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것이 두렵다>가 이사도라 윙의 눈에 투영된 에리카 종 자신의 자서전을 한 올씩 풀어내기 시작하는 때는 그녀의 남편, 한결같으나 좀처럼 말이 없는 평범한 정신분석가 베네트 윙과의 결혼이 시들해지고 부부간의 섹스가 벨비타 치즈만큼이나 덤덤해졌을 때이다. "배를 채우고 살도 찌게 하지만, 구미를 당기는 맛의 전율도, 달콤 씁쓸한 뒷맛도, 어떤 위험도 없다. 그래서 당신은 감미롭고 보드랍고 악마 같이 숙성될 대로 숙성된 카망베르 치즈, 희귀한 염소 치즈를 갈망했다." 이사도라가 남편을 따라 비엔나의 정신과의사 회의장에 갈 때 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공포가, 자기 자신의 불만에 직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두려움에 대한 은유로 쓰이고 있다. 비행 중에 이사도라는, 여자들이 한 남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규정과 성취를 찾아야 하는 결혼생활과 사회 규범으로 인해 자신이 성적으로 불안해하고 "다른 어떤 것의 절반으로서" 불완전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좌절감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이사도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대응은 정사를 갖거나,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퍼들이 장미꽃잎처럼 떨어지고, 속옷들이 민들레 꽃씨처럼 흩날리는 플라톤적인 이상인 자유로운 성교에 대한 내 환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얼굴 없는 익명의 이방인과의 성적 만남이라는 이사도라의 환상은 그녀가 성과 고독 양쪽에서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줄 일종의 해방구와 같다.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권 중에서>


 에리카 종이 좌절과 불안 가운데에서 플라톤적인 이상인 자유로운 성교에 대한 환상을 상상했다면 나는 그저 재미로 야설을 쓴적이 있다. 성적인 욕망이 해소되지 않아서 답답했던 것도 아니고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상대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쓰고 싶었을 뿐. 쓴건 그렇다치고 지금에서야 그 글들을 살펴보니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좀 이상했던 것 같다.

 남자를 유혹하려고 불편한 옷을 입거나 하이힐을 신지 않는 여자, 유혹하는게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자극시키는 여자. 몸에서 나는 갖가지 소리를 남자보다 시원하게 내고, 남자만큼 뻔뻔하게 드러내는 여자. 몸의 결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자신이 어디가 가장 멋진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여자. 싫은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보는 사람이 다 '저러면 질릴거야'할 정도로 하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여자. 미적인 취향 때문에 부득불 남자의 몸을 감상해야한다고 주장하며 희롱이야말로 식상해지는 서로의 관계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는 여자. 하나의 이야기마다 여자들이 가진 속성은 달랐지만 그녀들은 약간씩 위악스럽거나 주접을 떨었다.
 아마도 지극히 계몽적인 시각으로 여성성이며 남성성이란게 별거 아니란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만든 여자는 나와 닮기도 했지만 나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떤 계기로 머리를 쓸어올리거나 목선을 드러내며 한껏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할 일이 있었다. 그쯤이야 문제없지 싶었다. 손가락 빗은 정수리에서 채 몇센티 내려가기도 전에 엉킨 머리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각도를 유지해야 여성스러워 보일지 몰라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여성성에 있어선 난 늘 젠더(사회적인 성) 밖에 있었던거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수긍해야할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아예 없는 것처럼 우기느라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까먹을 때가 많았다.

 나는 천상 여자였다면 굳이 안 해도 될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일찍부터 했다. 좀 더 예뻤다면, 좀 더 애교있다면, 좀 더 순종적이거나 부드러웠다면, 흔히 말하는 지혜롭다면-지혜의 사회적 의미는 갈등보다는 양보와 알아서 기존의 생각에 걸맞게 처신하는건 아닐까? 친구가 자기 애인이 자신 보고 지혜롭다고 말하는 상황이 좀 깬단 느낌이 들어서다.- 나는 왜 이렇게 무뚝뚝하고 상냥하지 않을까.
아무리 능력있고, 멋진 여자라도 사랑받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고릿적 개념을 머리에 처박고 다녀서일까. 하지만 자족적인 '나'는 무척 고무적인데? 여성성의 결핍은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와는 차원이 다른데 난 왜 이렇게 뒤죽박죽일까.

 나는 '여성다움'의 부재로 여성주의와 성별적인 것들을 꾸준히 의심할 수 있었다. 아마 내게 여성성이란게 거저 주어졌다면 알기는커녕 관심도 없었을거다. 때때로 내게 있는 많은 틈들은 채우는 맛을 준다. 틈은 곧 나이다. 그 순간의 나를 인정하는데 인색했지만 지금은 조금쯤 알 수 있을것 같다.

 가장 좋고 매혹적이고 부러운건 딱 그 상태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현하고 자유롭게 사는 삶일지 모르겠다. 누군가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내가 머리 싸매고 한 고민보다 더 근사할 때는 정말 샘이 난다. 하지만 이제 한 살 더 먹은 아치인지라 그 몸에 밴 듯한 행동의 이면에 뭐가 있는줄 알고 있다. 어쩌면 포즈, 혹은 스타일. 나처럼 다 떠벌리고, 고민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다 털어놓지 않고 중간 과정을 생략한 멋진 스타일이란걸.

 내가 멋진 스타일은 아닐지 몰라도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나만 알던 예전보다는 좀 더 자란 것 같아 가끔씩 뿌듯할 때가 있다. 이건 자족적인 페이퍼질에 국한되는거다. 난 여전히 바람 구멍 숭숭 난 틈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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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이 내게 던진 화두

  알약을 안 먹었다면......

 알라딘을 몰랐고, 사회문제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친구가 없었다면, 내게 알량한 공명심이나 평균적인 도덕심이 없었다면. 여러가지 가정을 해본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알고난 후가 엄청나게 불행해진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자꾸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정체모를 즐거움과 개인적인 일과 작은 실천 사이의 자족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일이 주는 충족감은 그 전의 삶에선 느낄 수 없었다. 그 전엔 볼 양쪽에 욕심을 한 바가지씩 채워가지고 다녔으니까.

 물론 나는 여전히 모든 문제에 오지랖 수준으로만 접근할 뿐이다. 불편한 느낌을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는데 그치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다른 누군가의 일에선 그토록 열을 내고 고민을 하면서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선 포기 내지는 독단적으로 재단하는 것도 문제다.

 문제는 그뿐 만이 아니다. 
 나는 당위에 대해서 공감하고, 내가 힘 닿는 한에선 도와줄 여력이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후원을 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같이 시위를 한다면, 공론화시켜서 문제제기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에겐 내 행동과 생각을 차분하게 설명해줄만한 논리가 없다. 쉽게 흥분하고 분노하지만 결국은 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학습된 무기력감이 쌓일까 미리 겁을 내기도 한다.
 
 나는 노동자인데 왜 내겐 노동자성이 없을까. 삶이 주는 유무형의 안락함 때문일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길들여진걸까. 아니면, 아니면...... 나는 현장에 없어서 그런걸까. 나는 왜 그럴까. 나는 내게 없는 정체성을 강요하고 있는걸까. 노동자란 정체성이 내게 씌워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걸까. 난 거부하는걸까, 그럼 내가 말하는 연대는 허위란 말인가. 허위가 아니라면 직접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왜 내겐 절박함이 없을까.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다고 했다. 현장에서 같이 고통을 나눌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고 했다. 울타리 사용법조차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자신있어한건 왜일까. 무관심한건 아니잖아, 란 말은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
 무슨 포인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던 삼성카드를 다시는 안 쓰려고 탈해까지 했고,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가게를 가지 않는다. 모든 물건이 낡고 헤질 때까지 쓴다. 방 안엔 버리지 못한 쓰레기로 넘쳐나고,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한다고 하는데도 늘 부족하고 얄팍하게 느껴진다.
 그건 한끼 굶는 것 가지고도 앓는 소리를 내는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분의 피로하고 절망적인 기분의 반의 반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건 너무 쉽고 편안해서 죄송할 따름이다.

 당신이 너무 맘 상하지 않고, 다치지 않게 투쟁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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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9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9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9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1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묵하고 싶지 않다.

 나는 혼자 들떠 일벌이는걸 즐, 아니 잘 한다. 맨날 긁어부스럼인데 즐거울리가 없잖은가. 일년 전쯤에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실어주면 어떨까란 제안을 한적이 있다. 굳이 광고를 실어야할까, 내가 신문을 보면 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있었지만 같이 할 수 있고 가시적인 내용물로 자극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추진했던 터였다. 신문사에 전화를 해보고, 의견을 모은다고 했지만 실행은 커녕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가끔씩 나로 하여금 부채감을 느끼게 했다. 요즘 난 아무데서나 부채감을 느낀다. 언젠가 꿈 속에선 서재 사람이 나와 그렇게 나대더니 뭘 한거냐고 따지는걸 듣고선 아무말도 못한채 눈만 깜빡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문을 구독하려고도 안 했고, 한겨레와 경향 신문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사랑한다 말해놓고, 사실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사랑한건 아니었다라고 말한 옛 애인들처럼 무책임하고, 감정만 앞세운 꼴이었다.

 날이 습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늦은 점심으로 뚝배기에 찬밥을 눌러 누룽지를 끓여 먹고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열어주지 않았을거다. 한겨레에서 나왔다길래,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날카롭게 안 봐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가봤다. 아저씨 손에는 한겨레 구독 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 난 백수라구요. 아저씨는 내 눈빛을 못본척 하시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ABC집계를 하고 있는데 실구독자수를 통해서 광고비가 책정되니 이번에 한겨레 신문을 구독하라는 거였다.

 누룽지가 식고 있었고, 다시 머리가 무거워졌다. 단박에 돈 들어갈 때는 많은데 난 무일푼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에 신문을 단행본 보듯이 샅샅이 봐서 맨날 밀렸던 기억도 부수적으로 떠올랐다. 신문을 안 보면 폐지가 될텐데 종이를 낭비한단 생각도 들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서 아저씨가 하는 미디어법이며 조선일보의 ABC 조작  등등의 얘기를 들었다. 다른 신문 아닌 한겨레란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렇게 습하고 아릴 정도로 추운 날에 광주에서 이곳까지 지원을 나왔다는 아저씨의 말을 들어서였을까. 만사 귀찮아 늘어져있던 내가 무상 구독없이 일년 보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그깟 구독료쯤 군것질 안 하고, 자전거 좀 더 타면 충분하잖아란 생각이 들었다. 한달 구독료 낼 돈도 없겠냐는 배짱도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흥분하고 열내고 답답해하는건 정말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막상 내 돈이 들어가고, 내가 갖고 있는걸 조금 내놓거나 덜 가져야한다는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많이가 아니고 조금만 어려워서 난 내일부터 한겨레를 보기로 했다. 한겨레를 살리거나 아주 멋진 배경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독자가 되어줄거다.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임혜지씨의 말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건 나처럼 이름없는 조약돌일 경우가 더 많아왔으니까. 참, 신문 하나 보면서 거창하다. 신문 두개 구독했으면 논문 하나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걸 꼭 서재 사람들한테 말해야할 것 같았다. 이제는 아치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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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랑 싸우는게 싫어서요.
아빠랑 싸우는게 싫어서 "조선일보 보지말고 경향신문 봐요." 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대신 경향신문을 보고 싶어서 작년부터 회사로 구독시켜서 보고 있거든요. 괜히 집으로 시켰다가 뭐하러 두개나 신문을 보냐, 돈이 어딨냐, 뭐 이런 여러가지 지청구를 들을것 같아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회사에서 구독한 경향신문을 집에 가져가고, 그걸 식구들이 다 봐요. 식구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거나 한건 아니고, 신문대금 아까우니 신문을 끊어야겠어, 하는 그저 아빠의 결심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온 식구들이 경향 신문 보는데에 일조하긴 했지만, 그 신문을 보기 위해서 그 어떤 투쟁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직접 싸운것도 아닌데, 전 이제 됐다, 싶어져요.

Arch 2010-01-27 15:3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참 잘했어요. 근사한 경험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직접 싸우진 않았다지만, 우회적이고 은밀한 전략으로 아주 멋지게 다락방님네 신문은 경향신문이 되었잖아요.

뷰리풀말미잘 2010-01-2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저는 조선일보 봐요. 아치대신 저를 괴롭히세요. ㅎㅎㅎ

아치, 조선이든 한겨레든 그깟 신문따위!

Arch 2010-01-27 15:50   좋아요 0 | URL
미잘, 어디서 쿨체야!
여러분, 보셨죠? 미잘 괴롭히러 가셔요. 저는 요새 잠을 못자서 머리숱도 없는 아치라구요. ^^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난 3년째 전화하시는 한겨레 아저씨를 계속 피하고 있는데 ㅠ.ㅠ
대학때 왜 내이름으로 동아리 신문을 구독했을까 후회가 될 지경 --;;

Arch 2010-01-28 23:54   좋아요 0 | URL
음... 신문 구독하는게 있나요?

무해한모리군 2010-01-29 09:52   좋아요 0 | URL
주간지는 받아보는데 일간지는 도저히 볼 엄두가 안나요 ㅠ.ㅠ

나무처럼 2010-01-2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작년부터 경향을 보는데 매달 통장을 보면 책 한 권짜리 구독료가 왜 그리 아까운지...쩝.. 소득공제 안 되는 기부금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다독이지요^^

Arch 2010-01-28 23:55   좋아요 0 | URL
매달 통장을 안 보면.. ^^ (농담이 뭐 이래, 퍽퍽~) 저도 기부로 생각하려구요.

머큐리 2010-01-2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를 창간 이후 쭉~ 구독하고 있는데.. 작년부터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어서...그래도 어쩌겠어요. 대안신문이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Arch 2010-01-28 23:56   좋아요 0 | URL
사실 전 경향신문이 더 좋아요. 일년 구독 끝나고 여유되면 경향신문 볼까 생각 중이에요.

2010-01-29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에 갔다. 민은 기운이 넘치는지 팔팔 뛰어다녔고, 옥찌는 조금 걷자 힘들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용돈을 모으는 조건으로 플레이 랜드에 가기로 약속을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펄펄 날아다니는 옥찌. 옥찌가 머리를 쓴건지 내가 말린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린 무척 씩씩하게 산에 갔다.
 우린 눈이 덜 녹은 산을 뛰어다녔다. 뛰니까 춥지 않았다. 뛰니까 아직은 내가 이 녀석들보다 달리기를 잘한다는게 왠지 뿌듯하고 그랬다. 히~ 어, 그런데 저건 뭐지. 나무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청솔모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데 보였다. 청솔모는 솔방울을 갉아먹고 있었다. 바로 위에서 이로 솔방울을 갉아먹는 소리가 나고, 솔방울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옥찌들은 신나서 어쩔줄 몰라 목이 넘어가라 나무만 쳐다봤다. 물론 나도 옥찌들보다 더 신났다. 갉아먹은 솔방울을 주워 이걸 먹은거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청솔모는 정말 부드럽고 예쁜 애라며 마치 잘 알고 지내온 것처럼 얘기를 했다.

 
 그런데 청솔모는 어떤 애일까. 산에 갔다와 친구에게 청솔모를 봤노라고 말했더니 걔네들은 황소 개구리처럼 수입됐는데 번식력이 뛰어나 토종 다람쥐들이 점점 없어진다는거다. 네이버 어린이들처럼 청솔모가 다람쥐를 잡아먹으니까 못됐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다지만 (나를 포함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청솔모는 청서, 한국 다람쥐라고 불리운다. 잣나무, 가래나무, 가문비나무, 상수리나무의 종자를 비롯하여 밤·땅콩·도토리 등의 나무 열매와 나뭇잎·나무껍질 등을 잘 먹으며, 야생조류의 알이나 어미새도 잡아먹는다. 늦가을에는 월동하기 위하여 도토리·밤·잣과 같은 굳은 열매를 바위 구멍이나 땅속에 저장하여 두는 습성이 있다. 큰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네이버 백과사전) 청솔모가 조류를 잡아먹어 조류 피해가 있긴 하지만 다람쥐는 잡아먹지 않고, 수입된 것도 아니란다. 옥찌들한테 알려줘야지.
  새 둥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얘네들은 입으로도 정말 근사한 집을 지었다고 했더니 민은 나무로 톱으로 잘라서 새집을 봐야겠단다. 지희는 눈을 보더니 이번엔 꼭 눈 결정체를 봐야겠다고 입맛을(왜?) 다셨다. 민은 청솔모가 움직이며 떨어진 눈을 잡아왔다며 주먹을 꼭 쥐고 내게 다가와 보여줄까 말까 하면서 날 살살 약올리다가 짜잔하고 손을 폈더니 눈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자 많이 아쉬워했다. 민은 청솔모를 먹고 싶다며 입맛을 다시고, 내게 다람쥐는 도토리묵을 먹는다고 알려줬다.

 산에 다녀와선 한상 차려 근사하게 먹었다. 옥찌가 말하길, 솔방울 된장국은 특별히 끓인거니까 호호 불어서 잘 먹어야한단다.

 민은 나랑 동생을 그렸다. 나는 왜 이렇게 목이 긴거냐고 물으니 아무말도 하지 않는 민. 오른쪽에 있는 색깔 예쁜 엄마 그림이 더 부럽다니까 민은 덤으로 토끼 이모를 그려줬다. 내가 이렇게 대우받는 이모다.
       내일 서울에 있는 막내를 만난다고 기분이 좋아진 옥찌가 그림을 그렸다. 내 생일 카드 저리가라고 할만한 솜씨를 보여줘 샘이나긴 했지만, 글씨도 잘 쓰고 색칠 잘 했다고 칭찬 받아서 괜찮았다.


 
막내 이모 여태까지 건강하게 살지.
보고 싶었어. 사랑하고 내인 온다고 엄마한태 들었지. 알라뷰.
올때 몸 건강히 왔으면 좋했어. (그 다음에 뭐 쓸지 물어보더니)
배 아픈건 괜찮아?
오늘은 큰이모랑 지민이랑 나랑 산 갔지.
그러고 나무에서 솔방울 갈갈 먹고 있는 청솔모 봤지.
우리 솔방울도 지민이랑 나랑 주었죠.
2010년 1월 24일 지희가 막내 이모 한대.

 아빠는 막내한테 보낸다고 김을 굽고 있고(무려 몇백장을) 옥찌들은 낮잠을 자서인지 아직까지 쌩쌩하다. 엄마는 아주아주 두서없는 내용을 아주아주 중요하단 표정으로 풀어내고, 동생은 미치도록 매운 국수를 만들고 있다.
 그럼 난 이만, 까무러칠 정도로 매운 국수를 먹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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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1-25 15:59   좋아요 0 | URL
두개 다 맞는 말이래요.

무스탕 2010-01-2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무러칠 정도로 매운 국수는 뭘 어떻게 넣고 만드는거에요?
민이 간식거리 청솔모는 언제 잡을거에요? ㅎㅎㅎ

Arch 2010-01-25 16:05   좋아요 0 | URL
동생이 제조하는걸로 재료는 고추장과 열무 김치, 참기름이 다예요. 고추장이 매우면 국수도 매운걸로 알고 있어요. 고추장이 안 매우면 고추를 썰어넣음 되는데요. 고추까지 넣는다면 국수를 야식으로 먹고 밤새 잠못 이룰 정도로 속쓰릴 수 있어요. 히~
민이 먹을까요? 얘는 먹을 것도 많은데 왜 이럴까요. ㅋㅋ 무스탕님이 잡아줘요~
 

 진즉 했어야할 재고 소진 중간 점검.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독서 모임 선정 도서) 부담을 잔뜩 안고 책 내용 그대로 요약을 했다. 에리히 프롬의 생각에 반하는 내용과 다른 생각들을 정리해서 다시 올려야지. (1.7)

일의 기쁨과 슬픔 - 보통이다. 프루스트와 사소한 일상을 제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줬던 보통. 사랑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시멜로란 말을 귀엽고 들려준 보통. 신작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시 집어들며 갈증을 풀었는데. 드디어 빌려서 읽었다.
 물류에서는 우리가 이 물건들이 어디서 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면을, 화물선 관찰하기에서 인공적인 조형물의 아름다움과 이해받을 수 없는 미의식을, 비스킷 공장에서 거대한 시장의 물건만큼 부품으로 소용되는 인간에 대해 보통의 시각으로 보는건 분명 신선했다. 직업 상담에서 아무리 구호를 외치고, 자기 계발서를 읽더라도 실패하고 실패한걸 인정해야하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얄팍한 위로가 되었다. 회계에서 CEO들의 변모된 포지션과 인적자원부 직원의 일터에 대한 역학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로켓 과학을 보고, 절대적인 문명과 자연의 대비, 인간의 왜소함은 누구나 얘기할 수 있지만, 취재하던 기자가 무심하게 마치 로켓이 발사된 것보다 자신이 모기 물린게 더 중요하다는식으로 얘기한걸 잡아낸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란걸 느끼자, 난 여전히 보통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걸 느꼈다.
 하지만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란 신작은 아마 당분간 읽지 않을 것 같다. 보통은 이젠 좀 다른 얘기를 해야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항공 회사'는 따분한데다 썰렁했고, '그림'은 읽기 전이었는데도 무슨 말을 할지 좀 뻔했다. 모든 책이 완벽할 수 없고, 늘 빛나는 페이퍼를 쓰는 미잘도 가끔 썰렁한 얘기를 하니까(물론 그보단 자주 업데이트가 안 되는게 더 큰 문제지만)그쯤은 별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다만 난 그를 좀 더 오래보고 싶으니까 금세 좋아했다 다시 식어버리는 촐싹맞은 짓은 좀 자제해보련다. 그래서 사랑 연작과 불안, 여행의 기술을 야금야금 재독해볼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보통씨! 정말 책 많이 썼는데요. (1.10)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 압축된 한 꼭지를 읽고나자 좀 피곤한 느낌이 들었음. 다음에 다시 도전!

언니들, 집을 나가다 - 전작과 별로 다를바 없는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어느 지점에서 맘이 열리는 부분이 있다. (1.5)

당신과 눈 뜨는 아침 - 라일리와 브린의 이야기. 너무나도 완벽한 두 사람의 살떨리게 충만한 섹스는 읽는 독자를 동요시키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 자꾸 나의 섹스와 비교를 하게 되며, 급기야는 새로운걸 시도하려... 아, 그만해야지 ^^ D님, 난 이 책을 보고선 섹스를 하고 싶지 않을 때 두통을 핑계로 대는 팁을 얻었어요. (1.6)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누군가의 추천, 누가 좋다고 하더라에서 책을 사거나 빌리는건 자제해야겠다. 안 읽을 것 같음.)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저자 임혜지씨의 건축 이야기. 저자의 감상과 적절히 조합된 일정 수준 이상을 담보하는 글솜씨가 읽는 즐거움을 크게 한다. (1.17)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 처음에 머릿말만 읽고선 건축 실용서가 아닌 남다른 견해를 보여줄거란 예상을 했다. 계속 풍경놀이만 한다. 사진은 너무 예쁜데...

사라진 내일 -  많이 버려라, 노후의 내재화된 상품을 통해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라, 간편하고 깔끔한 일회용 쓰레기의 일반화, 쓰레기 시설을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보이게 하라, 쓰레기가 더 많이 나오더라도 비용이 적게 나오는걸 선택하라,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를 직접 처리해야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건을 사면서 느끼는 기쁨도 크겠지만, 이 책을 보다보면 그 기쁨이란게 그리 클까란 생각까지. (1.18)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
김경이 돌아왔다. 이번엔 여행서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그녀다운 얘기를 풀어놓는다. 앤 패디먼이 말한바 있는 여행지에서 책 읽기가 간접적으로 가미되고, 놀고, 떠들고, 사람들이 보이는 여행.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행의 시간을 일상과 접속시킨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가 뿌려준 지도에 올라타 몰타의 매(방금 전까지 누가 말했다고 책을 보는 짓은 자제한대놓고), 다시 플라멩코, 바로셀로나, 리스본 야간열차, 존 버거를 찾아나서본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관광지보다는 사람과 일상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좋아한다는게 떠올랐다. 롤모델이 이 정도로 멋져도 되는걸까. (1.11)

line up list

여성의 삶을 바꾼 50권의 책 - 아직도 지지부진 중. 왜 이렇게 안 읽히는걸까. 재미있고, 유익하기까지 한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20가지 플롯
액팅원 - 작품 들어가면서 보류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다시 책을 빌리고, 또 다른 책을 탐낸다.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란도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정말 좋았는데 이렇게 멋진 책을 만나다니!
세계문화사전(강준만) - 마돈나 편을 보고 홀딱 반함.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NGO 실무 핸드북 - A 사무실에 가서 놀다가 빌려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표지가 멋지다. 우다왕과 류롄. 모처럼만의 소설이다.
그녀에게 말하다 - 김혜리 인터뷰집.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각개약진 공화국 - 지방은 식민지다와 같이 읽어볼 예정.
레인보우 동경 - 김경주의 에세이다. 약간 말랑말랑하고, 귀엽다. 기담과 다르게 낯선 느낌.

그러고보니 책을 또 빌렸다. 집에 있는건 어쩌려고. 새책 탐내는 버릇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식객을 무려 다섯권이나 읽었고(이건 너무 야매로 재고소진 하려는 기미가 보이니까 뺄게요 ^^) 아름다운 가게에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과 에세이 등 총 21권을 기증했다.

메아쿨파님, 중간점검 해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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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2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난 1월 재고 소진 아직 한권밖에 못했어요. 바람의 그림자. ㅜㅡ

만들어진 신 올려놓고 전전긍긍중 ㅜㅡ

잘자요, Arch님.

Arch 2010-01-21 14:53   좋아요 0 | URL
ㅜㅡ가 무려 두개! 어허... 누가 다락방님을 이리 근심케 했는고. 꽃추노의 양반 말투 흉내내봤는데 어때요. 히~ 다락방님 저는 시간도 많고 할일도 없는 백수잖아요. 이 정도론 어디 가서 백수 명함도 못내밀어요.
일 잘 하고 있어요? 다락방님, 기지개 좀 쭉쭉 펴고!

2010-01-21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은 사람의 관심에 따라 호오가 나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알랭 드 보통의 공항 이야기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요. 제가 워낙에 비행기와 공항을 좋아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은 했었더랬지요. 비행기를, 공항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꼭 권하고픈 에세이였어요. 주제가 명확하고, 비행기를 에세이스트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이었으니까요!(그렇지 않으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항공사고 수사대를!) 그러나,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에게는 그저 그런 에세이일지도.(그래도 우리의 보통 선생인데 흐흑)

Arch 2010-01-21 15:05   좋아요 0 | URL
아니아니, 난 그 책 읽어보지도 못했는걸요. 그냥 뭐랄까, 한 템포 쉬는거죠. 게다가 그의 전작 리스트가 화려하니까 재독해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렇게 재미있나요? 휴... 갈등되잖아요 ^^ 그래도 언젠가 읽게 되는 날이 오겠죠. 제 손으로 사진 않겠지만 저희 동네 도서관은 보통씨 책을 잘 사는 편이라 몇달 뒤면 지금 어쩌고 했던거 다 까먹고 아마 눈에 띄자마자 집어들거에요.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화물차 관찰하는거랑 비행기랑 이번 에세이랑 비슷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