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메뉴얼




  오랜만에 z를 만났다. 예전에 우린 둘 다 직설적이고 센스는 국에 넣으려고해도 넣을 수 없는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z는 정말 싫은 사람과도 의례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만큼 사회성 근육을 키운 직장인 7년차.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못하는 직장생활을 한지 가까스로 2년이 다 돼간다. 나로 말하자면 조금씩 쌓여가던 사회성 마일리지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리기 일쑤니 말 다했다. 게다가 z는 경제적인 여유에서 나오는 느긋함까지 솔솔 풍기니 정말 어른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의 면면을 z눈을 통해 낯설게 봤다. 생경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인생이 빛나려다 다시 어지럽혀진 책상과 벽에 걸린 사진, 조카들의 간식 취향을 알 수 있는 오디오(오디오 스피커가 얼룩져서)와 새까만 까미까지. z는 그동안 여행한 곳과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z가 말하는 삶을 나도 꿈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은 커녕 저녁 시간을 뺄 여유조차 없다. 지구에 노임팩트하고 싶으니 비행기 타는건 좀 그렇다며 여행가서 내가 보고 듣는게 얼마나 되겠냐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이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친구를 사귄다. 내가 여행을 정말 가고 싶은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간절하게 바랐던 도시를 여행한 z가 사정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며칠 전에는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데도 생활 면면이 블링블링한 블로거의 글과 사진을 봤다. 저렇게 예쁘게 꾸미려면 이것저것 많이 사야할텐데 그럼 임팩트 아냐,란 생각은 잠시. 저런 센스, 저런 부지런함, 저럼 의욕과 그 모든걸 가졌으면서도 사실 별거 아니란 태도까지. 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일까. EBS에서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존감 따위가 희박한 나로선 바람부는대로 우왕좌왕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탄을 늘어놓고 다니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그런데도 난 아직 뭔가 뿅하고 바뀌기를, 지금과 다른 인생이 펼쳐지길 바란다. 구체적으로 뭔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지금만 아니면 될 것 같은 바람. 아, 지질지질 아치. 게다가 난 점점 꼰대가 되고 있다. 며칠 전 봉사활동 온 친구들이 열심히 안 하니까 너네 학교 사람 안다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 앞에서 나는 실소했다. 헌데 그 아이들이 아주 본격적으로 까불대니까 나 역시 나이 좀 먹은 어른처럼 굴었다. 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안철수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프로를 봤다. 설레거나 가슴이 뜨거워지기보다는 원래 그래야되는거 아닌가 싶었다. 원래 그렇지 않은게 이상한건데 원래 그렇지 않은 일들이 왕왕 일어나니 원래 그랬던게 신선한거다. 신선한 이야기 중에 돈을 좇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돈이 생기는게 아닐까란 이야기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직장 다니기 싫지만 월급 보고 다닌다며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는 것도, 직무에 충실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생각났다. 안철수 말대로라면 돈 벌려고 값싼 재료를 넣어 마진 많이 남기는 음식을 만드는 것과 다를바 없이 살고 있었던거다. 신선한 재료로 정성을 듬뿍 담아 조리한 음식이 최고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삶이, 그럴 듯하지 않더라도 의욕이 넘치거나 그저  제대로 살고 있는 삶이 미치도록 부러울수밖에.


 본사에 들러붙어 밥을 먹긴 하는데 딱히 할말은 없는 아까 그 사람이 본사직원에게 빈말드립을 친다. 대답이 영 신통치 않으니 걸음이 빨라진다. 나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진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의례적인 관계의 역동적인 드립력에 빵 터졌는데. 그동안은 왜 그렇게 진저리를 치고 여봐란 듯 위악을 부려댔을까. 일 역시 할 수 있는데까지,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자는건 자기개발 문구이고......회피하고 나는 돈만 벌 뿐이야가 아니라 처음의 절박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겠다. 일이든 생활이든 옥찌들과 같이 지내는 부분이든. 


 오전에 봉사하러온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TNT폭탄으로 광물을 캐는 스마트폰 게임을 구경했다. 이건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모처럼 창의력 돋는거 아닐까 싶은 일 계획도 세웠다. 의례적인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진실을 알 때까지 툭툭 던지는 말을 해대는건 모자라보인다고 생각하니 한결 맘이 편해졌다. 알고 있었고 예전에도 다짐했지만 말이다. 며칠 이러다 말까, 아니면 정말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어쨌든






아치, 의지를 보여줘~ 그런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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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2012-08-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바퀴 돌듯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진짜 여행이 간절해지죠. 어디든 여기가 아니라면! 돈 벌기는 어렵고 쓰기는 이렇게 쉬운데. 나의 생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 같아요. 흑흑.

Arch 2012-08-03 09:48   좋아요 0 | URL
전 돈 쓰기도 좀 어려워요. 돈 쓰고 후회 안 하기도 어렵고. 선택지는 많은데 만족할만한 것은 없고 저게 꼭 필요할까에서 망설여지죠. 생기, 생기. 팔딱거리는게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