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퍼의 제목은 평론집답지 않은 멋진 표지와 제목과 소제목조차 시적으로 아름다웠던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이기호 수식어에서 따왔다. 나는 이 평론가의 글은 좋았지만 평론집에서 보여준 섬세한 필력과 날카로운 관찰력과 별개로 '진심의 탐닉'에서 인터뷰어 진 빠질 정도로 문학권력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방식은 맘에 안 들었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쟁점이나 사안에 대해서 일일이 발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신껏 발언을 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건 무리인걸까. 하긴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취향에 맞지 않은 발언 하나 가지고도 말들이 많은 세상이니 그 스스로 알아서 타협점을 찾은것이겠지만.
* 여성의 전화 인권강사 양성 과정 교육을 받을 때였다.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강사님이 강의를 여는 주제어로 성(性)을 들고 나왔다. '성'하면 무엇이 떠오르냐란 질문에 여러 가지 얘기들이 쏟아졌다. 섹스, 사랑, 은밀한 것, 성교육, 야하다 등등의 얘기가 나왔고 나도 뭔가 거들고 싶은 생각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뱉었다. 지금와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한 것은 '귀찮다'는 거였다.
* 원래 이 페이퍼에는 오르가즘은 계획은 커녕(아, 치니님! 저도 그 영화 정말 보고 싶어요) 내가 왜 섹스를 귀찮다고 했는지 밝히는 내용을 적으려 했다. 그런데 기존의 남성위주의 성관습을 답습한 생각과 소모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객관적인 데이터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은 채 털어놓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럼 지금까지 쓴 페이퍼는 뭐 안 그랬을까 싶다. 그걸 변명하자면 그래도 성차를 고정하는게 싫다고 했으니 생물학적 차이인지 관습 때문인지 모를 사안을 두고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건 아닌 것 같다 정도로 해둬야할까.
* 내가 사는 곳으로 옥찌들이 놀러 왔다. 잠시 쉬는 A가 옥찌들을 돌봐주고 있다. 옥찌와 A가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서 A가 이러네, 옥찌가 이러네 하면서 나한테 고자질을 하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문 소리만 들려도 아이들을 바퀴벌레가 숨는 것처럼 사사삭 소리나게 하는(이모에게 꼬투리 잡힐만한건 숨겨, 놀고 있는거 대충 정리해 뭐 이런 사사삭) 여자 어른이라 고자질이 먹히는줄 아나보다. A가 차려준 점심과 저녁을 맛나게 먹고 옥찌에게 자신이 아는 여자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날씬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나는 한가롭게 일을 하고 A는 맛있는걸 만들고, 아이들은 쑥쑥 크기만 하면 되는 삶. 이렇게 써놓고보니 아이들이 꼭 옥수수 같다.
* <거꾸로, 희망이다>를 읽고 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책에선 농촌이 답이고,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하긴 책을 읽다보면 별놈의 생각이 다 든다. 트럭을 한대 사서 커피를 팔까 아니면 초밥이랑 국수를 팔까, 부침개를 잘 만들고 막걸리를 좋아하니까 막걸리집을 하면 어떨까, 시골에서 된장을 담그는건. 지금 하는 일이 나쁘진 않은데 뭔가 생산적이고 신나는 일을 하고 싶다. 문제는 한번 망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크게 실패해본적도 없으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러고 앉아 있다.
* 다시 직장 동료들과의 문제로 L과 얘기를 나눴다. L이 말했다. 그 애들은 나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잉?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화장도 안 하는 여자라니. 나도 맘 먹으면 일을 잘 한다고 항변했더니 여자는 일 잘해도 동료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수긍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요즘 세상에 여자라고 어쩐다는게 가당키나 하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안 그런 것도 아닌지라 잠자코 있을 수 밖에. 감정적인 소모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들이 왜 화를 내는지, 나 때문인지, 나 때문이라면 뭘 잘못했는지 신경을 쓰느라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L은 미친년이 되거나 계속 그렇게 지내야한다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나도 내가 내키는대로 해버리라고. 화를 내면 같이 내고, 꼬투리를 잡아서 꼼짝도 못하게 하라고.
사회생활을 그렇게 전략적으로 하는건 더 피곤할거라고 했더니 내 문제니 나보고 알아서 하란다. 작전을 세울 수야 없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스눕>을 보니 난 분명 신경증적인 성격이던데, 그래서 이러나. 동조적인 사람들 덕분에 여태껏 별일 없이 지내온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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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와 <말하기의 다른 방법>을 읽으며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남들 돼지 먹을 때 옆에서 버섯이랑 눈사람 모양 떡을 구워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사진의 모호성에 대한 존 버거와 장 모르의 이야기는 내게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존 레논의 여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며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이야기도 결단력과 확신에 대한 부분에서 내 눈을 환하게 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의 건조한 문체와 무심함이 좋았다. 무심함이 '척'이거나 어떤 단계를 한번쯤 거쳐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포즈라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전전긍긍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지리멸렬 라이프와는 다른 어떤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드독의 TV살롱 중)
* 지금 이곳엔 나와 사무실 왕따 아저씨가 있다. 나는 콜드플레이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켜놓고 페이퍼를 쓴다. 사무실 왕따 아저씨는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더니 나보고 왜 안 자고 있냐고 큰소리를 친다. 그건 나를 생각해주는게 아니라고 나 역시 큰소리로 대꾸를 했다. 아저씨는 자신이 나를 생각하는 맘이 엄마와 같다며 수그러든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은행에서 가져왔다며 쭈굴쭈굴한 알사탕을 내 자리에 놓고 가는 아저씨. 분명 저 아저씨도 어딘가에선 존경받는 사람일텐데. 아이스 커피의 얼음이 다 녹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