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 말했다. 아치가 ‘이 일이 내 일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댄 게 이번 뿐은 아니라고. 나는 쪽 찢어진 눈을 홉뜨며 대드는 대신 수화기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참 축구할 때도 그랬냐, 서울에서 바람처럼 동서남북 돌아다닐 때도 그랬느냐, 모여서 공부하는게 좋다고 할 때도 그랬느냐며 따지는 대신 휴하고 긴 숨을 뱉어냈다. M의 말이 맞았으니까.

 어제는 C가 인심 한번 쓴다며 자기가 아는 분에게 나를 소개시켜줬다. 사주 공부를 한다는 그분께 순순히 생년월일을 대며 ‘전 뭘하면 좋을까요’라고 여쭤봤다.
- 전기 통신 쪽 일을 해야겠네.
- 네? 전 전기랑 통신을 안 좋아해요.
-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맞아요.
- 흠... 그럼 뭔가 만드는건요. 그러니까 글을 쓴다거나 이런건요? 아니면 국수 장사하는건요?
- ......
- 제 사주는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 안 좋은 사주는 없어요. 사주가 좀 약할 뿐이지 운이 맞으면 더 나아질 수 있어요. 다만 이 사주는 뒷심이 약해서 저지르되 뒷감당을 못하는 수가 생기니까 지금처럼 지내면 좋은 운이 생길거에요. 근데 주위에 남자가 많네.
- ......(남자 구경 좀 하고 싶어요.)
- 지분거리는 남자가 많아, 당신이 차분하니 현모양처 타입이야.
- 예? 현모양처 같은거 안 하고 싶은데요,
 C에게 쪼르르 가서 그랬노라고 하니 사주는 해석하기 나름이라 주변에 ‘아치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인 사람이 많은거라고 했다. 가만 보면 이 녀석도 똘똘하다.
 지적이고 자유로운 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는 별개로 난 고지식하고 잔걱정이 끊이지 않는 타입이다. 사주가 아니었어도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던거지.

 그 아저씨 생각도 난다. 아저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주유소와 석유공급업체 사이의 중간 도매업을 하게 됐다고 했다. 하다 보니 사람들 만나는 것도 즐겁고 그쪽 일이 꽤 재미있었단다. 그래서 열심히 하다가 괜찮은 승용차를 굴릴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고. 난 자꾸 물었다. 그럼 그림은요, 그림은 안 그리냐고, 그리지 못해서 후회하진 않냐고.

- 글쎄, 끝까지 그려봤음 좋았겠단 생각은 들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아요.

 
 밥을 먹고 장에서 사온 떡을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빵 같기도 하고, 떡 같기도 한 보리수 떡 속엔 달지도 밍밍하지도 않은 앙금이 들어있다. 난 문득 그런 앙금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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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2-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네요. 앙금. 어쩐지 입안에서 돌고 도는 느낌의 단어에요. 앙금. 앙~~그~~음 :)

Arch 2011-02-17 09:48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의 이름도 부들부들거리고 좋아요. 무우~~스탕

다락방 2011-02-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말이죠, 아치. [곰스크로 가는 기차] 책이 생각나는, 그런 페이퍼에요. 그 책 읽어보도록 해요, 아치.
그리고 주변에 남자가 많다니. 그게 '아치 좋아하는 남자' 가 아니라 설사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여도 나는 부럽기만한걸요. 제 주변에는 여자만 바글바글거려요. 아 진짜 이놈의 여자들은 왜이렇게 들러붙나 몰라요. ㅠㅠ

무스탕 2011-02-16 17:12   좋아요 0 | URL
카하하핫~~ 다락방님. 여자여서 죄송해요. 캬캬캬캬캬~~~~

다락방 2011-02-16 17:15   좋아요 0 | URL
아 전 무슨 일상생활이 여탕에 들어와있는 것 같아요, 무스탕님.
남자를 언제 만났는지 생각도 안나네요. ㅎㅎㅎㅎㅎ

Arch 2011-02-17 09:50   좋아요 0 | URL
정말 비유의 다락방이군요. 여탕에 와있는거 같다니!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인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여자한테 얼마나 박하게 구는지 다락방이 알아야 한다니까요.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언젠가 읽어볼거에요.

nada 2011-02-18 17:10   좋아요 0 | URL
그래두 락방님이 몸 담은 여탕은 vvip 탕 아니에요?
주위에 좋은 여자사람들 많잖아요.
쓸데없는 남자들 바글거려봤자 인생에 아무 위로 안 돼요.
걍 피곤하고 안구 오염되고 주변 공기만 탁해지죠.
어차피 필요한 건 딱 하나, 하나뿐이에요.

끝까지 해봤음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치님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야 하는데.
제 주위엔 한 번의 좌절로 인생 전체가 망가진 사람들이 몇몇 있어요.
그들 때문에 간혹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어요. (불끈!)

Arch 2011-02-19 10:21   좋아요 0 | URL
역시 꽃양배추님! 전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락방, 봤죠~

그 사람을 건강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꿈이란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없어도 그렇게까지 이루고 싶은게 뭔지 몰라도 괜찮을 수 있잖아요. 왠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지만. 물론 잠 안 오는 어떤 날엔 내겐 왜 이렇게 열정이 없을까,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란 생각으로 괴로울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전 머리만 대도 잠을 자는 여자 사람이라 이것도 나쁘지 않아'란 생각이 대부분이에요.

2011-02-16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7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02-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는 이 글이 참 좋아요!

Arch 2011-02-17 09:52   좋아요 0 | URL
와, 나는 치니님이 참 좋아요!

L.SHIN 2011-02-1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의 이미지 밑의 소개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이 페이퍼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서성이다가.
현실에 적응하고 만족하며 사는 삶, 올바른 생활이긴 한데...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꿈툴대고 있을
그 그림에 대한 소망은..끝내 죽는 건가,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네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가 정한 게 아니라, 그림이 '그 사람이기에' 들어가 앉아서 소망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치님도, 나중에, 아주 나중에라도 글을 쓴다던가 국수장사를 한다던가의 마음 속 소리를 따라가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멋진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웃음) ^^

Arch 2011-02-17 09:54   좋아요 0 | URL
그럼요, 그래서 근육 좀 만들어놓구요. 제가 굶주리면서 뭔가를 할 정도로 뚝심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알았어요. 그래놓고 다 못견디겠다고 발악을 해대니까 좀 웃기더라구요. 혹시 알아요, 이러다 스트릭랜드(이름이 맞나)처럼 그림 그리려고 훌쩍 떠날지.

L.SHIN 2011-02-17 19:09   좋아요 0 | URL
멋진 그림을 남겨주셔야 해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