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 모꼬지를 다녀왔다. 남이섬으로 가자고 했다가 청산별곡님이라는 분의 집에서 묵기로 결정했고, F/A(free agency, 있어보이는 작명이나 백수란 소리다. 우리 아빠에겐 소위 '업자', 실업자라는 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르킨다.)의 대표주자인 아치가 제반 준비를 맡기로 했다. 모임 까페에서 일정을 정하고 먹거리 선정 등등의 글을 몇번 올렸다. 시원찮은 반응에 상심해서 몰라 몰라, 이불에 얼굴 파묻고 25초 가량 칭얼대다 잠이 들길 며칠. 어느 날 꿈에선 초등학교 때 내 열등감의 중추를 살짝살짝 갉아먹던 동창이 나와서 여행 진행 상황을 묻더니 별 것도 아닌걸로 힝힝거린다면서 이제부턴 소심 아치라고 명명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다들 일정이 어긋나 나 먼저 영월로 떠났다. 장을 보고,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네모난 칸으로 이뤄진 나무 벌통을 갖고 버스를 기다리는 아저씨, 담뱃대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주름진 얼굴 사이로 뽀얀 담배연기가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는 주 달고 맛있게 담배를 피셔서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하게 담배 한대만 피고 싶은 생각으로 목구멍에서 꿀꺽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 그래, 계속해서 흥미진진한 일만 있었던건 아니다. 버스를 기다리는건 누군가를 기다릴 때처럼 설레지 않으니까. 못된 버스 시간표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날 것처럼 죽죽, 초여름 날씨처럼 후덥지근한 소리를 내며 죽죽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 여행의 시작이었다. 

 설레지 않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덜컹거리며 버스가 내 앞에 서자 나는 당장에라도 운전 기사 아저씨를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반갑고 반가웠으니까. 터미널을 지나 시장 뒤쪽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숲과 강을 지나 깊숙히 깊숙히,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은 내 맘 깊숙히 깊숙히. 

 기사 아저씨가 말씀하신 곳에 내리자 저 멀리 사진에서 봤던 집이 보였다. 이제, 다 왔구나. 한시름 놓고 다시 짐을 이고 진 후 올. 라. 가. 는. 데... 길이 없다. 사납게 짖는 개들을 지나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내딛는데 길이 없다. 다른 쪽인가? 손바닥이 빨개져서 잠시 허벅지에 비빈 후 다시 짐을 들고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집에서 점점 멀어지는거다. 다시 내려가서 다른 길을 찾아야하나? 그런데 여긴 무슨 밭이... 저 멀리서 일을 하시던 분들이 아까 거기가 맞다는 손짓을 해주신다. 으, 다시 제자리. 다시 올라갔다. 여름 분위기 낸다며 짧은 바지를 입었다면 풀독으로 고생 꽤나 했을 길이다. 생전 풀, 풀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인적이 드물어선지 영월만의 독특한 지력으로 풀들이 엄청난 생명력을 갖고 있어선지 풀들은 씩씩하고 억셌다. 어디선가 아카시아향도 실려오는 것만 같았다. 도착한건가?  

 짐을 정리하고 방안을 구경했다. 이곳 저곳 주인의 손이 닿은 곳마다 풀벌레 소리가 나는 듯 했고, 금세 누구라도 나타나 잘 왔냐고 어깨를 토닥여줄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작은 초 하나마저 말을 걸어줄 것 같은 청산별곡에 드디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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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6-10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야되는데 자꾸 이런거 올리면 어떡해요!

Arch 2009-06-10 03:08   좋아요 0 | URL
너도 올렸잖아요!

무해한모리군 2009-06-1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랑스런 집에 다녀오셨네요..
딱 신혼집 분위긴데..

Arch 2009-06-10 17:10   좋아요 0 | URL
으음.. 우리 분위기도 쫌 그랬어요. 씨방 승주님과 오각 멜기님의 분위기랄까...
 

 A사의 인터넷 계정을 두개 갖고 있었다. 동생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갖고 온건데 그중 하나는 정지해놓고, 다른 하나만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지가 3개월 밖에 안 된다는데다 두개를 갖고 찜쪄먹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만간에 정리하자, 정리하자 하고 있었는데 마침 B사에서 우리걸로 바꿔보지 않겠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위약금이며 뭐며 자신들이 다 물어주겠다고 하는데다 나이 많은 상담사 아저씨의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투에 감화받아 그러마 해놓고선 B사에 전화를 걸어 요금과 위약금 내용을 확인했다. 

 정리하자 했으면서도 미뤄놨던건 웬만해선 예외적인 상황도 허용하지 않는 관료적인 서비스 태도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고,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는 이유로 한눈에 보기에도 과한 금액을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직원과 피차 피곤하게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전화는 좀 달랐다. 

 내가 이전할거란 뜻을 비추자마자 상담원은 나에게만 예외적인 상황으로 한 계정을 위약금 없이 해지를 한 후 이용할 수 있겠다란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평소에 A사를 이용하는데 별다른 불만이 없었던 나로선 조금 귀찮은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시 B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 얘기를 하고, 그대로 이용하는게 낫겠다란 의사를 표명하자 아저씨는 예상했던대로 펄쩍 뛰면서 자신의 조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감지를 못한게 아니냐며 득달같이 나를 설득했다. 한번 뱉은 말도 있고, 아저씨의 영업 이익과 아저씨가 나로 인해 소요된 시간을 생각해서 A사의 해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조건으로 다시 또 맘을 바꿨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한 통신사를 꾸준히 이용하는게 좋다. 게다가 난 B사의 비싼 요금과 서비스에 불만을 갖고 있는터였다. 자꾸 옮기는건 몇번의 전화와 설치 기사의 방문 등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란 생각이다. 하지만 굳이 해지 의사를 비춰야만 고객을 붙들기 위해 예외적인 사항을 만들어내는 영업행태를 조금이라도 접하기만 한다면 티끌만한 이득에도 움직일 수 밖에 없다란 생각이 든다. 이 경우 해지 의사를 밝힘으로써 A사로부터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최저요금과 몇가지 부가적인 혜택이 있었음에도 바꾸는걸 철회하지 않았다. B사의 영업 직원과 긴밀한 접촉을 한데다 통신회사간의 과열경쟁으로 소외된 소비자로서 괘씸한 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업하시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광랜이든 전화선이든 인터넷 망 작업은 대개 끝났다라고 한다. 기본적인 수요는 한정되어 있고, 통신사마다 보유하고 있는 망으로 가입자수를 늘리다보니 경쟁이 붙을 수 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자가 이득을 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우선은 인터넷 요금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A사의 경우 인터넷 TV는 약정에 포함시키지 않아 위약금을 부과할 때 이 부분을 패키지로 묶길 권유받았다고 주장하면 허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어느 곳으로 옮기든 요금은 비슷하다. 몇몇 제휴 카드를 이용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오래 이용한 고객에게 별다른 혜택없이 (울지 않으면 젖을 물리지 않는다.) 관리를 안 하다가 해지 의사를 밝혀야만 너 거기 있었냐는 식으로 대응한다. 

 인터넷 뿐만이 아니다. A사의 휴대폰의 경우 이른바 로얄 고객이라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한 통신사만을 이용하다 핸드폰이 고장나 기기변경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A사의 고객 관리를 한다면 충성고객들을 위한 서비스 정책을 개발했을 것이다. 뭔가 대단히 복잡하고, 세세하게 따져보지 않는 이상 혜택이랄 것도 없는 것 말고. 하지만 대리점 특히나 직영점이 아닐 경우에는 중고폰이나 다름없는 핸드폰을 고객에게 권해주고선 생색을 낸다. 충성고객은 쉽게 맘을 바꾸진 않지만 한번 바꾸면 절대로 맘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기업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지만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둬야할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까다로운 소비자, 구매자가 될 생각은 없다. 결국 내가 상대하는건 격무와 클레임으로 녹초가 된 서비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걸 말한다고 시정이 될거란 기대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B사로 옮기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는 내게 '그럼 1년 뒤에 다른 곳으로 옳기면 되지.'라고 말하는 아저씨를 보자 문득 봉이 김선달이 떠올랐다. 사실 봉이 김선달은 둘째치고, 그대로 A사를 쓸 것 하는 후회가 먼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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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주에서 돌아온 동생이 아주 참신하고 매력적이며 탐나고(어흑) 귀여운 남자친구를 실고 왔다. 어디에? 맘 속에. 

 장장 몇시간 동안 동생의 호주 체류기간 풀스토리를 듣다가 지쳐서 걸레질과 스트레칭, 낚서를 하다가 어느 순간 눈이 반짝이게 됐는데 그건 바로 동생이 (실재하는)첫사랑 이야기를 할때부터였다. 물론 태생이 능청맞은데다 입이 가볍고 손발이 무거운 아치를 진즉에 알아보는 비상한 머리의 동생인지라 쉽게 털어놓진 않았다. 하지만 연애물 먹은지도 햇수로 어언 열손가락은 넘어가려고 하는 아치인지라 단박에 알아보고 말았다. 응, 바보 아니면 죄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서를 흘리고 다니긴 했지.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A란 친군데 사진으로 봤을 때 너무 풋풋하고 생기로워서 약간 샘이 날 정도였다. 둘이 어떻게 좋아하게 됐고, 어떤 데이트를 했고, 이럴 때 위로가 되었고, 동생이 흉내내는 A의 표정과 말투, A가 좋아하는 놀이까지. 내 애인도 아닌데 난 자꾸 얼굴이 붉어지고, 이럴땐 어떻게 맞장구를 쳐줘야 절대로 부러워하거나 샘내는게 아니란걸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될 정도였다. 착하고 로맨틱한 A랑 만나다보니 여자친구 있는걸 뻔히 아는데도 들이대는데 도가 튼 일부 한국 남자들이 탐탁치 않은건 둘째치고, 정말이지 왜 그러나 싶었다는 동생의 말은 일정 부분 공감가기도 했고.  

 둘이 MSN 화상채팅 하는데 끼어들어서 프리티하지만 약간 올드한 누이가 있다고 전해달라고 주접을 떨고, 덧니 난 얼굴로 웃는 모습에 다시 또 침을 꿀꺽. 요즘 어린 친구들은 누군가 말끔하게 닦아놓은 듯 윤이 난다.

 어디까지 가봤는데. 

 아, 이렇게 좀스럽고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설마스런 질문을 던진거냐고 묻는다면 머리통에 심 하나 박은 표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동생이 어떻게 얘기를 할지 짐작이 되기 때문에 다분히 낚시로 던진 것 뿐이었다. 내 눈에 익숙한 동생의 패턴으로 보자면 아치랑은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었어, 그럴줄 알았어 등등의 마초 성토성 따분한 반응이 나올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이 질문도 대충 둘러댈거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웬걸, 아, 어쩌나...... 쑥쓰러운지 전부를 세세하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미적거리며 털어놓은 얘기는 너무 사랑스러운걸! 

 지금 내가 부러워하고 강하게 호기심을 드러낸 부분은 동생의 연애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내가 잃어가고 있는 처음 마음, 첫사랑, 혹은 사랑했던 어느 순간의 반짝이는 순간들일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좋아 싶은 시작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는 기분일지도 모르고. 첫걸음을 떼는 아이, 하루가 온통 다른 누군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의 설레임, 여행을 내딛는 첫 발자국,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시작을 위해서 시간을 내기도 망설이고, 이제 아주 큼지막한 자극이 아니면 꿈쩍도 안 할 정도로 역치가 높아져 있다는걸. 그래서 내일을 모르는 것처럼 덤비는 처음이, 두려운 가운데서도 나지막하게 화이팅을 외칠 수 있는 첫 마음이 자꾸 그리워진다는걸. 

 나의 동생, 멋진 처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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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6-10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의 동생, 멋진 처음이길.




그나저나 완전 샤방샤방 부럽다요 orz

Forgettable. 2009-06-1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즘 꼬제뜨와 마리우스의 열렬한 첫사랑이야기에 설레는 전..
이런 얘기 마냥 부럽진 않고 질투가!!!!!!!!!!! (화르르)

Arch 2009-06-10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제가 샤방샤방 노래를 좀 잘 불러요. (아치, 머리 이리 대!)

뽀님, 워이워이, 뽀님의 내공을 강화시키기 위해 더욱 더 염장을 달아오르게 할만한 이야기들을 찾아봐야겠어요. 이 정도에 화르르하면 아치는 진즉에 재가 되었을거예요.
 

 

 시를 읽는다. 반응이 썩 좋지만은 않다. 아빠에게 읽어드리고 엄마에게도 읽어드린다. 동생에게 읽어주고, 옥찌에게도 읽어준다. 아빠는 시인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엄마는 드러누워 좀 더 얘기를 해보라고 한다. 동생은 또 시작이냐는 표정이고 옥찌들은 살금 웃어버린다.  

 낭송, 고미숙의 책에서 고전읽기를 통한 낭송의 발견을 본 후로 탐을 냈고, 탐을 내면 바로 해버리는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가 이렇게 코맹맹이 소리라니, 내가 이렇게, 이렇게로 시작되는 말들이 한무더기로 튀어나오고 입은 바싹 말라갔다. 그래도 낭송했다. 알라디너들 앞에서 낭송했다.

 낭송, 지상으로부터 몸을 1cm쯤 붕 뜨게 만드는 단어.  

 낭송, 기름기가 묻은 목소리가 아닌 낭송을 듣고 싶다는, 필사 의욕을 강하게 불러일으킨 당신께 드리는 선물. 

 낭송, 언젠가 밤의 목소리로 꼭 해보고 싶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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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작나무- Robert Frost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09-07-26 01:06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hnine 2009-06-0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데요. 낭송에 딱 좋은 음성 아니신가요? 그리고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감정이 지나치게 실리지도 않은, 침착한 톤의 일관성. 정말 좋아요. 진짜로요.

Arch 2009-06-09 10:42   좋아요 0 | URL
히~ 고맙습니다.

hanalei 2009-06-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데요.(2)
실제 목소리는 자기가 아는 것 보다 고음대역이 많이 감소된답니다. 맹맹맹,,,
더해서 섹쉬하기까지 하군요.

Arch 2009-06-10 01:56   좋아요 0 | URL
앗! 민망하여라. 코를 좀 뚫은 다음에 노래를 불러봐야겠어요.
 

 

   
 

제목 : 밥 시간은 언제인가 

뱃가죽이 등가죽과 만나 인사할 때
"등가죽아, 안녕?" 
밥냄새가 창자를 훑고 들어간다. 
삼겹살은 누가 구울거야? 

사람들은 반찬 생각만 하고 밥은 상에 없다. 

눈 비비고 일어난 아침, 내 앞의 밥상 

 

 
   

 

   
 

제목 : 떡 

떡은 관능의 아치
사람을 떡으로 태어나고 떡을 먹으면서 산다. 
떡스런 말들 가운데서 난 술지기로 만든 술빵을 먹는다. 

벗은 몸에 덜어진 살점을 찢어먹는 저 남자의 표정은 

울지 않기로 한다. 
밥 대신 떡일지라도 

아아, 떡! 

 
   

 몇주 전에 영월로 MT를 갔다 왔다. 시가 남았고, 여운이 남았고, 최적의 별명이 남았고, 다른 때보다 더 웃기고 풋풋한 얘기들이 남았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모든 시가 감동적인건 아니다. 시인은 그 시대에 한명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우린 시를 지었다. 객기 맞다. 첫 타자가 제목 한줄을 쓰고 그 다음 사람이 행과 연을 자유자재로 배치해서 써내려가는 시. 시가 있는 밤은 별이 하나도 안 보였지만 더할나위 없이 운치 있었다. 다음 사람 차례가 될수록 시의 내용과 느낌보다는 어떤 규칙을 세울까, 시간 제한을 둬서 무슨 벌칙을 줄까로 본말이 전도되기도 했지만 그러다 어느새 초심으로 돌아와 한장을 앞에 두고 펜을 굴리는 사람들의 골똘한 모습이란. 난 이 사람들이 혹여 태생이 '귀여움'이었나 싶어 괜히 웃게 됐다. 나중에는 미잘 말처럼 머릿속에서 팔딱거리는 말들을 주렁주렁 펼쳐서 배치를 다르게 해봐요. 혹은, 혹은.
 고스톱 안 치고, 윷놀이 안 해도 이렇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건 역시, 우리들이 알라디너이기 때문? 으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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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06-08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에에에에~~
강한 시 있잖아요;; 그걸 내어 놓아요..

Arch 2009-06-08 23:01   좋아요 0 | URL
^^ 남자들은 나를 귀찮게 해? 이거였던가. 이건 승주나무님이 올려보아요.

뷰리풀말미잘 2009-06-0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문장 한 문장이 예술이군요. '아아, 떡.' 이라니. ㅎㅎ 이것이야말로 집단지성의 승리가 아닐까요.

Arch 2009-06-08 23:0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알라디디스트죠. 엠티에서 술 먹는거 말고 이렇게 놀 수 있다는거 자체가 뭐뭐의 승리 아닐까요.

바람돌이 2009-06-08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지으며 논다? 음 저는 생각도 못해 본 놀이... (왜 저는 고스톱이나 훌라 이런것밖에 몰랐을까요?)
그렇다고 지금와서 친구들한테 시 지으면서 놀자 하면 저기 미칬나 소리 들을게 뻔한지라 멋진 분위기에 감동만 하고 갑니다. ^^

Arch 2009-06-08 23:06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훌라는 제가 아빠께 꼭 배워보고 싶은 놀이랍니다.
고스톱도 좋아요. 제가 노름에 약해서 얘기하자고 졸랐더니 씨방 승주님께서 그럼 시를 쓰자고 제안해주셨죠. 저희 모임의 아이디어 뱅크시라죠.

무해한모리군 2009-06-08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자체도 무척 귀엽네요 ^^
그러니까 함께 쓴 시인데 왜 아치님 닮았을까?

Arch 2009-06-08 23:0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히^^

Forgettable. 2009-06-0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다녀오셨나봐요!! 재밌었겠다+_+

Arch 2009-06-08 23:08   좋아요 0 | URL
넵! 여쭐까 하다가 거절하면 SM(small mind)아치 맘 상할까봐 살짝 다녀왔어요. 다음엔 꼭 같이 가요.

다락방 2009-06-08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은 관능의 아치,

으윽 이 문장에 반해버렸어요!!

관능의 아치 관능의 아치 관능의 아치 관능의 아치

Arch 2009-06-08 23:09   좋아요 0 | URL
푸하님 아니면 미선님인데.. 흠흠~ 반하기쟁이 다락방님^^

승주나무 2009-06-0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놀이가 드디어 공개됐군요.. 많이 궁금했다는...
시가 아치 님 닮았다는 말에 한 표~~

갔다와서 보니 모두 아치교의 신자들이 되었더라는ㅋㅋ

Arch 2009-06-08 23:10   좋아요 0 | URL
칫^^ 반딧아치 아니면 뭐, 신자들 두루두루 거둬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