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것이 두렵다>가 이사도라 윙의 눈에 투영된 에리카 종 자신의 자서전을 한 올씩 풀어내기 시작하는 때는 그녀의 남편, 한결같으나 좀처럼 말이 없는 평범한 정신분석가 베네트 윙과의 결혼이 시들해지고 부부간의 섹스가 벨비타 치즈만큼이나 덤덤해졌을 때이다. "배를 채우고 살도 찌게 하지만, 구미를 당기는 맛의 전율도, 달콤 씁쓸한 뒷맛도, 어떤 위험도 없다. 그래서 당신은 감미롭고 보드랍고 악마 같이 숙성될 대로 숙성된 카망베르 치즈, 희귀한 염소 치즈를 갈망했다." 이사도라가 남편을 따라 비엔나의 정신과의사 회의장에 갈 때 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공포가, 자기 자신의 불만에 직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두려움에 대한 은유로 쓰이고 있다. 비행 중에 이사도라는, 여자들이 한 남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규정과 성취를 찾아야 하는 결혼생활과 사회 규범으로 인해 자신이 성적으로 불안해하고 "다른 어떤 것의 절반으로서" 불완전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좌절감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이사도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대응은 정사를 갖거나,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퍼들이 장미꽃잎처럼 떨어지고, 속옷들이 민들레 꽃씨처럼 흩날리는 플라톤적인 이상인 자유로운 성교에 대한 내 환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얼굴 없는 익명의 이방인과의 성적 만남이라는 이사도라의 환상은 그녀가 성과 고독 양쪽에서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줄 일종의 해방구와 같다.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권 중에서>


 에리카 종이 좌절과 불안 가운데에서 플라톤적인 이상인 자유로운 성교에 대한 환상을 상상했다면 나는 그저 재미로 야설을 쓴적이 있다. 성적인 욕망이 해소되지 않아서 답답했던 것도 아니고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상대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쓰고 싶었을 뿐. 쓴건 그렇다치고 지금에서야 그 글들을 살펴보니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좀 이상했던 것 같다.

 남자를 유혹하려고 불편한 옷을 입거나 하이힐을 신지 않는 여자, 유혹하는게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자극시키는 여자. 몸에서 나는 갖가지 소리를 남자보다 시원하게 내고, 남자만큼 뻔뻔하게 드러내는 여자. 몸의 결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자신이 어디가 가장 멋진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여자. 싫은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보는 사람이 다 '저러면 질릴거야'할 정도로 하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여자. 미적인 취향 때문에 부득불 남자의 몸을 감상해야한다고 주장하며 희롱이야말로 식상해지는 서로의 관계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는 여자. 하나의 이야기마다 여자들이 가진 속성은 달랐지만 그녀들은 약간씩 위악스럽거나 주접을 떨었다.
 아마도 지극히 계몽적인 시각으로 여성성이며 남성성이란게 별거 아니란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만든 여자는 나와 닮기도 했지만 나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떤 계기로 머리를 쓸어올리거나 목선을 드러내며 한껏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할 일이 있었다. 그쯤이야 문제없지 싶었다. 손가락 빗은 정수리에서 채 몇센티 내려가기도 전에 엉킨 머리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각도를 유지해야 여성스러워 보일지 몰라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여성성에 있어선 난 늘 젠더(사회적인 성) 밖에 있었던거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수긍해야할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아예 없는 것처럼 우기느라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까먹을 때가 많았다.

 나는 천상 여자였다면 굳이 안 해도 될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일찍부터 했다. 좀 더 예뻤다면, 좀 더 애교있다면, 좀 더 순종적이거나 부드러웠다면, 흔히 말하는 지혜롭다면-지혜의 사회적 의미는 갈등보다는 양보와 알아서 기존의 생각에 걸맞게 처신하는건 아닐까? 친구가 자기 애인이 자신 보고 지혜롭다고 말하는 상황이 좀 깬단 느낌이 들어서다.- 나는 왜 이렇게 무뚝뚝하고 상냥하지 않을까.
아무리 능력있고, 멋진 여자라도 사랑받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고릿적 개념을 머리에 처박고 다녀서일까. 하지만 자족적인 '나'는 무척 고무적인데? 여성성의 결핍은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와는 차원이 다른데 난 왜 이렇게 뒤죽박죽일까.

 나는 '여성다움'의 부재로 여성주의와 성별적인 것들을 꾸준히 의심할 수 있었다. 아마 내게 여성성이란게 거저 주어졌다면 알기는커녕 관심도 없었을거다. 때때로 내게 있는 많은 틈들은 채우는 맛을 준다. 틈은 곧 나이다. 그 순간의 나를 인정하는데 인색했지만 지금은 조금쯤 알 수 있을것 같다.

 가장 좋고 매혹적이고 부러운건 딱 그 상태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현하고 자유롭게 사는 삶일지 모르겠다. 누군가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내가 머리 싸매고 한 고민보다 더 근사할 때는 정말 샘이 난다. 하지만 이제 한 살 더 먹은 아치인지라 그 몸에 밴 듯한 행동의 이면에 뭐가 있는줄 알고 있다. 어쩌면 포즈, 혹은 스타일. 나처럼 다 떠벌리고, 고민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다 털어놓지 않고 중간 과정을 생략한 멋진 스타일이란걸.

 내가 멋진 스타일은 아닐지 몰라도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나만 알던 예전보다는 좀 더 자란 것 같아 가끔씩 뿌듯할 때가 있다. 이건 자족적인 페이퍼질에 국한되는거다. 난 여전히 바람 구멍 숭숭 난 틈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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