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지배자들
오카다 토시오 지음, 김승현 옮김 / 현실과미래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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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을 때, 배경음악으로 독특하면서도 경쾌한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알게 된 결과, 그 노래의 제목은 "Tank!" 였고 일본의 애니메이션「Cowboy Bebop」에 나온 노래였습니다. 이처럼 오타쿠 문화는 알게 모르게 TV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과 같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오타쿠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타쿠와 관련된 업계 이야깃거리부터 오타쿠의 특징, 역사, 다른 문화와의 차이점을 논합니다.

오타쿠란 단어의 유래는 케이오우 대학 출신의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누에'에 취직해서 만든「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성공을 거둠으로서 시작됩니다. 당시 일본의 비영리 SF축제인 '일본 SF 대회'에서 이들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이들과 팬들은 상대방에 대한 가벼운 경칭인 오타쿠(お宅)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초창기의 오타쿠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한 호칭이란 사회적 요소가 있었지만, 다른 팬들도 이를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당시 서브컬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뜻이 확장됩니다. 이렇듯 단어가 애매하게 만들어지다 보니, 오타쿠라는 단어의 원뜻인 '실내indoor'의 이미지가 작용하면서 '집에만 있는 사람들' 과 같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오타쿠의 특징으로 '고도의 백과사전적 능력'과 '향상심과 자기 과시 욕구'를 말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장르를 깊이 즐기며, 관련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분석하고 과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구로 예를 들면, 일반인들은 가끔 TV중계로 야구 결과를 본다면, 야구 팬들은 매번 야구장에 찾아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것이고, 오타쿠적으로 야구를 즐긴다는 것은 수많은 야구 통계를 분석하는 세이버 매트리션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타쿠에겐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TV의 보급을 바탕으로 영상의 세기인 20세기에 태어난, 영상에 대한 감수성을 크게 진화시킨 '시각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한창 어린 나이에 TV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접했고, 이러한 분야에 재미를 느꼈고, 그 재미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오타쿠들은 아주 까다로운 소비자들입니다. 오타쿠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간파하고,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오타쿠들은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재미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온갖 정보의 범람 속에서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회적으로 가치관의 다양화를 우선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개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됬지만, 동시에 주된 유행을 없앤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 재미를 추구할 방법을 쉽게 찾기 힘들어졌고, 오타쿠들은 이런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방향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매력입니다. 통계적으로도 오타쿠들의 구매력은 보통의 구매층보다 높은 편이며, 제품에 대한 충성심도 높습니다.

한국에서는 오타쿠들이 이런 식의 '정치적 소비'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속 인터넷 망이 깔려 불법 복제와 다운로드가 일반화되었을 때에도 꿋꿋이 CD를 사고 만화책을 사 모았던 것은 바로 오타쿠들이었다. 이들은 "다운로드를 받지 왜 바보처럼 정품을 사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 속에서도 자신들의 소비 행태를 고수해 왔다. 처음에는 소유욕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창작품을 계속 구매해야 창작자들이 계속 창작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치적 소비의 결과, 오타쿠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적 재산권 문제에 대해 가장 민감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p.232 

오타쿠들은 까다로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되었습니다. 오타쿠의 기질을 발휘해 다양한 영상기법과 연출을 실험했고, 이를 오타쿠들이 비평하면서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영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1초의 화면을 위해 4시간을 촬영해야 하는 '장시간 노출' 촬영 기법이나 너트를 이용한 촬영 기법, 슬라이드 스캔이라는 광학 촬영, 목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쥬피터 머신이라는 매커니즘 등이 동원됬습니다. 그 후에도「스타워즈」나「쥬라기 공원」을 비롯해 계속 발전중인 SFX의 연출에는 이런 오타쿠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고도화된 정보 네트워크 사회에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고 세계 시장에서 겨룰 수 있는 인재는 오타쿠적인 시야와 사고방식을 가질 수도 있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오타쿠'는 일본의 미디어 서브컬처를 즐기는 사람들로 한정지을 수도 있겠지만, '오타쿠스러움'은 다른 분야에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특징들입니다.《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 지적하듯이, 현대의 사회적 메시지는 '일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일'인 사회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노동윤리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일은 시키지만 보수는 제대로 주지 않는 사회적 풍토가 열정 노동이라는 악순환을 만들긴 했지만, 오타쿠스러운 열정은 분명 한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독특한 엔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바로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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