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사랑스럽고 자꾸 읽어도 새록새록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책, '서재 결혼시키기'에 보면 앤 페디먼은 남편과 서로 책을 읽어준다고 했다. 굳이 그리스 시대 작품이 아니더라도 무릎 베개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듣는건 어떤 기분일지 자못 궁금했다. 내 팔자엔 책 읽는 남자가 없는지, 있더라도 무릎이 시원찮은 양반들 뿐이었던지 살짝 로망인 '책 읽어주는 남자'는 나와 그다지 맞지 않는 코드 같았다.
운명은 개척하는 자의 것이라는 시원찮은 구호 때문이었을리가 없다. 그냥 어쩌다 그랬달까. A가 집에 놀러왔고, 책장엔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연한 파랑색의 책을 골라들었다. 탄탄한 그의 무릎을 베고 A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허스키한데다 잠긴 목소리의 A가 한글 처음 떼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책을 읽는데, 맙소사 되게 야한거다. 내가 아무리 읽어도 야한 구석은 하나도 없고 발에 대한 잡학상식이 다인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놀랍게도 낭독을 통해 그 책은 아주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내용으로 가득찬 책이 되고 말았다.
결국, A가 그만 읽는다고 떼를 쓰기 전까지 몸이 배배 꼬이는걸 꾹 참았다.
그 후로 책 읽기는 기운이 쏙 빠지는 저녁 무렵이면 (부끄러운 단어같지만) '족욕'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같은 게 되었다. 누군가 읽어주면 더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혼자여도 충분한게 아니라, 혼자라면 좀 더 색다르게 놀자 정도?
촛불을 켜놓고 B에게 책을 읽어준건 물에서 꼼지락대고 싶은 발가락들이 간질거려선 아니었다. B가 나를 똑똑하고, 예쁘게 보는 바람에 (왜? 나도 몰러), 그래서 자꾸 똑똑하거나 예쁜 짓들을 하려고 의욕한 부작용이랄까. 잠긴데다 코맹맹한 소리로 그즈음 읽고 있던 소설을 읽어줬다. B는 오글거리는 손을 어쩔줄 몰라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러게 왜 자꾸 칭찬을 해서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드냐는 눈짓엔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큭큭거리는 B의 웃음 소리를 배경으로 한참동안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B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 정말 끝내준다며, 이 부분은 훨씬 재미있는데 한번 들어보겠냐며 책을 읽어준다. 나중엔 둘 다 읽어보지 않은 책을 번갈아가며 같이 읽고 싶다. 미친 노동 시간과 쥐꼬리만한 월급에 그럴 여유가 날지 모르겠고, 아직은 책읽기보다 둘이서 할 수 있는 더 재미난 일들이 많지만.(뭔데?)
장정일은 '생각'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책 읽는 대신 바깥으로 나가 수영을 하고, 사람들이랑 노는게 훨씬 괜찮은 일이라고. 책 좀 읽는다고 책 안 읽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보다(예쁜 여자들 보고 머리가 비었다느니, 책은 읽었냐고 묻는 얘기들과 관련해서) 직접 노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보니 나는 책 읽어주는 남자도 좋지만 같이 손 잡고 산책하고, 자전거 타고 골목길 돌아다니다 동네 슈퍼 들러 따뜻한 두유를 사주는 남자가 더 좋다. 남자로 치면 추운 날 따뜻한 손으로 '봄날의 곰'처럼 부벼오는 이가 좋다. 좋은 책이 있다고 읽어보라고 권해주는 친구도 좋지만, 같이 만나서 맛난거 해먹으며 간이 맞네, 대접이 이게 뭡니까라며 따지고 수다 떠는 친구가 더 좋다. 내가 좋아할만한 책을 선물하는 사람도 좋지만, 다정한 문자를 보내거나 술 한잔 마시자며 (한잔만?) 들이대는 사람도 좋다. 뭐 요새는 '더 좋은 것'은 물론이고 책 권해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