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료랑 잘 지내기

  내 사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동료인 것도 아니다. 직급은 같은데 근무 연수는 한참이나 더 되는 사람과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나는 내 영역에 대해 잘 모르면서 아는체 하는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 사람 역시 뭔가 마뜩치 않은지 나한테 인상 쓰며 얘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 책에선 <또라이 제로 조직>의 서평이 나오는데 비열한 폭군에 당한 사례가 나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수면 장애, 불안, 무기력증, 만성피로, 신경과민, 화, 우울증" 새로 시작한 일이 즐겁지 않았다.
 일을 배우는건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람과 잘 지내야겠다는 강박이 진득하게 붙어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이 사람을 바라봤다. 가끔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일을 할 때 제대로 하려다보니 다른 상대에게 과한 말을 하기도 한다. 나서거나 남 참견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나한테만 이러는게 아닐지도.
 이 사람은 왜 자꾸 나한테 잔소리를 할까.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그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나저나 나는 왜 옥찌들한테 잔소리를 하는걸까. 내 할 일이 늘어나는데다 아이들이 잘 하지 못할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옥찌들이랑 오랫 동안 지내온 나도 이런데 이 사람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어리버리한 짓이 얼마나 못미덥겠어. 머릿 속에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며칠 전 그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기존에 했던 사람과 비교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상사도 아닌데!) 발끈했지만 화를 억누르고 불만조가 아니라 우리 잘 해보면 어떨까란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얘기를 건넸다. 그는 내가 정확하게 어느 지점을 말하는지 잘 이해한 것 같진 않았다. 서로 싸워서 겉잡을 수 없을까 겁나긴 했지만 다행히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다. 회식을 하면서도 그가 여전히 미웠지만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리고 어제 출근해선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일과를 보내며 그를 알아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어느 순간 맘이 풀렸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내가 못미더워 잔소리를 하고, 나는 가끔 빈정 상해서 톡톡 쏴대긴 하지만 전처럼 어느 순간 폭발할지 모를 긴장감은 사라졌다. 꼭 계기가 있거나 오해가 풀려서가 아니라 낯선 상대를 향해 본능적으로 적의를 갖던 시기를 지난걸까. 직장에선 원래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잘 지내는가보다 싶을 뿐.

* 접대

 접대를 받는 자리에 끼어서 비싼 밥을 얻어먹었다. 소주잔을 겹쳐 폭탄주의 소주양을 정확하게 계량하는 것을 배우고, 사람들이 서로 어색하면 어떤 짓까지(갑자기 방 한켠에 있는 싸구려 유화의 작품 감상을 하고 앉았다) 할 수 있는지를 봤다. 누구의 딸이 어떻게 성장하고, 지금은 뭘 하고 있으며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다. 아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와서 악마같이 '대체 아들은?'이란 질문을 하고 싶어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옆자리에 앉은, 단지 파마를 해서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는 사람이 살아있는 세발 낙지를 먹고선 정신을 못차리길래 챙겨주고, 코가 빨간 누군가의 얼굴은 실핏줄 때문인지 피지를 짜내서인지에 대해 고찰을 하기도 했다.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털이 삐져나온 사람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한번 부벼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또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러니까, 무척 심심했다는거다.

 그때 난 무엇이든 적고 싶었다. 윗사람이 없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안 쓰는 사람들과 있었다면 몇백번이고 했을 메모를 하고 싶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이 맛은 어떤건지 등등. 쓸 수 없어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들을 기록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 당시에 적은 것들이라고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생생한 것도 아닐텐데 몹시 아쉬웠던건, 밥 한끼에 혹해서 하품을 참고 있는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가 필요했던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매생이국은 시원했다. 밤고구마는 달콤했고, 야채 샐러드는 상큼했다. 그럼 됐지, 뭐.

* 회식

 공식 회식은 아니었다. 누군가 쏘는건데 시간되면 같이 가자고 했다. 규모가 거했다. 삼겹살인데 비싼 술을 먹고, 엄청 먹어댄다. 나야 찌개 하나 시켜먹고, 마늘 구워먹는게 다였지만, 정말들 엄청 먹었다. 허허 웃던 누군가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주문하는걸 보면서 얼굴색이 점점 흑빛이 되어가더니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측근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들 못먹으면 알아서 하란 눈짓을 보냈지만 다들 문제없다는 식이었다. 불판에 붙은 마늘 찌꺼기까지 다 긁어먹었으니까.

 회식이라고 재미있었던건 아니었다. 폭탄주는 거품이 있어야 비리지 않다며 내가 젓가락으로 거품을 내자, 술꾼이라며 괜히 추켜세우는걸 시작으로 말끝마다 참견을 해대는 어디가나 있는 참견맨, 살을 빼야한다며 술 한잔 입에 대지 않는 새침남, 뾰루지 때문에 코가 빨개져 좀 귀엽던 누구누구.

 회식이 끝나고 대체 왜들 그랬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술을 먹으면 손버릇이 안 좋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해온 손버릇에 대한 응징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일인당 몇만원씩 먹는것으론 좀 약했다. 내가 알았다면 2차, 3차까지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며 술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자신의 직업적인 것까지 위험할 정도로 했을거란 다짐을 해보지만, 글쎄, 난 이 정도도 못했을 것 같다. 나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넘겨버리고 말았으니까.

* 일

  전문적인 것도 아니고, 화려한 역할을 맡지도 않는다. 다만 보조해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시설 관리,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오퍼레이터. 혹은...
 이 일을 시작한건 우연이었다. 그렇지만 잘하고 싶다. (맨날 잘하고 싶댄다.) 아마 오늘처럼 시간 날 때마다 페이퍼질을 하는걸로 잘하고 있다란 만족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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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 2시의 고춧잎처럼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2-08-01 11:40 
    오랜만에 z를 만났다. 예전에 우린 둘 다 직설적이고 센스는 국에 넣으려고해도 넣을 수 없는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z는 정말 싫은 사람과도 의례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만큼 사회성 근육을 키운 직장인 7년차.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못하는 직장생활을 한지 가까스로 2년이 다 돼간다. 나로 말하자면 조금씩 쌓여가던 사회성 마일리지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리기 일쑤니 말 다했다. 게다가 z는 경제적인 여유에서
 
 
2010-10-19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0-1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닮은 그에게(응?)정신을 챙겨주었군요. ㅎㅎ 세발낙지를 챙겨준게 아니라 ㅋㅋ

Arch 2010-10-19 14:45   좋아요 0 | URL
^^ 그걸 알아봤군요. 다락방은!

세발낙지를 먹는 장면은 정말 징그러웠어요. 살겠다고 움직이는 낙지를 젓가락으로 돌돌말아 먹는데, 욱

다락방 2010-10-19 15:01   좋아요 0 | URL
혹시 그의 얘기가 나오나 싶어 완전 눈을 부라리고 봤어요. ㅎㅎ

직장 생활하느라 아치가 요즘 고생이 많네요. 안그래도 아까 잘 지내고 있는지 문자 하나 넣으려던 참이었는데 페이퍼 떴어요. :)

Arch 2010-10-19 15:04   좋아요 0 | URL
'눈을 부라리고'라는 표현 좋아요. 그의 얘기를 많이 하도록 할게요. 다락방 좋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