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부끄러운 이야기를 먼저 고백하도록 하자. 나는 한국소설을 그리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문학이 그녀에게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이었다고 말했듯이, 독서라고 말하기도 민구한 내 '읽기'는 꿈보다 더 먼 환상이었다. 나는 내 현실과 거리가 먼 글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하고 만족해 잠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소설은 내 취향에서 현저히 먼 셈이다. 읽다보면 싫어도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같은 이야기라도 한국 이름이 나오고 한국인들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현실에 몰입하게 되니까.
하지만, 그간 내가 읽어온 한국 소설에 비하면 이 <외딴방>은 현실도 현실이지만 읽다보면 작가에게 몰두하게 되는 소설이다. 나는 내 이 취향 때문에 신경숙의 소설은 지난 학기에 읽은 <엄마를 부탁해>가 처음이었다. 내 평생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렇게 많이 울어보긴 처음이었다. 읽을 때마다 날 울렸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도 뒷부분이 되기 전까지 멀쩡했었는데. 난 그게 유난히 '엄마, 가족, 우리 개'에 약한 내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감정이입한 결과라고.
그게 아니었다. 난 그 감정을 왈칵 쏟아내게 한 글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는 걸 이 <외딴방>을 통해서야 깨달았다.
자기고백. 소설이라고 하는 만큼 어딘가 작가의 기억속에 허구가 섞엿겠지만 소설 속 그 선배처럼 알아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 나에게 <외딴방>은 소설이라기 보다 작가가 힘겹게 써내려간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읽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기억이, 삶이 주는 그 몰입도. 써내려가는 과거와 써내려가고 있는 현재가 뒤섞인 <외딴방>은 사실 정형화된 책들만 읽어온 나에게 조금 헷갈리는 책이었다. 과거엣 현재로의 급격한 전환에 나는 옛날 외딴방에 사는 소녀를 훔쳐보다 누가 뒷덜미를 잡은 것마냥 덜컥, '지금'을 바라봐야했다.
열일곱의 소녀는 시골에서 외사촌과 함께 상경해 큰오빠와 함께 살며 회사에 취직한다. 간단한 노동직이지만 돈을 받고, 야간이지만 학교도 다닐 수 있다. 사진사가 되고 싶다는 외사촌, 작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녀. 다들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그녀가 살았던 외딴방에서 소녀는 누군가를 만난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가가 되어서도 묻어두고 싶었던 그 기억의 한 부분들을.
나는 모른다. 그녀가 말하는 그 고단함과 두려움은, 넘치진 않더라도 모든 것이 풍족하게 보장되어 온 온실 속의 나에겐 사실 외국의 소설만큼이나 먼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절박했던 시대를, 나는 겨우 책 속의 삽화에서, 흘러가듯 얘기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나 보고듣곤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열일곱, 열여덞, 열아홉의 소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지금의 작가가 꽁꽁 숨겨두었던 그 아픔은 시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고나서도 숨어있던 그 시절은 너무 힘들고 가난했기 대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재를, 그 아픔을 풀어내는 과정이 아팠기 때문에 소설보다 진실하고 사실보다 깊다.
소설 속 김영옥처럼 난 신경숙이 부럽다.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서. 그런 경험 자체보다 그 경험을 힘겹게나마 남들에게 소설의 형태로 풀어낼 수 있는 그 글솜씨가 부럽고 어려움 속에서도 꿈꿀 수 있었던 소녀가 부럽다. 소설이고 에세이고, 심지어는 리뷰까지. 나에게 글쓰기란 너무 어렵다. 작가는 그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를 고민하지만 난 아직 글쓰기가 그저 막연히 어렵다. 한 줄을 쓸 때 스며드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두 줄을 쓸 때 그 무의미함에 서글프다. 소심한 나에게 글쓰기라 대로변에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다. 좀 더 은근하긴 하겠지만. 그런 나에게 이 <외딴방>이 주는 의미는 다른 소설과 다르다.
환상의 문학이 아닌 현실의 문학.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것인지." 작가는 처음과 끝을 이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게 갖는 감정이 남다르겠지만 독자인 나에게 이 <외딴방>은 훌륭한 문학이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글을 문학이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외딴방>, 오랜만에 밤을 새고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