼굴 위에 바로 쏟아지잖아. 민이 저렇게 웃을 때도 참 좋고.


민에게 깜찍한 표정을 지어보라니까, 요런다. 아주 녹는구나.
 


내 미천한 사진찍기에도 몇가지 틀이 있는데, 앞서 말한 집 앞 벤치에서 찍기와 달리는 옥찌들을 찍어주기. 그런데 요번건 이 녀석들이 이모보고 한번 잘 해보라며 무려 두번에 걸쳐 왔다갔다하며 설정을 해준 사진이다. 요녀석들, 설정을 아는거야?
 


민은 씩씩하게 산을 잘 올랐고, 옥찌는 좀 힘든 기색이 보였다. 그래서 쉬엄쉬엄 가자니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민은 산딸기를 어디선가 주워오고, 옥찌는 그거 누나 주라고, 누나가 그런거 좋아하는거 알지 않냐고 민을 구슬려 받아내는 장면. 민이 순순히 누나 말을 따르네. 이럴땐 우리 엄마가 식상한 멘트를 날려줘야 제격인데. '그러니까 형제밖엔 없어.' 엄마, 오누이, 남맨데. 우리 엄만 안 들리는척 하신다.

 
옥찌 맛있어? 으응. 엄청. 

 청소년 수련원에 가선 도서관에서 느긋하게 책 좀 보려고 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친줄 깜빡했던 것. 옥찌는 이모가 그렇지란 투로 자꾸 나를 갈구고, 민은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은 아니고, 그저 율무차나 한잔 먹읍시다는 식으로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보챘다. 율무차를 먹으며 비둘기를 봤다. 닭둘기 이런 애들이 아니고, 비둘기는 그냥 비둘기였다. 난생 처음 비둘기를 본 듯 눈을 깜빡거리며 비둘기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니까, 낯선이, 아이의 시선이 떠올라 좀 부러웠다. 으음, 그렇구나.  너희들은 그렇게 볼 수 있는거지!

 언제 날이 좀 더 풀리면 우린 꽃피는 산에도 오르고, 동물원에도 가고, 내가 그동안 견학했던 박물관에도 가볼 생각이다. 아니면 그저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동네를 휘적거리며 걸을지도 모르고.  


자, 이제 인사해요. 이모는 오늘 무슨 85도로 기울어진 산에 갔다왔다나, 그것도 정상도 아닌 쉼터까지 갔다왔다고 피곬이 상접해 있어요. 이른 밤이지만 모두들 잘자요. 옥찌들 소식은 다음에 또 전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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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03-2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은.. 마태우스님 닮았음 ㅋㅋㅋ

hnine 2009-03-2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찌가 그새 많이 달라졌어요. 성숙해졌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아무튼 많이 컸네요. 저 미니하트 만든 사진, 민이의 깜찍 포즈, 너~무 귀여운데요. 민이의 헤어스타일은 변함이 없고요.
옥찌, 민 남매분, 반가왔어요~~ (혼자 이럽니다 제가 ㅋㅋ)

웽스북스 2009-03-2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 역시 아치님밖에 없어요. 옥찌는 더 성숙하고 예뻐졌어요. 애들은 금방금방 크나봐요. 그런데, 지민이는 여전히 천진하고 여전히 사랑스럽고. 어 쓰다보니 위에 hnine님 댓글이랑 비슷하네 따라쓴거 아니고 쓰면서 읽었는데. 으흑. 암튼 옥찌들 너무 좋아요. 아. 옥찌들의 설정샷이라니. 어제 꿈을 잘꿨나봐요. ㅋㅋ

조선인 2009-03-25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찌는 정말 감동적으로 이뻐요. 이러다 모델 섭외 들어오는 거 아닐까요?

Arch 2009-03-2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옥찌들 페이퍼 올릴때는 혼자 흥에 겨워서 잘 몰랐는데, 자식 자랑하는 부모를 팔불출이라고 하듯이, 조카 자랑하는 저는 구불출 정도 되겠구나란 생각을 했었는데, 거기에 조선인님의 모델 섭외 얘기는 아, 정말 저보고 하라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벌개졌어요.

라주미힌님, 그거 칭찬인거죠? 그런거죠? 민이 속이 라주미힌님만해서 조심해야해요.(응?)

hnine님과 웬디양님은 같은 말을 했으니 같이 댓글을 달아줘야할 것 같아요. 저도 내년 봄엔 '우리 옥찌 학교 들어가요.'빰빠람, 이런거 할거 같은데요. 나 늙는건 모르고 애들 크는 것만 보이니. 흥!

조선인님 다시 한번 부연하자면, 마로 해람이 모델 섭외 들어오면 어떻게 옥찌들도 낑겨주십사하는 바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