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청소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집 전체를 발칵 뒤집어엎은 다음 거의 밤새 매달려서 정리 정돈을 하곤 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마음이 심란하거나 당장 넘겨줘야 할 원고가 좀처럼 답이 안 나올 때, 가끔 나는 집을 뒤집는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한동안의 밀린 일을 쳐내느라, 그간 연락을 못한 사람들을 만나느라 연일 강행군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집을 엎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행스러운 건 그나마 내 작업실로 쓰는 방 하나만 엎었다는 것. 그래도 그 방에 잡동사니가 제일 많은지라 계절이 바뀔 때 옷장 정리하는 것 못지않게 하드했다.


먼지만 뒤집어쓴 채 눈길한번 받지 못하는 장식품들, 그리고 서랍 속에는 뭐가 그렇게 많이 들어앉아 있는지 그 물건들을 내가 전부 어디선가 물어다 날랐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라는 책에 의하면 잡동사니며 쓰레기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들어오는 복도 나가게 하는 지름길이라던데.. 내가 복이 없다면 순전히 이 작업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장식품들을 상자에 담고, 왜 이걸 여기다 그냥 처박아 뒀지 싶은 물건들을 다시 꺼내고, 물건들의 위치를 조금씩 바꾸었다. 가구 배치를 달리하면 기분 전환이 된다지만 그런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건 엄두도 나지 않으니 죽으나 사나 그저 잡다한 물건들의 위치를 요렇게 조렇게 바꿀 밖에.. 그러다 장식장 위에 올려 진 납작하고 작은 원목 서랍장을 열어보게 되었다. 주로 다 쓴 통장과 누군가에게 받은 생일 카드,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의 명함들 속에 그 편지는 있었다.


샛노란 색의 봉투를 보았을 때 나는 그 편지를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라고 생각했다. 대체 누구 길래 편지의 컬러 선택이 이리도 과감하나 싶어 열어보기 전까지는 내가 썼던 편지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봉투보다 더 진한 두 장의 노란색 편지지에는 익숙한 내 글씨가 있었고 편지를 쓴 날은 2003년 7월 8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려 7년 전에 쓴 편지였다. 하지만 편지는 별로 7년의 세월을 견뎌온 흔적 없이, 마치 어제 누군가에게 쓴 편지마냥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편지는 사랑하는 Piggy 에게 로 시작되었다. 피기. 그래 내가 피기라고 부르던 남자가 있었었다. 그는 결코 뚱뚱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말라서 인상이 좀 날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그를 피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좀 오그라들지만 그는 내게 아기라는 호칭으로 불렀더랬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이나 당신 혹은 자기라는 말 대신 무언가 우리 둘 만의 언어처럼 비밀스럽게 서로를 불렀던 것이. 뚱뚱하지 않은 피기처럼 나 역시 베이비 페이스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우린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편지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이 편지가 지금 내 손에 있는 걸로 보아 이미 그때도 추측이 가능했었던지 시작은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달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었다. 허나 주지 않을, 혹은 차마 주지 못할 편지에 담기기 마련인 절절함이나 애잔함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우리가 생각보다 오래 만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싸울 때 너무 모질게 굴어서 미안하다는 것,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얘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못 전할 편지도 아니었지만 굳이 글로 써서 주어야 할 만큼의 내용도 없는 그냥 그런 밋밋한 편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 분명 행복해 라고 말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편안했다고 말 할 수 있었던 시기. 불같이 타오르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는 모나지도 않았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난하다는 단어와 어울리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내가 어째서 그런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꽤 오래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를 만나는 동안 나는 그 시절을 기억할 만한 날카로운 추억 같은 것 하나 없을 만큼 아주 평온하게 하루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다.


어쩌면 결혼을 생각 했더라면 그런 남자와 했을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비명을 지를 만큼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명을 지르며 서로 싸울 일은 없는 사람. 어제도 오늘도 똑같아서 좀 지겹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먼 훗날의 언젠가 적어도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할 수 있는 사람. 나에게 크게 바라는 것이 없어서 가끔은 이 사람이 나를 원하고 있는지 어쩐지 궁금해지지만 그만큼 나에게 자유와 편안함을 허락하는 사람. 그래. 결혼을 했다면 이런 남자와 해야 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밋밋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렇게 밋밋한 편지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남자들에게 쓴 편지는 언제나 절절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글로 내 마음을 전할까, 아니 실제의 내 마음 보다 그가 더 감동하고 감탄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행여 헤어지게 되더라도 나중에 그 사람이 내 편지를 다시 꺼내어보면 내가 이렇게 근사한 여자와 왜 헤어졌을까 고민하게 만들고 싶었었다. 그러니까 나는 편지의 힘을 너무나 맹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쓴 편지는 누군가에게 닿는 순간 내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 보다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전달 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나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 문장 대화가 가능한 메신저와 절대 분실사고가 일어날리 없는 이메일은 생각보다 빨리 종이 편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은 정말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다. 왜 내 글씨는 이 모양일까 생각하면서, 여분의 편지지가 없으면 행여 잘못 적을까봐 조심하면서 적었던 기억은 사라졌다. 대신 나는 전화를 하거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다. 그래서 내 마음은 그만큼 간편해졌고 짧아졌다.


최근에 딱 한 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고 시도를 한 적이 있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종이에 손으로 쓰는 편지는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감정 과잉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심플하고 캐주얼한 말들만 한다 하더라도 편지는 그 하드웨어적 이미지에서 이미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이제 세상에는 편지를 대신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그래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무언가 굉장한 마음을 담은 굉장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글을 다 써가는 지금 나는 그 노란 편지를 잘게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감정들을 보관한다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 그 편지를 보면서 나는 편지만큼이나 밋밋했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늘 그러했듯 그 잠깐의 되새김 이후에는 그를 잊고 살 것이다. 더 이상 내가 편지를 쓰지도, 그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행여, 만약에라도 지난날 나의 과장스럽고 구구절절한 편지를 아직까지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제 그만 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나도, 그때의 당신도 이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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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4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어릴때 클래식을 들었었다. 어릴때부터 라고 말 하지 않고 들었었다 라고 말 하는 것은 자라고 난 이후 거의라고 할 만큼 클래식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이 들고부터 나는 무한궤도를 들었으며 공일오비를 들었고 유희열이나 김동률을 들었었다. 클래식은 고루했다. 뭔가 잰척 하는것 같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아무튼 나와는 맞지 않는 음악이라 생각했었다.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다섯살때 부터 피아노를 배웠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까지 배웠으니 꽤 오래 피아노를 친 셈이다. 엄마는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마음 같은건 없었던것 같지만 내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기를 바랬던 것 만큼은 분명한것 같다. 그러나 내가 지금 피아노 뚜껑을 열고 칠 수 있는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 정도. 사실 그것도 얼마나 칠지는 모르겠다. 피아노를 쳐 보지 않은지 십 몇년이 넘었으니까. 이후 장난 삼아라도 나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며칠 전 친구의 연주회에 갔었다. 아...클래식. 이걸 어떻게 몇 시간동안 들어내지? 하는 고민이 앞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순간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기억마저 떠올랐다. 그래, 우리 아빠가 그랬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내게 '차에서 코푼 새끼' 로 기억하라며. 맞다. 나도 그랬었다. 허비 행콕과 펫 메쓰니를 친구들과 함께 허병국, 팽만식 으로 불렀었다.  

아빠는 오리지널 테이프를 갖고 계셨다. 당시만 해도 연주를 CD로 녹음하는 방식이 아니여서 오리지널 테이프라는게 있는데, 보통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만든 테이프에는 겉의 플라스틱을 조립하기 위해 나사가 박혀 있는데 이 오리지널 테이프에는 나사가 없다. 즉 녹음을 위해 아예 공테이프 하나를 나사 없이 만들어놓은 테이프인 것이다. 아빠는 이 테이프를 출장 갈때마다 끝도 없이 사왔다. 나사가 박힌 테이프들보다 훨씬 비싸고 귀했지만 아빠는 거기에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레코드를 들었다면 아빠가 좀 더 멋있었겠지만. 우리 아빤 테이프파였다.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을 좋아한 순간보다 미워한 순간들이 많았다. 왜 나에게 이렇게 하는 걸까? 왜 내게 이걸 해 주지 않는 걸까. 등등. 그런데 자꾸 나이가 드니까 알겠다. 그 분들이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를 말이다. 십수년간 클래식이라곤 듣지 않았던 나에게, 그러나 문득 들었을때 그 음악을 즐기게 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맨 앞에 앉아서 귀에다 손을 마치 확성기처럼 대고 들을 정도로 열심히 들었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모든 소리들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느끼라고, 즐기라고. 넌 그랬었다고.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아빠가 좋아한 음악가들이다. 나는 바흐와 모짜르트를 좋아했지만 아빤 바흐는 너무 장식적이고 종교적이라 싫어하셨고, 모짜르트는 천재적이긴 하지만 뭔가 묵직한 맛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 나도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라흐마니노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난 요즘 연애 칼럼을 쓰면서 클래식한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클래식. 고전적이고 약간은 보수적이면서도 풍부한 그것. 사람들이 쿨하게 혹은 엣지 있게 또는 요즘 대세인 캐주얼한 사랑이 아닌 클래식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편지를 주고 받고, 오래 오래 서로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가서 닿게 되는.. 

나도 언젠가는 클래식하게 늙어가고 싶다. 아빠처럼, 혹은 엄마처럼.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나이 든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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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도 모차르트의 천성적인 밝음이 좋다는...ㅎ 요즘은 광폭해서 질주할 것 같은 베토벤과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쇼팽과 오빠 부대 리스트, 악마같은 파가니니요. 죽은 사람들 음악만 들어요 요즘은.

플라시보 2010-02-20 16:35   좋아요 0 | URL
음...전 나이가 들수록 힘있는 음악들이 좋아지더라구요. 젊을땐(?) 좀 잔잔한게 좋더니만. 아마 파워풀한 뭔가가 그리운가봐요. 그 에너지와 열정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찍은 사진. 

내일이 5주년이라 파티를 한다고 한다. (아니다 날 지났으니 오늘이구나) 

이제 와인 코르크는 더 담을 곳도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렇게 많이 마신 와인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얘기들은 

지금도 우주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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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2-20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당하게 님의 사진을 올리시는게 부럽다는 생각을 이밤에 하며 댓글 답니다~.ㅎㅎㅎ

플라시보 2010-02-20 13:0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뭐 당당하게 라기 보다는...흐흐.
 


오래전 TTL 광고에서 눈이 왕방울만한 소녀 임은경은 빨간 토마토를 맞으면서 말했다. ‘스무 살’ 다른 어떤 말도 아닌 스무 살. 그때는 몰랐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말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저 그 광고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라고는 아무리 토마토라지만 저렇게 맞으면 좀 아프지 않을까? 눈에라도 들어가면 따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임은경이 ‘살’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동그랗게 말리던 혀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스무 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지를.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내가 이미 지나온 스무 살 시절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알게 될까? 왜 그 순간에 나는 지금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지금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내 서른 살이 나중에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면 역시 그때는 지금보다 행복 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스무 살의 나는 갓 대학생이 되었고 내 인생 최초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원룸은 주민들 사이에서 독신자 아파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우리는 독신자 라고 말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어쨌건 그렇게 불렀다. 누가? 왜? 같은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원룸촌은 독신자 아파트였다. 내 원룸 안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건축법상 바닥의 4분의 1되는 크기의 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충실하게 지킨 창이었다. 그 창 바로 옆에 나는 오디오를 설치하고 어디선가 흔들의자를 구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비가 오면 무너저내릴 것 같은 마음으로 그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는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를 볼 수 있고 그 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오아시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그 원룸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나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을 정말 제대로 들었었던 것 같다. 일단 새로운 CD를 사고 나면 최대한 편한 옷을 입고,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그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베이스 소리만 듣다가 다음 번에는 기타, 그 다음에는 피아노나 신서사이저, 그 외에 효과음들, 코러스, 보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시 이 음악을 들었다 라고 말을 하려면 저렇게 다 쪼개어서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렇게 말 했었다. 스쳐지나가듯 들은 음악들은 내게 아는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매 순간을 참 성의있게 살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함께 알바를 하던 친한 알바생들과 우루루 몰려가서 생맥주에 마른 오징어를 먹곤 했다. 그때 우리가 가던 술집은 너무나 허름해서 이거 마시다가 무너지면 시신도 못 찾는거 아니야? 하는 농담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맥주는 너무 차고 맛있었고 가격은 우리의 얇은 주머니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쌌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었지만 누가 누굴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썸씽은 없었다. 그저 우린 그렇게 그냥 우루루 하고 가서는 와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게 좋을 뿐이었다. 각자 일을 시작한 날들이 달라서 알바비가 나오는 날은 제각각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은 누군가가 알바비를 받는 날이므로 우린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했었다. 단 한번도 누군가가 이번에는 쏘기 힘들것 같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늘, 그리고 항상 알바비를 쓰는 가장 첫 번째는 그 생맥주집이었다.


내 후배 중 한명은 유진박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공연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겨우 표를 사고 그녀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사실 그 공연을 보기 전 까지 나는 유진박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거기서 감동을 받고 말았다. 마지막에 긴 줄을 서서 싸인을 받을 정도로. 그때 유진박이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로맨틱하게 생겼어. 당신 로맨틱하게 생겼어. 봐봐 로맨틱하지 않아?’ (다른 스텝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으나 그들은 뚱했다.) 그 후로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스스로 로맨틱하게 생겼다고 굳게 믿어버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말 했으므로 무조건 믿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알던 세션하는 오빠들이 있었는데 이 오빠들은 지방에 공연이 있을 때 마다 나에게 공짜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었다. 신해철부터 이승환까지 그 오빠들이 하는 공연은 참으로 다양했었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정말 미친듯이 열광하며 공연을 즐겼었다. 나이트에 가도 이보다 더 뛸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뛰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고도 우리는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 노래방을 찾아가서 그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다시 불렀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들만의 콘서트였다. 관객은 없지만 부르는 가수들이 미쳐 날뛰는.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당시 나는 나이트클럽을 꽤나 좋아했었다. 강남 일대에는 우리가 갈 만한 나이트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죽순이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몸이 찌뿌둥해서 한번 흔들어야 하는거 아냐? 하는 날이면 멤버들을 모았다. 그때 우리의 복장은 예쁜 옷, 혹은 조명빨 잘 받는 옷이 아니었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흰 남방에 검은 선글라스. 우리가 찾아낸 춤추기 가장 좋은 복장이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여자 아이들 속에서 결코 예쁘지는 않았지만 정말 작정하고 춤추러 온, 미친듯이 춤을 춰대는 애들이었다. 부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린 남자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오직 춤을 추기 위해서 갔으니까.


매일 밤이면 나는 꼬박꼬박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이야 내가 하는 방송의 모니터 조차도 하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가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를 비롯해서 김현철이나 공일오비의 장호일이 하던 라디오는 무조건 들었었다. 라디오라는 것이 TV와 달라서 대중을 상대한다기 보다는 오직 나에게만 얘기를 해 주는 것 같은 친밀함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과 1:1로 마주앉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날엔가는 김현철이 진행하는 라디오쇼에 사연을 보냈고, 그 사연이 채택이 되어서 On & On 이라는 여성복 브랜드의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나에게 그 상품권을 준다며 김현철이 말 하는 순간 내 친구와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방방 뛰었었다. 그리고 상품권이 도착하기 무섭게 매장으로 달려가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했다. 그러다 평소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던 내게 친구는 ‘여성스러운 옷을 사봐. 맨날 바지만 입지 말고’ 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옷은 살구색 원피스였다. 스판 제질이라 몸에 딱 붙는데다 치마 길이가 약간 짧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지만 친구도 점원도 모두 어울린다는 얘기에 그냥 그걸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줬고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아닌 그냥 커피숍만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커피 맛 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세상에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자판기 커피 딱 두 종류만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자주 커피메이커에 물인지 커핀지 구분도 안 갈 만큼 연하게 커피를 내려서 냉동실에 넣어 차가워진 말보로 미디움을 피우며 커피를 마셨었다. 지금은 더 비싼 커피를 사 마시거나 더 좋은 원두를 쓸 수 있지만 그때의 커피 맛은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는다. 담배도 마찬가지. 얼마 전 문득 떠올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피워봤는데 약간 차갑다라는 느낌 뿐이었다. 그땐 그 느낌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KTX가 없던 시절. 참 용감하기도 하지. 나와 내 친구는 부산까지 무궁화호 입석을 끊어서 내려갔다. 용케 자리가 비면 잠깐 앉았다가 누군가가 표를 들고 오면 다시 일어나서 서 있기를 얼마나 오래 반복했는지. 그래도 우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직 밤 바다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오랜 기차 시간을 버텼다. 그 와중에 기차 여행에는 역시 달걀과 사이다라며 삶은 달걀을 서로의 머리에 쳐서 깨먹고 사이다도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부산의 밤 바다는 너무 근사했었다. 지금은 노보텔 자리인 그 곳을 우리는 우리만의 해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얘기 아니지만 그땐 바다보다 깊고 세상 모든 것 만큼이나 진지했었다.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했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던 시절, 가진게 없어도 불안하지 않던 시절, 통장 잔고에 예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시절, 내 미래는 내가 원하는대로 펼쳐지리라 믿었던 시절, 컴컴한 골목길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 겨울이면 패딩 코트 하나로 버텨도 옷이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단 하나뿐인 가방을 메고 학교도 놀러도 여행도 다니던 시절, 좋아하는 음악을 집에서 CD에서 다시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던 시절, 한 권의 책을 사면 그 한 권을 정말 아껴서 열심히 읽던 시절. 그래서 그 책이 책꽂이에 꽂히면 딱 그 부피만큼 행복했던 시절.


지금의 나는 훨씬 더 좋은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해 가진것도 엄청나게 늘었고 정년퇴직이 따로 없는 밥벌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때처럼 내 스스로 모든 것에 감동을 느끼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뭘 해도 약간은 시큰둥하고 조금만 앉아 있으면 그냥 집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매일 밤 늦게 자고 약속이 없는 한 늦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저마다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전화를 안하고 심지어 캐치콜이 떠도 리턴콜을 하지 않느냐고 원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를 하고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짖눌려 살고 순간순간이 소중하다기 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내가 옷자락이 끼여서 딸려가는 느낌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는 내가 스무 살이 아니기 때문에 내 삶이 그리고 내 하루가 이렇게 시시해져 버린 걸까?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면서 늘어난 건 의심과 추억과 게으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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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류. 이렇게 시킨 사람도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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