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배신 - 왜 어떤 이는 빨라도 실패하고, 어떤 이는 느려도 성공하는가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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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돈이다'는 격언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격언보다도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면서 현대인의 시간 또한 점차 빨라지기를 강요받습니다. 속도의 중요성은 특히 기업의 세계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많은 기업들은 다른 기업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고객과 시장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대응하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더 빠르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빠른 속도의 추구는 무수히 많은 폐해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경제의 위기를 불러왔던 월가의 몰락입니다. 결국 '시간은 돈이다'라는 이 격언은 아마도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하는 격언이 되었습니다.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직업을 고른다면, 테니스 선수나 야구 선수, 펜싱 선수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1000분의 1초인 밀리초의 세계에서 경쟁하며 살아가지만, 이런 프로선수들이라고 해서 일반인들보다 시각적 반응이 더 빠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 선수가 100마일의 공을 칠 수 있는 이유는 신체적 반응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프로선수들은 신체적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일반인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생각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이 야구공을 치기 위해선 스트라이크 여부에 관계없이 보는 즉시 휘둘러야 하지만, 프로 야구 선수들은 200밀리초동안 휘두를지 말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빠른 판단'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입니다. 단순히 빠른 반응속도와 빠른 판단의 조합은 빠른 헛스윙과 빠른 삼진아웃을 부를 뿐입니다.

지능의 핵심은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와 느리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 로버트 스턴버그  

주식거래에 고성능 컴퓨터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알고리즘 매매의 일종인 초단기 매매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같은 알고리즘으로 경쟁한다면, 컴퓨터가 더 빨리 반응해야 좋은 조건의 주식을 경쟁자보다 앞서 구입할 수 있고, 판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초단기 매매는 현재 미국 주식 거래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많은 기업들이 빠르고 새로운 플랫폼에 투자합니다. 하지만 UNX의 사례는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UNX는 새로운 CEO의 취임과 함께 최첨단 컴퓨터 매매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더욱 빠르게 설계되었고 효율이 높아졌습니다. 기존에 비해 거래속도는 65밀리초에서 30밀리초로 단축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30밀리초가 되자 매매 비용이 상승했고 실적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결국 UNX는 다시 65밀리초로 돌아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효율을 중시하고 매 초마다 수조 달러가 왔다 갔다 하는 시장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면서 속도는 빨라졌는데 실적이 나빠지는 것은 무슨 조화냐는 말이죠. 속도를 늦추니 다시 상황이 좋아지고 말이죠. 세상에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속도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느려야 더 좋다니, 말이 됩니까? - p.58 

과거에 우리의 행동은 '사건의 시간'에 영향을 받았다면, 현대인들은 '시계의 시간'에 영향을 받습니다. 시계의 시간은 우리의 행동을 조직화하며, 사회 경제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테일러주의는 업무의 분업화와 스톱워치를 통한 작업 시간 중심의 운영을 주장했습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시간을 기준으로 보수를 받습니다. 가장 낮은 보수를 받는 근로자일수록 더 짧은 기간을 기준으로 보수를 받으며, 이런 사람들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시간관을 바꿨습니다. 시간제 보수는 일 자체보다는 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동기를 왜곡시킵니다. 근로자들이 시간과 돈을 해로운 방식으로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 제약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더 심해집니다. 시간당 수입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시간이 더 가치 있다고 인식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드보의 연구 결과는 사람들이 시간에 구애받을수록 점점 더 일에만 집착하게 되며, 다른 활동을 덜 할 뿐만 아니라 덜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시간을 줄여 주는 각종 행위들은 모순적 결과를 불러옵니다. 패스트푸드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지만, 그렇게 해서 아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활동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지게 만듭니다. 더 이상 꽃향기를 맡을 여유가 없게 말이죠. - 샌포드 드보 

현대의 사람들은 하루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과거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고 느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구 결과는 이러한 인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직장은 점점 더 강한 집중력을 요구하는데, 이 때문에 일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술 발전의 가속화와 숨 가쁜 업무 처리는 단기적으로는 그 효과가 입증되며 빠름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혁신은 빠름의 추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늦춤으로써 최적이 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빠르게 반응하도록 배선되어 있으며 현대 사회는 우리의 빠른 본능을 최대한 이용하지만, 우리는 종종 본능과 기술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더욱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고속 사회일수록 우리의 삶의 결정에 있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심사숙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저자가 말하는 '기다려라'라는 실존적인 조언을 생각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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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의 덫
미키 맥기 지음, 김상화 옮김 / 모요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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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20세기 중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이제는 수많은 도서 장르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자기계발서는 이제 소설과 어깨를 나란히합니다. 자아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 모습대로 자아를 실현하라, 상상한 그대로 삶을 창조하라는 이상적인 메시지는 자기계발서가 지닌 호소력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계발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대중적인 자기계발 서적들에서 제시되는 자아실현은 전형적으로 현존 상태의 유지에 기여합니다. 자기계발서의 약속은 자아를 계발시키기는커녕 끊임없이 시달리는 자아라는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역사학자 카웰티가 지적한대로 자기계발서의 주요한 역할은 행동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물어져가는 전통적 진리의 관점에서 삶의 역동적 변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기계발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계발의 메시지가 사회변화의 분기점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소수의 산업자본가에게 부가 집중되자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도덕적 정당성을 제시해야 했고, 부는 성공, 그리고 신성함과 동일시되었고 가난은 죄악으로 인식했습니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부가 집중되고 기업가로서의 성공기회가 더욱 줄어들자 자기계발의 이상은 기업가적 성공기질보다 원만한 대인관계에 역점을 두게 됩니다. 데일 카네기로 대표되는 자기계발 담론은 회사에서의 순응 및 세일즈맨십을 강조합니다. 70년대의 자기계발 담론은 자신만 생각하며, 승리를 위해선 협박도 불사해야 한다는 생존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현대의 자기계발 담론은 스스로 일하는 자아라는 이상적 노동자인 예술가라는 개념을 완성했고, 더 나아가 자아를 위해 일하라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소명의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변화에 적응하며 왜곡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열심히 일하는 것이 부를 보장하는 신뢰할만한 수단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평생동안 한 가지 특정한 소명 또는 천직 내에서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과 개인의 소명에 대한 요구에 대해 자기계발서들의 답변은 대가에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고용안정에 대한 부담도, 재정적인 안전 유지에 대한 책임도 노동자에게 이전됩니다. 자기계발서는 노동자들에게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며 스스로의 CEO이고, 예술가이고, 브랜드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자기계발의 현실적 이상형은 자수성가한 부자들입니다. 누구나 꾸준하게 열심히 일하면 물질적, 사회적, 개인적 성공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위안을 얻습니다. 이런 환상은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오류입니다. 만약 성공이 온전히 한 개인의 노력에만 달려 있다면 어떠한 실패도 오직 개인의 단점이나 약점에서만 비롯된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됩니다.

운은 일류 기업의 성공이나 그보다는 처지는 기업의 성과에나 모두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성공과 실패담은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것, 즉 명확한 원인을 밝혀주고 운과 회귀의 불가피성이 갖는 결정적 힘을 무시하는 단순한 성패의 메시지를 제공하며 공감을 산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해의 착각을 유발하고 유지하면서, 교훈들을 믿고 싶어 안달 난 독자들에게 전혀 지속성 없는 가치를 가진 교훈만 선사할 뿐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p.286 

자기계발서의 주된 메시지는 개인의 마음과 의지가 자신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얻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처한 현실은 완전히 자기책임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자기계발서들은 자기 자신이 희생자라는 생각을 혐오하며, 사회변화를 위한 어떠한 집단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도 조롱당할 만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기계발서에 내재된 심리치료법적 유신론은 과거에는 전적으로 종교가 담당했던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전통적인 종교에 비해 실천과 요구사항은 적지만 영적 고양뿐만 아니라 세속적 성공도 약속하는《시크릿》이나《꿈꾸는 다락방》같은 대중적 자기계발서들은 기도하면 이루어지리라 같은 영적 전통을 자연법칙 또는 과학적 원칙으로 포장합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정치적 보수성은 해방된 이기적인 개인을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여기는 데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적 경로를 통한 해결가능성은 효과적으로 제거됩니다. 경제적 빈곤으로 고생하는 독자에게 자기계발서는 중산층의 빈곤이라는 경제적 현실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잖은 형태의 생존주의가 등장하는데, 다운사이징이란 용어가 유행일 당시 출간된《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같은 책은 치즈 찾기 미로 우화를 통해 이윤의 축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문화와 전통을 붕괴시키는 선진자본주의의 경향에 대한 변론을 펼칩니다. 이런 생존주의의 메시지는 얼굴 없는 합리적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적인 면을 찾다간 실험실의 쥐만도 못한 대접을 받을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계발 담론은 새로운 자아창조에 효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기본관념 및 사회정치적 세계에 대한 자아의 관계를 유지시킵니다. 이 담론에서 외모는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요소이기 때문에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성형수술을 장려합니다. 직장이 내면화되면서 창조된 자아가 진짜가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자기계발이 독창적인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몰개성적인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자기계발서가 요구하는, 더 나아가 자기계발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상품가치 있는 외형을 스스로 가꾸고, 기업에서 쓸만한 스킬을 스스로 단련하며 기업가처럼 창의적으로, 예술가처럼 열정적으로, 심지어는 예술가처럼 무보수에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상, 자기계발의 성취에 대한 보상에 대해 자기계발서들은 대부분 쇼핑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간단히 말해 만약 모든 사람이 '그들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바쁘다면, 누가 집을 청소하고, 저녁을 짓고, 아기에게 귀저기를 채우고, 아이들을 양육할 것이며, 공장에서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누가 거리를 청소하고, 택시를 몰며, 쓰레기차를 채울 것인가? 모든 돌보는 일은 개인이 자기형성의 더 커다란 일, 즉 항구적으로 다듬어진 예술작품으로서의 삶의 비전을 추구할 때, 무의미하고 저열한 가치로 평가된다.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지배적인 자아에 대한 소설은, 그러한 이상이 노동에 대한 일의 우위를 내포하고, 타인의 노동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자아의 육체적 나약성까지 부정하는 이중부정을 함축하고 있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 p.269 

자기계발서의 '자신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라'는 메시지는 양날의 칼입니다. 개인의 자기계발이 전체적으로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민주주의 체제라면 모두에게 사회적 책임이자 특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계발은 개인이 스스로 추구할 때는 권장되는 일이지만, 자기계발서의 주장대로 추구되는 사회적 자기계발은 획일화를 가져오며 병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최근 KBS에서 추진했던 프로그램 『어린이 독서왕』의 사례에서 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독서는 분명 유익하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회적 획일성의 탈을 쓰면 어떻게 독이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의 자기계발 문화는 병리적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계발이 가진 가능성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지배적인 자기계발 담론인 개인중심주의를 버리고 사회적 활동을 통한 문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자기계발 담론이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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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 베토벤에서 비틀스까지, 물리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재미있게 풀어보는 음악의 수수께끼
존 파웰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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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외출할 때면 필수적으로 mp3 플레이어를 챙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습니다. 매일 음악을 들을 정도로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음악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즐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이해한다면, 음악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음영이나 원근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회화 감상이 더 즐거운 것처럼 말입니다.

음악적 음은 다른 소음과 구별함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의 파장은 각각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진동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지는데, 소음의 경우 서로 무관한 개별적인 파동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음악적 음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동 유형을 나타냅니다. 계속 반복되기만 한다면 음의 파동이 복잡한지는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하던 간에 초당 20회에서 2만회 사이의 진동을 반복해서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음악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조건을 클리어하는 도구가 악기입니다.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거나, 현을 흔들어서 이 진동 주파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과거엔 나라마다, 도시마다 이 주파수의 기준이 달랐지만, 1939년 국제회의에서 결정된 이래 모든 악기는 110Hz를 기본 주파수로 가집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110의 정수배인 220, 440, 550 등과 같은 주파수를 만들어내지만 사람의 청각 체계는 전부 110Hz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주파수가 같은 것이 같은 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색은 주파수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지만, 소리에 개성을 부여하며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서적 감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악기는 저마다의 개성적인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연주방법에 따라 다양한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에도 사람은 독특한 방식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사람은 음악을 받아들일 때 열 대의 바이올린을 함께 연주한다고 해서 한 대로 연주할 때보다 열 배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는 두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악기와 악기간의 파동이 어긋나 상쇄현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의 귀는 작은 소음은 분명하게 듣고 음량이 커질수록 점진적으로 약하게 받아들이도록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를 뚫는 드릴 소리의 강도는 한숨 소리의 무려 1조배에 달하지만, 상대적인 음량으로는 4096배밖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음악원리 말고도 저자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음악적 편견들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절대음감이라 불리우는 것인데, 절대음감은 여섯살 이전에 특정 악기의 모든 음을 머릿속에 기억했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음악 솜씨가 뛰어나지만, 그것은 여섯 살 이전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훈련의 결과이지 절대음감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절대음감의 이점은 바이올린 주자가 택시 안에서 혼자 악기를 조율할때나 성악가가 혼자 시골길을 걸으며 자기가 정확한 음을 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부분적인 절대음감을 갖고 있으며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들을 조율하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대음감은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주 드물지만 중국과 베트남처럼 성조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런 성조 언어로 말할 때는 말의 특성과 노래의 특성이 결합된다. 가령 중국어에서는 단어를 어떤 음높이로 노래하는지가 의사소통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점심 준비됬어요, 엄마?"라는 질문이 음높이가 잘못되면 '내 점심 어디 있어, 이 말 같은 녀석?"이 된다. - p.30

저자는 많이 알수록, 다양하게 들을수록 음악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양 음악과 비서양 음악의 차이를 앎으로서 그 개성적인 부분을 들을 수 있으며, 팝, 재즈 밴드들이 드럼과 심벌즈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음이 아니라 소음을 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앎으로서 드럼소리가 들릴때 한번 쯤 더 되새겨볼 수도 있습니다. 고전음악의 길고 복잡한 제목 또한 그것의 유래를 안다면 쉽게 받아들이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가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본5음계의 구조와 뜻을 알고 평균율, 순정율이란 체계를 안다면 노래를 듣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음악을 쳐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악기를 다루는 것은 사람들의 편견과 다르게 다른 취미 못지않게 쉽다는 것을 안다면, 캠프파이어를 가기 전 악기를 하나 배워볼만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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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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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비디오, AV에 대한 반응은 다양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은 쉬쉬하는 반응이지만, 어느정도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거침없이 하이킥〉같은 TV프로그램에서는 성인비디오를 개그코드로 승화시켰으며, 그에 대한 반응도 긍정적이였습니다. 또한 요근래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아청법에 대한 논란이 주요 이슈화되고 있는데, 아청법이 옳네 그르네를 떠나서 음란물에 대한 것들이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은 이 또한 성인비디오에 대한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음란물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마도 일본AV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서양의 성인비디오가 더 영향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성인비디오가 영향력이 작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일본의 AV산업의 실태를 알아보는 것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성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2002년 기준으로 1조엔 규모의 시장, 현재 환율로는 13.7조원 규모의 일본AV시장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갈수록 공격적인 성행위를 묘사하는 비디오가 잘 팔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분석, AV 여배우들이 배출되기 쉬운 환경적 분석 등이 있습니다. 리처드 윌킨슨이 쓴《건강불평등》에서 특정 질병의 사망률은 그 사회 특유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말한 것처럼, 성인 비디오에서 나타나는 결과들 역시 그 사회의 구조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성인 비디오는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에서 안보 투쟁을 다루거나, 〈검은 눈〉에서 미군기지 문제를 다루는 등 포르노 영화라는 이름 아래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적인 요소가 배제된 성인 비디오와 폭력은 물감이 물에 풀리듯이 쉽게 융합되었고, 폭력성 강한, 그것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나 강간 등 여성을 힘으로 정복하는 성인 비디오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에 따른 도시 인구 집중과 가족 형태의 변화로 자녀 양육 방식, 특히 남자아이의 양육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핵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선을 보이면서 형성된 남녀의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잠을 자기 위해 밤늦게야 귀가해 잠깐 집에 머물거나 지방으로 전근이라도 가게 되면 아버지 홀로 떠나는 것이 당연시되다 보니, 어머니가 혼자 가사와 육아를 맡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많은 어머니들은 자식 교육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판 맹모라는 야유까지 받으며 자녀 양육에 헌신했는데, 이는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아이들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녀들은 학원에 가야 하고, 미래 또한 이미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녀들은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워갔고, 그 부정적 이미지는 모든 여성에게 확대되어 남존여비 사상이나 여성을 멸시하는 사고를 갖게 됩니다.

심리학자 기시다 슈도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에서 '남자아이가 어엿한 남성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 지키기를 강요하는 어머니에 맞서며 그 갈등을 극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오코노기 게이고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그 애정의 정신분석》에서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자란 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일체감의 환상이 환멸로 끝날 때는 환상을 품었던 만큼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크다. 그 결과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성에까지 번지게 되는데 이런 심리가 여성에 대한 지나친 공포나 멸시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기시다 슈는 《성적 유환론 서설》에서 마더 콤플렉스, 즉 모자간의 분리가 안된 남성은 성관계 시 상대 여성 안에 자신을 성 불능으로 만드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것을 뿌리치려고 하며, 정서적으로 상대 여성을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AV 여배우들이 자라온 삶의 과정을 보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 수 있습니다. AV 여배우 중에는 중산층 가정 출신이나 음악을 하거나 명문대 출신인 이른바 지식층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AV 여배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양녀로 들어간 집에서는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기도 합니다. AV 여배우 42명의 인터뷰를 담은 나가사와 미쓰오가 쓴 《AV 여배우》를 보면 부모가 이혼을 하거나, 부모가 자식에게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행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하면 자기평가가 낮아져 매춘부와 같은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사랑의 발견》에서 '그 하나의 관계, 최초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들을 휩쓸어 침수시켜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중요한 관계이다. 최초의 애착이든, 상호 작용 관계든, 사회에 대한 연결점이든, 뭐라고 부르던 간에 이 최초의 관계가 그토록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머니보다는 아이 쪽에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라고 지적하듯이 AV 여배우들이 어렸을때 받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경험은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난 그저 따뜻한 온기를 원했을 뿐" - A양 

해리 할로가 《사랑의 발견》에서 '어떤 끔찍한 상상도 이 살아 있는 원숭이 어미보다 더 사악한 대리모를 창조해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어미 원숭이들은 제 새끼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감정의 결핍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하듯이, 이러한 불행은 되풀이됩니다. 그리고 이 불행이 AV 여배우를 낳는데 큰 역할을 하며, 결과적으로 AV산업을 지탱합니다. 또한 AV산업이 요구하는 비디오의 장르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해결하기는 커녕,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추세에도 그에 역행하는 회사 또한 있습니다. 여성인 가와무라 미호가 대표로 있는 무빅스(MOVIX)가 그 사례인데, 무빅스의 팸플릿을 보면 남성과 성행위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으며,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세미 누드입니다. 무빅스는 상품으로서의 성인 비디오가 아닌 작품으로서의 성인 비디오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데, 좀 더 아름다운 영상,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없는 성인 비디오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꽃가게 앞에 앉아 꽃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목덜미를 찍는 식의 에로스를 추구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회사는 현재 폐업했지만, 성인 비디오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일본AV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일본AV를 편집한 영상이 june과 fimm의 모바일로 서비스되고 있고, 스카이라이프의 미드나잇 채널은 일본의 JAM TV와 전략적 제휴에 들어갔습니다. SOD는 한국, 대만 등의 해외 진출을 시작했고, 한국 현지법인을 설립한 곳도 있습니다. 미드나잇 채널의 이강복 국장의 말처럼, 일본 AV가 우리의 현실이 됐습니다. 언제 어느곳이나 포르노는 존재합니다. 분명한 것은 음란물에 대해 무언가를 변화하고 싶다면, 먼저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조원의 육체산업》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개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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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지배자들
오카다 토시오 지음, 김승현 옮김 / 현실과미래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예전에 한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을 때, 배경음악으로 독특하면서도 경쾌한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알게 된 결과, 그 노래의 제목은 "Tank!" 였고 일본의 애니메이션「Cowboy Bebop」에 나온 노래였습니다. 이처럼 오타쿠 문화는 알게 모르게 TV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과 같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오타쿠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타쿠와 관련된 업계 이야깃거리부터 오타쿠의 특징, 역사, 다른 문화와의 차이점을 논합니다.

오타쿠란 단어의 유래는 케이오우 대학 출신의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누에'에 취직해서 만든「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성공을 거둠으로서 시작됩니다. 당시 일본의 비영리 SF축제인 '일본 SF 대회'에서 이들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이들과 팬들은 상대방에 대한 가벼운 경칭인 오타쿠(お宅)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초창기의 오타쿠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한 호칭이란 사회적 요소가 있었지만, 다른 팬들도 이를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당시 서브컬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뜻이 확장됩니다. 이렇듯 단어가 애매하게 만들어지다 보니, 오타쿠라는 단어의 원뜻인 '실내indoor'의 이미지가 작용하면서 '집에만 있는 사람들' 과 같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오타쿠의 특징으로 '고도의 백과사전적 능력'과 '향상심과 자기 과시 욕구'를 말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장르를 깊이 즐기며, 관련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분석하고 과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구로 예를 들면, 일반인들은 가끔 TV중계로 야구 결과를 본다면, 야구 팬들은 매번 야구장에 찾아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것이고, 오타쿠적으로 야구를 즐긴다는 것은 수많은 야구 통계를 분석하는 세이버 매트리션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타쿠에겐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TV의 보급을 바탕으로 영상의 세기인 20세기에 태어난, 영상에 대한 감수성을 크게 진화시킨 '시각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한창 어린 나이에 TV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접했고, 이러한 분야에 재미를 느꼈고, 그 재미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오타쿠들은 아주 까다로운 소비자들입니다. 오타쿠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간파하고,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오타쿠들은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재미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온갖 정보의 범람 속에서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회적으로 가치관의 다양화를 우선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개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됬지만, 동시에 주된 유행을 없앤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 재미를 추구할 방법을 쉽게 찾기 힘들어졌고, 오타쿠들은 이런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방향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매력입니다. 통계적으로도 오타쿠들의 구매력은 보통의 구매층보다 높은 편이며, 제품에 대한 충성심도 높습니다.

한국에서는 오타쿠들이 이런 식의 '정치적 소비'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속 인터넷 망이 깔려 불법 복제와 다운로드가 일반화되었을 때에도 꿋꿋이 CD를 사고 만화책을 사 모았던 것은 바로 오타쿠들이었다. 이들은 "다운로드를 받지 왜 바보처럼 정품을 사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 속에서도 자신들의 소비 행태를 고수해 왔다. 처음에는 소유욕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창작품을 계속 구매해야 창작자들이 계속 창작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치적 소비의 결과, 오타쿠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적 재산권 문제에 대해 가장 민감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p.232 

오타쿠들은 까다로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되었습니다. 오타쿠의 기질을 발휘해 다양한 영상기법과 연출을 실험했고, 이를 오타쿠들이 비평하면서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영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1초의 화면을 위해 4시간을 촬영해야 하는 '장시간 노출' 촬영 기법이나 너트를 이용한 촬영 기법, 슬라이드 스캔이라는 광학 촬영, 목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쥬피터 머신이라는 매커니즘 등이 동원됬습니다. 그 후에도「스타워즈」나「쥬라기 공원」을 비롯해 계속 발전중인 SFX의 연출에는 이런 오타쿠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고도화된 정보 네트워크 사회에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고 세계 시장에서 겨룰 수 있는 인재는 오타쿠적인 시야와 사고방식을 가질 수도 있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오타쿠'는 일본의 미디어 서브컬처를 즐기는 사람들로 한정지을 수도 있겠지만, '오타쿠스러움'은 다른 분야에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특징들입니다.《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 지적하듯이, 현대의 사회적 메시지는 '일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일'인 사회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노동윤리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일은 시키지만 보수는 제대로 주지 않는 사회적 풍토가 열정 노동이라는 악순환을 만들긴 했지만, 오타쿠스러운 열정은 분명 한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독특한 엔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바로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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