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TTL 광고에서 눈이 왕방울만한 소녀 임은경은 빨간 토마토를 맞으면서 말했다. ‘스무 살’ 다른 어떤 말도 아닌 스무 살. 그때는 몰랐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말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저 그 광고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라고는 아무리 토마토라지만 저렇게 맞으면 좀 아프지 않을까? 눈에라도 들어가면 따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임은경이 ‘살’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동그랗게 말리던 혀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스무 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지를.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내가 이미 지나온 스무 살 시절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알게 될까? 왜 그 순간에 나는 지금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지금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내 서른 살이 나중에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면 역시 그때는 지금보다 행복 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스무 살의 나는 갓 대학생이 되었고 내 인생 최초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원룸은 주민들 사이에서 독신자 아파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우리는 독신자 라고 말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어쨌건 그렇게 불렀다. 누가? 왜? 같은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원룸촌은 독신자 아파트였다. 내 원룸 안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건축법상 바닥의 4분의 1되는 크기의 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충실하게 지킨 창이었다. 그 창 바로 옆에 나는 오디오를 설치하고 어디선가 흔들의자를 구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비가 오면 무너저내릴 것 같은 마음으로 그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는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를 볼 수 있고 그 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오아시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그 원룸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나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을 정말 제대로 들었었던 것 같다. 일단 새로운 CD를 사고 나면 최대한 편한 옷을 입고,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그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베이스 소리만 듣다가 다음 번에는 기타, 그 다음에는 피아노나 신서사이저, 그 외에 효과음들, 코러스, 보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시 이 음악을 들었다 라고 말을 하려면 저렇게 다 쪼개어서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렇게 말 했었다. 스쳐지나가듯 들은 음악들은 내게 아는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매 순간을 참 성의있게 살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함께 알바를 하던 친한 알바생들과 우루루 몰려가서 생맥주에 마른 오징어를 먹곤 했다. 그때 우리가 가던 술집은 너무나 허름해서 이거 마시다가 무너지면 시신도 못 찾는거 아니야? 하는 농담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맥주는 너무 차고 맛있었고 가격은 우리의 얇은 주머니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쌌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었지만 누가 누굴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썸씽은 없었다. 그저 우린 그렇게 그냥 우루루 하고 가서는 와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게 좋을 뿐이었다. 각자 일을 시작한 날들이 달라서 알바비가 나오는 날은 제각각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은 누군가가 알바비를 받는 날이므로 우린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했었다. 단 한번도 누군가가 이번에는 쏘기 힘들것 같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늘, 그리고 항상 알바비를 쓰는 가장 첫 번째는 그 생맥주집이었다.


내 후배 중 한명은 유진박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공연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겨우 표를 사고 그녀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사실 그 공연을 보기 전 까지 나는 유진박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거기서 감동을 받고 말았다. 마지막에 긴 줄을 서서 싸인을 받을 정도로. 그때 유진박이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로맨틱하게 생겼어. 당신 로맨틱하게 생겼어. 봐봐 로맨틱하지 않아?’ (다른 스텝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으나 그들은 뚱했다.) 그 후로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스스로 로맨틱하게 생겼다고 굳게 믿어버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말 했으므로 무조건 믿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알던 세션하는 오빠들이 있었는데 이 오빠들은 지방에 공연이 있을 때 마다 나에게 공짜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었다. 신해철부터 이승환까지 그 오빠들이 하는 공연은 참으로 다양했었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정말 미친듯이 열광하며 공연을 즐겼었다. 나이트에 가도 이보다 더 뛸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뛰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고도 우리는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 노래방을 찾아가서 그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다시 불렀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들만의 콘서트였다. 관객은 없지만 부르는 가수들이 미쳐 날뛰는.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당시 나는 나이트클럽을 꽤나 좋아했었다. 강남 일대에는 우리가 갈 만한 나이트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죽순이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몸이 찌뿌둥해서 한번 흔들어야 하는거 아냐? 하는 날이면 멤버들을 모았다. 그때 우리의 복장은 예쁜 옷, 혹은 조명빨 잘 받는 옷이 아니었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흰 남방에 검은 선글라스. 우리가 찾아낸 춤추기 가장 좋은 복장이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여자 아이들 속에서 결코 예쁘지는 않았지만 정말 작정하고 춤추러 온, 미친듯이 춤을 춰대는 애들이었다. 부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린 남자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오직 춤을 추기 위해서 갔으니까.


매일 밤이면 나는 꼬박꼬박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이야 내가 하는 방송의 모니터 조차도 하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가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를 비롯해서 김현철이나 공일오비의 장호일이 하던 라디오는 무조건 들었었다. 라디오라는 것이 TV와 달라서 대중을 상대한다기 보다는 오직 나에게만 얘기를 해 주는 것 같은 친밀함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과 1:1로 마주앉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날엔가는 김현철이 진행하는 라디오쇼에 사연을 보냈고, 그 사연이 채택이 되어서 On & On 이라는 여성복 브랜드의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나에게 그 상품권을 준다며 김현철이 말 하는 순간 내 친구와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방방 뛰었었다. 그리고 상품권이 도착하기 무섭게 매장으로 달려가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했다. 그러다 평소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던 내게 친구는 ‘여성스러운 옷을 사봐. 맨날 바지만 입지 말고’ 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옷은 살구색 원피스였다. 스판 제질이라 몸에 딱 붙는데다 치마 길이가 약간 짧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지만 친구도 점원도 모두 어울린다는 얘기에 그냥 그걸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줬고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아닌 그냥 커피숍만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커피 맛 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세상에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자판기 커피 딱 두 종류만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자주 커피메이커에 물인지 커핀지 구분도 안 갈 만큼 연하게 커피를 내려서 냉동실에 넣어 차가워진 말보로 미디움을 피우며 커피를 마셨었다. 지금은 더 비싼 커피를 사 마시거나 더 좋은 원두를 쓸 수 있지만 그때의 커피 맛은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는다. 담배도 마찬가지. 얼마 전 문득 떠올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피워봤는데 약간 차갑다라는 느낌 뿐이었다. 그땐 그 느낌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KTX가 없던 시절. 참 용감하기도 하지. 나와 내 친구는 부산까지 무궁화호 입석을 끊어서 내려갔다. 용케 자리가 비면 잠깐 앉았다가 누군가가 표를 들고 오면 다시 일어나서 서 있기를 얼마나 오래 반복했는지. 그래도 우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직 밤 바다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오랜 기차 시간을 버텼다. 그 와중에 기차 여행에는 역시 달걀과 사이다라며 삶은 달걀을 서로의 머리에 쳐서 깨먹고 사이다도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부산의 밤 바다는 너무 근사했었다. 지금은 노보텔 자리인 그 곳을 우리는 우리만의 해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얘기 아니지만 그땐 바다보다 깊고 세상 모든 것 만큼이나 진지했었다.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했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던 시절, 가진게 없어도 불안하지 않던 시절, 통장 잔고에 예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시절, 내 미래는 내가 원하는대로 펼쳐지리라 믿었던 시절, 컴컴한 골목길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 겨울이면 패딩 코트 하나로 버텨도 옷이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단 하나뿐인 가방을 메고 학교도 놀러도 여행도 다니던 시절, 좋아하는 음악을 집에서 CD에서 다시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던 시절, 한 권의 책을 사면 그 한 권을 정말 아껴서 열심히 읽던 시절. 그래서 그 책이 책꽂이에 꽂히면 딱 그 부피만큼 행복했던 시절.


지금의 나는 훨씬 더 좋은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해 가진것도 엄청나게 늘었고 정년퇴직이 따로 없는 밥벌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때처럼 내 스스로 모든 것에 감동을 느끼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뭘 해도 약간은 시큰둥하고 조금만 앉아 있으면 그냥 집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매일 밤 늦게 자고 약속이 없는 한 늦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저마다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전화를 안하고 심지어 캐치콜이 떠도 리턴콜을 하지 않느냐고 원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를 하고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짖눌려 살고 순간순간이 소중하다기 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내가 옷자락이 끼여서 딸려가는 느낌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는 내가 스무 살이 아니기 때문에 내 삶이 그리고 내 하루가 이렇게 시시해져 버린 걸까?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면서 늘어난 건 의심과 추억과 게으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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