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과에서 일하는 분들은 기본급이 적다며 ‘일상적으로’ 초과 근무를 한다. 같은 과여서이기도 하고,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은 최저 수준이라 나도 덩달아 회사에 눌러붙어있다. 이렇게 페이퍼를 쓰면서. 양심이란게 있다면 자그만 흠집이라도 난걸까. 몇 주 이러고 있어 익숙해질만도 한데 아직도 불편하다. 집단 파업이라도 해서 우리의 입장이란걸 보여줘야하는건 아닐까.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못하고 까라면 까라는대로, 움직이고 있다. ‘대물’의 고현정처럼 ‘나는 거수기가 아니에요, 나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진실을 알아겠어요’라고 당차게 말하는건 꿈도 못꾼다. 왜냐면,

 나이 들면 다 그래서이기도 하고, 풍족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내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지 얼마 안 된데다 지금 이곳에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기존에 있던 분들의 친밀감은 ‘지금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란 회의를 부채질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끈끈하다. 괜찮아, 일부러 그러는건 아닐거야, 좀 친해지면 나아지겠지, 사사건건 간섭하고 참견하며 귀찮게 하는 것보다 이편이 더 나아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씩 겪는 일들에 눈물이 핑 돈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서러운건 서러운거고, 이런 일들이 쌓이다보니 그동안 내가 사회성 없다고 징징댔지만 그건 별게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내게 일정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먼저 손 내밀면 뜨겁게까지는 아니어도 습관적으로나마 손 내밀던 사람들과 있었던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요즘 들어 자꾸 J씨가 보고 싶다. 그는 먼 나라에서 잘 살고 있을까. '광년'이의 ‘광’은 미칠 광이 아니라 '빛광'이었던게 아니었을까.

 낯선 도시의 적응 안 되는 회사에선 초과 근무를 하거나 회식을 할 때마다 고기를 먹는다. 고기를 안 먹다보니 못먹게 되어버린 난 버섯이나 마늘을 구워 먹는다. 마늘을 너무 먹어 이제는 사람이 될 지경이다. 어제도 마늘과 파절이, 고추까지 몽땅 먹고선 집으로 돌아오는데 후우, 숨 쉬는 냄새에 아찔해지고 말았다. 이런 순간 아찔하고 말다니. 기습 키스를 한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내 정체를 드러내주는건 남들의 시선과 남들의 시선에서 부딪혀나오는 나에 대한 생각일지 모르겠단 것. 듣고 싶은 말은 일은 절대적으로 조금 하는데 월급은 제일 많이 가져가는 상사에 대한 얘기를 듣고 원래 그게 맞는거 아니냐며 여유 가지며 일하는게 더 괜찮은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 오랫동안 직장에 있어야 하는데도 월급을 얼마 못받는 내 처지를 개선해야한다는 친구의 말. 올드독의 TV 살롱 카툰에 나온 정성일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우정으로부터 진리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가능성을 공유하려는 것이다.'란 생각까지 스치면 이 친구랑 다시 연락이 된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얼마쯤 실감하게 된다.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몸의 그늘진 부분까지 말리고 나면 건조해선지 이곳저곳이 간지럽다. 로션을 바르기 귀찮다며 간지러운 곳을 건성 건성 긁적거린다. 얼마간은 괜찮다 긁기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면 다시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긁어댄다. 결국은 가려운 데가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긁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하는 일은 대체 어떤 간지러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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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11-0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어느 도시에 있는건가요? 광주? 전주? 어쩐지 주로 끝나는 도시에 있을 것만 같은 예.감. ㅋㅋㅋㅋ
나는? 나는?? 먼나라 살고 있는 나는? ㅋㅋ 안보고 싶나요? 흥

일은 조금하는데 월급은 많이 가져가는 상사.
우연히도 나도 오늘 친구랑 그 이야기했어요. 친구는 그건 타파해야 할 지점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하는 얘길 하더군요. 모든 사람이 동사무소 직원처럼 널널하게 일하며 적당한 월급을 받는 거, 상사처럼 조금 일하고 돈은 많이 받는거. 그렇게 되면 참 좋겠죠.

나의 오늘 저녁 메뉴는 콩나물국, 두부조림, 샐러드, 생선구이였어요. :)
난 아직 못먹는 지경은 아니고, 가끔 무척 고기가 당기면 먹지만 나도 요즘 많이 안먹고 있어요.

Arch 2010-11-09 16:04   좋아요 0 | URL
치이~ 어떻게 알았지! 캐나다 가서도 사그러들지 않은 뽀탐정의 기운이라니. 뽀는 가끔 보고 싶어요. 자주 보고 싶으면 속상하잖아요.

내 얘기가 그 얘기였어요. 그런데 복문에다가 두서가 없어서 뭔소린지 못알아먹게 된거죠. 에잇! 널널하게 일하면 좋겠어요.

버라이어티한 식단인데. 저는 도통 고기가 안 당겨요. 물고기 눈을 봐버려서 생선탕을 못먹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막 만두는 먹고, 오징어 눈도 먹고. 풍신난 것 같아요.

다락방 2010-11-09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도 고기 못먹고 뽀도 고기 잘 못먹고 미잘은 잘은 모르겠지만 고기를 안먹는 것 같고
아! 역시 나만 육식녀인가요. 난 왜이렇게 육스러울까.. 그런데 너무 고기 먹는 남자는 싫어요.

전 가끔 진심으로 내가 일은 안하면서 월급을 너무 많이 가져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요. 월급이 많아서가 아니라 늘 빡세지 않아서요. 이런 얘길 하면 친구들은 아니라고 월급은 더 가져가야 한다고 하지만.. 전 무슨 트라우마나 컴플렉스로 똘똘 뭉친 사람 같아요.

어쨌든 결론은 페이퍼 좀 자주 쓰라는 겁니다, 아치.

Arch 2010-11-09 16:09   좋아요 0 | URL
'육덕지다'란 말은 '너무 마르지 않고 보기 좋고 건강한 정도로 살이 있는 몸매를 일컫는 말.' 이런 뜻이 있대요. 왠지 생각나서.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무슨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못먹게 되어버렸어요. 미잘은 차도남이라 고기 먹더라도 조금만 먹을 것 같아.

어떤 사람들은 '빡세야' 열심히 사는거라고 느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다락방은 일 조금만 하고 그 시간에 정말 빡세게 남자를 만났음 좋겠어요. 섹시한 목소리 챙겨서!

다락방의 당근은 제가 페이퍼를 쓰게 하는 힘을 준답니다.

비로그인 2010-11-0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좀 맵고, 짜고, 약간 쓰고.

다음엔 덜 맵고, 덜 짜고, 약간 달콤한 <아치(님) 통신> 을 기다리겠습니다. ^^..

Arch 2010-11-11 11:06   좋아요 0 | URL
흐~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바람결님 고마워요

양철나무꾼 2010-11-1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arch님의 글들이 읽고 싶어 들어왔는데...
제가 못 읽은 새 글이 '뽀나스'로 있었네요~^^

가려운 곳에 오일을 발라 건조함을 막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여~!!!

Arch 2010-11-18 09:52   좋아요 0 | URL
뽀나스는 정말 좋아요. 덤처럼! ^^
이제 가려움은 좀 덜해요. 고마워요. 양철나무꾼님
 

 무척 사랑스럽고 자꾸 읽어도 새록새록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책, '서재 결혼시키기'에 보면 앤 페디먼은 남편과 서로 책을 읽어준다고 했다. 굳이 그리스 시대 작품이 아니더라도 무릎 베개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듣는건 어떤 기분일지 자못 궁금했다. 내 팔자엔 책 읽는 남자가 없는지, 있더라도 무릎이 시원찮은 양반들 뿐이었던지 살짝 로망인 '책 읽어주는 남자'는 나와 그다지 맞지 않는 코드 같았다.

 운명은 개척하는 자의 것이라는 시원찮은 구호 때문이었을리가 없다. 그냥 어쩌다 그랬달까. A가 집에 놀러왔고, 책장엔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연한 파랑색의 책을 골라들었다. 탄탄한 그의 무릎을 베고 A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허스키한데다 잠긴 목소리의 A가 한글 처음 떼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책을 읽는데, 맙소사 되게 야한거다. 내가 아무리 읽어도 야한 구석은 하나도 없고 발에 대한 잡학상식이 다인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놀랍게도 낭독을 통해 그 책은 아주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내용으로 가득찬 책이 되고 말았다.

  결국, A가 그만 읽는다고 떼를 쓰기 전까지 몸이 배배 꼬이는걸 꾹 참았다.

 그 후로 책 읽기는 기운이 쏙 빠지는 저녁 무렵이면 (부끄러운 단어같지만) '족욕'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같은 게 되었다. 누군가 읽어주면 더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혼자여도 충분한게 아니라, 혼자라면 좀 더 색다르게 놀자 정도?

 촛불을 켜놓고 B에게 책을 읽어준건 물에서 꼼지락대고 싶은 발가락들이 간질거려선 아니었다. B가 나를 똑똑하고, 예쁘게 보는 바람에 (왜? 나도 몰러), 그래서 자꾸 똑똑하거나 예쁜 짓들을 하려고 의욕한 부작용이랄까. 잠긴데다 코맹맹한 소리로 그즈음 읽고 있던 소설을 읽어줬다. B는 오글거리는 손을 어쩔줄 몰라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러게 왜 자꾸 칭찬을 해서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드냐는 눈짓엔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큭큭거리는 B의 웃음 소리를 배경으로 한참동안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B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 정말 끝내준다며, 이 부분은 훨씬 재미있는데 한번 들어보겠냐며 책을 읽어준다. 나중엔 둘 다 읽어보지 않은 책을 번갈아가며 같이 읽고 싶다. 미친 노동 시간과 쥐꼬리만한 월급에 그럴 여유가 날지 모르겠고, 아직은 책읽기보다 둘이서 할 수 있는 더 재미난 일들이 많지만.(뭔데?)

 장정일은 '생각'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책 읽는 대신 바깥으로 나가 수영을 하고, 사람들이랑 노는게 훨씬 괜찮은 일이라고. 책 좀 읽는다고 책 안 읽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보다(예쁜 여자들 보고 머리가 비었다느니, 책은 읽었냐고 묻는 얘기들과 관련해서) 직접 노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보니 나는 책 읽어주는 남자도 좋지만 같이 손 잡고 산책하고, 자전거 타고 골목길 돌아다니다 동네 슈퍼 들러 따뜻한 두유를 사주는 남자가 더 좋다. 남자로 치면 추운 날 따뜻한 손으로 '봄날의 곰'처럼 부벼오는 이가 좋다. 좋은 책이 있다고 읽어보라고 권해주는 친구도 좋지만, 같이 만나서 맛난거 해먹으며 간이 맞네, 대접이 이게 뭡니까라며 따지고 수다 떠는 친구가 더 좋다. 내가 좋아할만한 책을 선물하는 사람도 좋지만, 다정한 문자를 보내거나 술 한잔 마시자며 (한잔만?) 들이대는 사람도 좋다. 뭐 요새는 '더 좋은 것'은 물론이고 책 권해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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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2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뭔 러브스토리가 이렇게 예쁜 건데여~
남편 있는...그래서 남자 없는 여자 서러워서 샘나서 살겠냐고.고.고~^^

Arch 2010-10-30 10:47   좋아요 0 | URL
투정부린건데, 같이 술 좀 먹자고 부딪혀오는 사람이 있었음 좋겠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다른 사람한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 고마워요^^

다락방 2010-10-3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는거에요, 아치.
심지어 책을 읽어주는 남자라니. 배아파 죽을 것 같아요. 책을 읽어준다니!
전 아빠가 책 읽어준적도 없는데, 남동생이 읽어준 적도 없는데.

연애를 많이 하면 괜찮을 남자를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지는건가요, 응? 뭔가 질펀하게 수다를 떨 작정으로 댓글을 썼는데, 어떻게 된게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책 읽어주는 남자 하나 없나 싶어서 의기소침해졌어요. 히융.

따뜻한 두유를 사주는 남자도 좋고, 책을 읽어주는 남자도 좋고, 책을 선물해주는 남자도 좋고, 다 좋은데요
그래도 난 ,

에잇, 몰라요 그만 쓸래요.
잘자요, 아치.

Arch 2010-10-30 10:46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말한 배 나온 남자? 요새 날 추운데 혼자 뛰어다녀요. 제가 천명훈남 배를 만져봤는데 아주 단단했다고 한 뒤로 더 화르르 크~

다락방이 먼저 읽어줘요. 배배 꼬이고, 쑥쓰럽고 오글거려도 꾹 참고.

내가 다음에 다락방님한테 아주 따뜻한 두유를 사줄게요.

다락방 2010-10-30 14:05   좋아요 0 | URL
천명훈남의 배도 만져보다니! 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거에요, 아치!

Arch 2010-10-30 17:02   좋아요 0 | URL
쭈구리처럼 살아요. 배 만진건 그냥 술 먹다보니, 만져놓고 무안하고 그랬어요

비로그인 2010-10-30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히히 대면서 오뎅 먹던거나, 걸음 걸이 맞춰 걷던 거, 응? 그래! 하고 감탄해주던거.. 핑퐁처럼 주고 받고 같이 웃고, 같이 느끼고 했던 것이 더 기억에 끈적하게 묻어나는 것은 아닐지.. 하고 아주 잠깐. 생각해 보고 갑니다.

그나저나 아치님 취업하신 것 같은데. 잘 되신거라 믿고 화이팅 외쳐봅니다!!~:D

Arch 2010-11-03 18:0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은 저보다 훨씬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화이팅!
 

 양철나무꾼님 덕분에 문학동네 이벤트를 하는걸 알고 있었지만, 책에 대해, 특히 소설은 더 몰라서 맘을 접었다. 헌데, 오늘 시간이 무척 남는데다 옆에서 김병만 닮은 동료가 자고 있고, 그가 뿌린 파스 냄새가 사무실에 가득해 도취할 만한 일을 찾다(헉헉.. 무슨 이유가 이리 길어!) 장바구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 배불러라. 얼마만에 장바구니를 채우는건가.

 요즘 읽고 있는 장정일의 신간, 빌린책/산책/버린책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많이 발견했다. 장정일이 장엄한 결론이라고 말했던 아마존 인류학 보고서<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라던가 양식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돈가스의 탄생>, 창녀란 문구가 들어간 책을 통해 본 노년에 대한 감동적 정의란 서평에 나온 책, 일본 공산당 당원수를 급격하게 늘린 <게공선>, 더 리더에서 문맹을 다룬 부분과 연관된 <유니스의 비밀>까지. 우선 그 중에서 제일 읽고 싶은건 

 
 <돈가스의 탄생>이다. 가볍지만 계속 가볍지만 않을 것 같은 책.

 
돈가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메이지유신이 불러온 '요리유신(요리혁명)'의 상징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1,200년간 유지되어온 육식 금기가 천황에 의해 깨지고, 빵과 같은 서양 음식이 일본에 도입된다. 서민들 사이에 남아있던 육식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문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카레라이스, 고로케, 단팥빵과 같은 음식들이 등장하게 된다. (알라딘 책 소개 중)

 
필터님이 리뷰에서 인용한 구절도 재미 있다.

 서양요리를 먹으러 온 손님들은 나이프와 포크로 입안을 찔러 피투성이가 되는 악전고투를 벌이곤 했다. 고기조각을 나이프로 찍어서 함께 입안에 넣고 씹다가 빼는 바람에 입술을 베어 피를 보는 일도 있었다. 또 수프를 마시는 법도 몰라서 접시를 들고 된장국 마시듯 들이켰다가 가슴에서 무릎까지 온통 뜨거운 수프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책 속에서)

그리고 언제든 기회만 되면 꼭 보리라 생각한 최규석의 책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진심의 탐닉>에서 최규석 인터뷰의 말미에 김혜리가 그의 홈페이지 글들의 단정한 문장 얘기를 했다. 꼼꼼히 잘 씹은 생각들이 간결한 문장으로 나오는건 당연한 얘기.
 여전히 <습지생태보고서>의 몇몇 구절들은 반짝인다. '재미가 없는건 작가가 게으르기 때문이'지만 재미있기만 하고 의미가 없는 것 역시 작가의 게으름 탓이라면 그야말로 부지런한 작가가 아닐까.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면 이 작가가 작품 초기부터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본 <4000원 인생>의 일러스트는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래서 이번 신간을 꼭 보고 싶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나왔다는 소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소설을 읽을만한 시간이 부족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만큼 멋쩍은 거짓말은 없는데)게다가 그동안 은유보다는 직유가, 상징보다는 논리적인게 더 와닿아서 가벼운 단편소설 말고는 읽고 싶은 책도 없었다. 이번 이벤트를 통해 표지가 무척 인상적인 문학전집들을 일별하면서 이 중에 어떤걸 고를까 고민됐다. 댓글에도 남겼 듯이, 난 이 책들을 정말 모르니까.

 책소개를 하나씩 읽어내려가다가 이 책이 제일 맘에 남았다. 게다가 저 표지라니, 아찔하다.

 남편의 빈자리를 딸이 대신해줄 것을 기대하며 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간섭하는 어머니와, 그에 억눌려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보이며 욕망을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하는 딸 에리카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모녀의 비정상적인 관계 설정을 통해 어머니와 딸 혹은 여성 사이에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로 인해 에리카는 사디즘뿐 아니라 마조히즘 성향도 갖게 된다.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기 몸을 베는 행위를 통해 자해를 하는 권력자와 그 고통을 감수하는 순종적인 피지배자라는 두 가지 자아를 연출하며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드러낸다. 이런 에리카에게, 어느 날 제자인 대학생 클레머가 남성으로서 접근해오기 시작하는데… (알라딘 책소개 중)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란 물음으로 이어나가도 될 것 같은데 구판의 리뷰를 보다가 생각보다 책 읽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접하고 살짝 겁이 난다. 책을 읽고 <피아니스트>도 봐야겠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보다 영화가 좋았고, <밀양> 역시 영화가 좋았는데 이 책은 어떨까.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에 보면 <빈집>에서 억압된 여성의 구원이란 도식을 김기덕이 어떻게 영리하게 비켜갔는지 나온다. 이 책도 비슷한 상황인데 어떻게 전개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가장 사고 싶은 책 <사랑, 그 혼란스러운> 
  이름은 어렵지만 잘생긴 독일 작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이 책에는 <사랑을 믿는 이들을 위한 위험한 철학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사랑이란 감정을 뇌과학에서 진화생물학, 심리학, 철학에까지 이르도록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낭만의 위험성과 현대의 사랑, 정말 남자와 여자는 다를까에서 이상화된 사랑의 도식까지 밝히는건 물론이다. 이 책은 알게 모르게 사회화된 사랑이 아니라 과연 내가 믿는 감정은 어떤건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문자를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준다.

 그런데 아직 이 책을 갖고 있지 않다. 도서관에서 몇번을 빌려서 읽는 맛에 푹 빠진건 거짓말이고, 생각만큼 책 읽는 진도가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말 갖고 싶다.

 이렇게 네권해서 50,470원.

 독서의 계절이니까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그건 뭐, 이벤트 한다고 퇴근 시간 한참 지났는데 사무실에 앉아 페이퍼를 쓰는걸 이벤트 당선자 선정하는 분이 알아야 인정받고 그러는거지. (<---얘, 은근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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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1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사랑, 그 혼란스러운』 을 가지고는 있지만 읽다가 포기한 상태에요. ㅎㅎ

Arch 2010-10-20 10:51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전 정말 재미있는데... 다락방이 지난번에 인용한 구절 이제야 봤는데요, 아아 그렇구나 싶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확 받아들이게 되고 그래요.

양철나무꾼 2010-10-20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다행이네요~
전 두권 읽었어요.
왠지 반은 눈 높이를 맞출 수 있을 듯 하여...^^

Arch 2010-10-20 10:53   좋아요 0 | URL
헤헤, 이게 다 양철나무꾼님 덕인걸요.

Forgettable. 2010-10-20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피아노치는 여자.. 힘드실텐데?!!! ㅋㅋ 전 다 읽었지롱요~
처음엔 엄청 힘들지만 한 2/3를 힘겹게 읽으시면 그 나머지는 훌훌 읽히더라구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 자체도 엄청 특이해서 -_- 열심히 읽다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될거에요.

전 감독때문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기 전부터도 영화 보려고 했었지만 책 읽고 나서는 왠지 보고 싶지 않아져서 결국 안봤어요. -0- 앞으로도 안볼거에요.

2010-10-20 12:16   좋아요 0 | URL
음. 이 책을 먼저 읽으면 영화는 안 보고 싶어질 것 같아요. 영화를 먼저 본 저는, 책에 좀 끌리는군요. 그렇지만 2/3를 힘겹게 읽어야 한다니...^^; 영화는, 좋지만, 힘겨웠어요. 근데 생각이 가끔 나는, 뒤끝 있는 영화였어요.^^

Forgettable. 2010-10-20 10:08   좋아요 0 | URL
전 책의 내용이 영상으로 펼쳐진다는 걸 상상하니 정말.. 안땡기더라구요. 하하

원래 보기 힘든 영화가 나중에 계속 생각나죠. 그래서 미카엘 하네케랑 라스 폰 트리에 (친구랑 이 감독 얘기하는데 라즈 봉 트리얼 이라고 발음하더라고요. 그렇게 발음하는 걸까요?) 감독들을 제가 좋아하는데.. 나이들수록 볼 용기가 점점 사라져가요. ㅎㅎㅎ

Arch 2010-10-20 10:57   좋아요 0 | URL
겁주기는! 그렇지만 벌써 기대되잖아요. 이건 뭐, 이벤트에 당첨되고 나서 일이지만.

nada 2010-10-2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저도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전 뭔가 쎄빠지게 고생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해요.
취직하셨군요, 아치님!
업무 시간에 글이 더 잘 써지지 않아요?ㅎㅎ
아치님 글 자주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기대기대.^^

Arch 2010-10-20 11:48   좋아요 0 | URL
정말 결론이 장엄한가요? 아, 책값이 너무 비싸요.

그럼요, 업무ㅜ 시간은 따로 작정 안 해도 창작 욕구가 (응?) 솟아요^^
꽃양배추님이야말로 팬들을 위해 글을 좀 써주셔요.
 

 
 일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밖에 옥찌들을 못본다. 옥찌들은 잔소리쟁이 이모가 없으니 신나겠지만 엄마랑 동생은 옥찌들이 말을 안 듣는다며 난리다. 며칠 전 집에 갔을 때였다. 짐을 풀기도 전에 엄마가 옥찌들의 죄상(?)을 털어놓았다. 동생은 옥찌들이 늦게까지 논다며, 나쁜 말을 한다며 고해 바쳤다. 그래서였을까. 잘 지냈냐는 말 한마디 없이 옷 정리 잘 해놓으라고, 이를 제대로 닦으라고, 그림 일기 안 쓴거 쓰라며 옥찌에게 잔소리만 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 끼고선 공부 시키고, 지적인 자극인가 뭔가 준다는데 애들을 너무 놀게 하는건 아닐까. 자기가 해야할 일 하나 제대로 안 하면서 뭘 하겠다는건지. 그런데 이건 내가 늘 나 자신에게 했던 말 아닌가. 결국 나는 나란 거울을 통해 아이들을 보는데 내가 옥찌들보다 어질렀으면 더 어질렀지 깔끔한 편은 아닌데다 나 역시 내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데 고작 8살짜리 꼬마에게 책임감을 가지라는 꼴이었다.

 옥찌는 처음 몇 번 살갑게 굴더니 잔소리에 지쳤는지 금세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또 마뜩치 않다고, 왜 인상쓰냐고, 인상쓰다가 우는거냐고 몰아세웠다. 울음이 많은 지희가 나약한건 아닐까, 우는 것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건 아닐까.(아이를 성인 대하듯이 하고 있다.) 

 그러다 울음을 참아서 목 언저리가 너무 아프다는 옥찌를 보고서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오랜만에 이모 봐서 반가웠는데 이모가 잔소리만 했네.' 어쩌고 저쩌고 '이제 이모 안 와야겠다'에서 더 소리내어 우는 지희를 어쩌지 못하고 꼭 껴안아줬다. 품 안에 꼭 들어온 몸이 많이 야위웠다. 봐서 좋지만, 잔소리만 하는 이모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우리 지희. 지희 기분을 풀어준다며 우스꽝스러운 사람들 얘기도 해주고, 내가 요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얘기해줬다. 그래도 힝힝하길래 내 방으로 데려가 촛불을 켜놓고, 꼬마 니콜라를 읽어줬다. 이름도 어려운 녀석들이 나와서 카우보이 놀이를 하는걸 열심히 읽다보니 지희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큰 이모, 엄마에게 내일 간다는걸 들었어요.
신종플류가 아직도 유행이래. 그래서 손 깨끗이 씻어야되. 나도 이모에게 전화도 하고 동생과 사이좋게 놀게. 
3년 동안 동생과 사이좋게 못놀았지만 사이좋게 놀게. oo에 도착하면 전화해야돼. 그리고 사랑해. 

 이모께, 지희 올림

 이 나이 먹도록 잘하는거, 잘한거 뭐 하나 있었을까 싶었는데, 옥찌 이모된거 하나는 참 잘 한 것 같다. 그럼 잘 해야할텐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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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19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효, 자식 키우는 마음이 바로 그런거라니까요, 마지막 두줄이요.
오랜만에 지희 소식 반가와요. 그런데 지민이는요? 지민이 얘기도 곧 올려주세요 (이거 완전 명령조네요 ^^).

Arch 2010-10-20 10:5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 지민이, 지민이... 그러니까요. 지민이 얘기도 해야하는데, 우선 우리 둘 관계 회복을 좀 하고 해야할 것 같아요.

순오기 2010-10-2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모만큼 만만하고 좋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이 이모일거라고 생각해요~~~~ 옥찌 이모된 거 정말 잘한 일 맞아요!^^

Arch 2010-10-20 11:0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만만한 이모가 돼야하는데 이건 뭐, 꼬장꼬장한 이모라. 잘한 일 맞긴 하는데...

쟈니 2010-10-26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귀엽군요.. 저도 조카가 한 명 있는데, 아직 아기라서 말은 못해요. 그 녀석에게서 '이모' 소리 들으면 아마도, 기분이 날아가겠죠? 귀여운 조카 소식 또 기다릴께요~

Arch 2010-10-26 17:45   좋아요 0 | URL
히~ 쟈니님이 응원해주시니 힘이 나는데요. 조카가 얼른 커서 쟈니님한테 '이모'라고 했음 좋겠어요.
 

* 동료랑 잘 지내기

  내 사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동료인 것도 아니다. 직급은 같은데 근무 연수는 한참이나 더 되는 사람과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나는 내 영역에 대해 잘 모르면서 아는체 하는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 사람 역시 뭔가 마뜩치 않은지 나한테 인상 쓰며 얘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 책에선 <또라이 제로 조직>의 서평이 나오는데 비열한 폭군에 당한 사례가 나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수면 장애, 불안, 무기력증, 만성피로, 신경과민, 화, 우울증" 새로 시작한 일이 즐겁지 않았다.
 일을 배우는건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람과 잘 지내야겠다는 강박이 진득하게 붙어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이 사람을 바라봤다. 가끔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일을 할 때 제대로 하려다보니 다른 상대에게 과한 말을 하기도 한다. 나서거나 남 참견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나한테만 이러는게 아닐지도.
 이 사람은 왜 자꾸 나한테 잔소리를 할까.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그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나저나 나는 왜 옥찌들한테 잔소리를 하는걸까. 내 할 일이 늘어나는데다 아이들이 잘 하지 못할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옥찌들이랑 오랫 동안 지내온 나도 이런데 이 사람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어리버리한 짓이 얼마나 못미덥겠어. 머릿 속에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며칠 전 그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기존에 했던 사람과 비교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상사도 아닌데!) 발끈했지만 화를 억누르고 불만조가 아니라 우리 잘 해보면 어떨까란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얘기를 건넸다. 그는 내가 정확하게 어느 지점을 말하는지 잘 이해한 것 같진 않았다. 서로 싸워서 겉잡을 수 없을까 겁나긴 했지만 다행히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다. 회식을 하면서도 그가 여전히 미웠지만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리고 어제 출근해선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일과를 보내며 그를 알아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어느 순간 맘이 풀렸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내가 못미더워 잔소리를 하고, 나는 가끔 빈정 상해서 톡톡 쏴대긴 하지만 전처럼 어느 순간 폭발할지 모를 긴장감은 사라졌다. 꼭 계기가 있거나 오해가 풀려서가 아니라 낯선 상대를 향해 본능적으로 적의를 갖던 시기를 지난걸까. 직장에선 원래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잘 지내는가보다 싶을 뿐.

* 접대

 접대를 받는 자리에 끼어서 비싼 밥을 얻어먹었다. 소주잔을 겹쳐 폭탄주의 소주양을 정확하게 계량하는 것을 배우고, 사람들이 서로 어색하면 어떤 짓까지(갑자기 방 한켠에 있는 싸구려 유화의 작품 감상을 하고 앉았다) 할 수 있는지를 봤다. 누구의 딸이 어떻게 성장하고, 지금은 뭘 하고 있으며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다. 아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와서 악마같이 '대체 아들은?'이란 질문을 하고 싶어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옆자리에 앉은, 단지 파마를 해서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는 사람이 살아있는 세발 낙지를 먹고선 정신을 못차리길래 챙겨주고, 코가 빨간 누군가의 얼굴은 실핏줄 때문인지 피지를 짜내서인지에 대해 고찰을 하기도 했다.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털이 삐져나온 사람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한번 부벼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또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러니까, 무척 심심했다는거다.

 그때 난 무엇이든 적고 싶었다. 윗사람이 없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안 쓰는 사람들과 있었다면 몇백번이고 했을 메모를 하고 싶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이 맛은 어떤건지 등등. 쓸 수 없어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들을 기록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 당시에 적은 것들이라고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생생한 것도 아닐텐데 몹시 아쉬웠던건, 밥 한끼에 혹해서 하품을 참고 있는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가 필요했던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매생이국은 시원했다. 밤고구마는 달콤했고, 야채 샐러드는 상큼했다. 그럼 됐지, 뭐.

* 회식

 공식 회식은 아니었다. 누군가 쏘는건데 시간되면 같이 가자고 했다. 규모가 거했다. 삼겹살인데 비싼 술을 먹고, 엄청 먹어댄다. 나야 찌개 하나 시켜먹고, 마늘 구워먹는게 다였지만, 정말들 엄청 먹었다. 허허 웃던 누군가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주문하는걸 보면서 얼굴색이 점점 흑빛이 되어가더니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측근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들 못먹으면 알아서 하란 눈짓을 보냈지만 다들 문제없다는 식이었다. 불판에 붙은 마늘 찌꺼기까지 다 긁어먹었으니까.

 회식이라고 재미있었던건 아니었다. 폭탄주는 거품이 있어야 비리지 않다며 내가 젓가락으로 거품을 내자, 술꾼이라며 괜히 추켜세우는걸 시작으로 말끝마다 참견을 해대는 어디가나 있는 참견맨, 살을 빼야한다며 술 한잔 입에 대지 않는 새침남, 뾰루지 때문에 코가 빨개져 좀 귀엽던 누구누구.

 회식이 끝나고 대체 왜들 그랬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술을 먹으면 손버릇이 안 좋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해온 손버릇에 대한 응징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일인당 몇만원씩 먹는것으론 좀 약했다. 내가 알았다면 2차, 3차까지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며 술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자신의 직업적인 것까지 위험할 정도로 했을거란 다짐을 해보지만, 글쎄, 난 이 정도도 못했을 것 같다. 나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넘겨버리고 말았으니까.

* 일

  전문적인 것도 아니고, 화려한 역할을 맡지도 않는다. 다만 보조해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시설 관리,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오퍼레이터. 혹은...
 이 일을 시작한건 우연이었다. 그렇지만 잘하고 싶다. (맨날 잘하고 싶댄다.) 아마 오늘처럼 시간 날 때마다 페이퍼질을 하는걸로 잘하고 있다란 만족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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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 2시의 고춧잎처럼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2-08-01 11:40 
    오랜만에 z를 만났다. 예전에 우린 둘 다 직설적이고 센스는 국에 넣으려고해도 넣을 수 없는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z는 정말 싫은 사람과도 의례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만큼 사회성 근육을 키운 직장인 7년차.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못하는 직장생활을 한지 가까스로 2년이 다 돼간다. 나로 말하자면 조금씩 쌓여가던 사회성 마일리지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리기 일쑤니 말 다했다. 게다가 z는 경제적인 여유에서
 
 
2010-10-19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0-1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닮은 그에게(응?)정신을 챙겨주었군요. ㅎㅎ 세발낙지를 챙겨준게 아니라 ㅋㅋ

Arch 2010-10-19 14:45   좋아요 0 | URL
^^ 그걸 알아봤군요. 다락방은!

세발낙지를 먹는 장면은 정말 징그러웠어요. 살겠다고 움직이는 낙지를 젓가락으로 돌돌말아 먹는데, 욱

다락방 2010-10-19 15:01   좋아요 0 | URL
혹시 그의 얘기가 나오나 싶어 완전 눈을 부라리고 봤어요. ㅎㅎ

직장 생활하느라 아치가 요즘 고생이 많네요. 안그래도 아까 잘 지내고 있는지 문자 하나 넣으려던 참이었는데 페이퍼 떴어요. :)

Arch 2010-10-19 15:04   좋아요 0 | URL
'눈을 부라리고'라는 표현 좋아요. 그의 얘기를 많이 하도록 할게요. 다락방 좋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