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원조 - 아프리카 경제학자가 들려주는
담비사 모요 지음, 김진경 옮김 / 알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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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Live 8, 밀레니엄개발목표, G7 정상회의, 밀레니엄 챌린지 어카운트 등으로 인해 수백만 달러의 돈이 아프리카를 위해 일하는 구호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많은 미디어들도 아프리카를 도와줘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는데, 이러한 도움에는 한 가지의 믿음이 전제화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고, 그 방식은 반드시 원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이루어진 개발원조는 오히려 원조를 받는 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훨씬 더 빈곤한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진국의 원조 사업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 사람이 저자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처럼 단호하게 반대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아마도 그동안 아프리카 경제에 대한 공개적 담론을 백인 남성 경제학자들이 주도한데 반해, 잠비아에서 태어나 흑인 여성으로서 경제학자가 된 저자의 특별한 이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대규모 원조는 1929년 영국에서 식민지 영토에서의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시작된 마셜플랜의 성공은 유럽 외의 지역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태동하게 했습니다. 유럽의 재건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자 원조 지역으로 아프리카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고, 투자자본이 경제성장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시각이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국내 저축 및 민간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물적 자본과 인적 자본이 부재한 상황에서 해외 원조는 더 많은 투자를 유발시켜 더 큰 경제성장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비춰졌습니다. 그 이후 냉전시대에는 선진국에게 원조는 새롭게 발견한 이타주의와 자국의 전략적인 지정학적 영향력을 고수하려는 엄청난 이익을 결합시킨 수단이 되었습니다. 냉전시대에 원조는 세계를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원조의 필요성은 그 나라가 원조를 받을 만한지 또는 정권이 어떤 성향을 띠는지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 진영과 동맹을 맺을 의사가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1975년 이후 원조가 대규모 공공기반시설 투자에서 농업과 농촌 개발, 단체 예방접종 프로그램, 영양실조 환자들을 위한 식량보급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1980년대 말이 되자 신흥시장국들의 부채는 1조 달러에 달했고, 역으로 빈곤국에서 부유한 국가로 흘러 들어가는 총액은 매년 150억 달러에 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에 제공된 3000억 달러 이상의 원조금은 사실상 거의 이룬 게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정학적, 전략적 경쟁관계와 경제적 이득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의 가장 주된 원인은 원조의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대륙의 개발 성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구의 입맛에 맞는 이런저런 유형의 정권을 세우고 유지시키는 데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 폴 카가메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 계획은 마셜플랜이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것에서 고안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이 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셜플랜이 진행되는 동안 그 어떤 국가도 원조 유입금이 GDP의 3퍼센트를 넘지 않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아프리카는 GDP의 거의 15퍼센트에 달하는 개발원조금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마셜플랜은 한정적이여서 5년 뒤에는 지원이 끊겼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적어도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원조금을 받아 왔고 만료일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아프리카 정부들은 이런 상황에서 장기적인 자금 계획에 대한 동기부여도 없고, 개발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볼 이유도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 국가들은 당시 적절한 제도들, 숙련된 대국민 서비스, 원활히 운영되는 기업체, 효율적인 법적 사회적 제도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고 전후에 필요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금이었습니다. 즉 마셜플랜은 재건의 문제였지 경제개발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아프리카는 사실상 개발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는 개발기구들이 독재적이고 부패한 정부로 소문난 가장 타락하고 무책임한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계속해서 원조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경제성장과 빈곤 퇴치이지만, 이는 부패가 만연해 있는 환경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목표입니다. 원조 덕분에 수원국들은 부패가 부패를 낳는 원조의 악순환에 빠르게 빠져들게 됩니다. 해외 원조는 언제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을 제공함으로써 부패한 정부를 지탱해줍니다. 타락한 정부는 법치, 투명한 공공제도의 설립, 시민의 자유 수호를 방해함으로써 빈곤국에 대한 국내외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립니다. 심화되는 불투명성과 점점 줄어드는 투자는 경제성장을 감소시키고, 이는 더 낮은 취업 기회와 빈곤의 증가를 불러오기 때문에 이처럼 늘어나는 빈곤에 대한 대책으로 공여국들은 또 다시 많은 원조를 하게 되고, 하강하는 빈곤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 순환은 저개발을 영속화하고, 경제적 실패를 확정짓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부패를 양산하는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조제공은 계속 이루어집니다. 개발기구들은 단순히 차관을 제공해야 하는 압박감이 있습니다. 세계은행은 만여명의 직원이 있고, IMF는 2,500여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유엔기구와 NGO, 민간 자선단체와 정부의 원조기구 직원들까지 더하면 50만 명 가량이 됩니다. 원조를 제공받는 관리들의 생계와 마찬가지로 원조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생계도 원조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회계연도에 대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조금이라도 지출되지 않은 금액이 있으면 이후의 원조 프로그램이 대폭 삭감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공여국들 역시 돈을 퍼주지 않으면 빈곤국들이 빚을 되갚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공여국들의 재정 상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또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국가에 대량의 돈이 유입되면 아무리 경제가 탄탄하다 해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상당한 규모의 원조금이 마구잡이로 유입된다면 국내 저축과 투자 감소, 인플레이션, 수출 감소와 같은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결국 원조는 선진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과거 식민지의 엘리트 계층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원조제도에 새로운 방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국을 위시한 투자국들은 에너지자원을 받는 대가로 공공기반시설을 건설해주는 교환 시스템을 제공하고, 이런 방식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공공기반시설을 통해 무역이 발생하고, 무역을 통해 빈곤탈출에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두고 선진국이 도덕적 책임감을 느낀다면 숙고해야 할 문제는 원조가 아니라 무역임을 여러 수치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조를 포기하고 채권발행과 무역을 택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원조를 택한 국가들에 비해 빠른 성장과 빈곤탈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가 대출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융대출을 해주는 혁신을 일으킨 이래 전 세계 43개국에서 이러한 모델을 채택합니다. 이러한 소액금융에도 반대의견은 존재하는데 높은 이자, 빚을 굴려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방식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어떤 대출에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사안이며,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소외되어 있던 빈곤층들이 금융 역학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역을 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들인 농업의 경우 선진국의 상품들과 경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OECD 회원국들은 거의 3000억 달러를 자국의 농업 보조금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OECD국가들이 모든 개발도상국에게 제공하는 총 원조금의 세 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아프리카는 이 같은 구속적인 무역 엠바고 때문에 연간 5000억 달러 정도의 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조를 중단하면 당장에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 아사할것과 같은 이미지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아프리카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동안 유입된 원조금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정치적 의지입니다. 선진국들의 정치인들은 부양해야 할 원조산업이 있고, 농민들을 달래야 하며, 선거구민들의 분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때문에 아프리카의 종말에 대해서까지 걱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차라리 원조금 수표에 서명하는 일이 훨씬 더 쉽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도 원조 모델을 버려야 할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아프리카의 변화에 대한 과제는 선진국 시민들의 몫입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성장기회법안이 탄생한 계기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위해 무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의회에 청원한 6만명의 미국 시민들의 힘이였습니다. 아프리카 개발의제를 활성화하는데 필요한 것은 이러한 유형의 행동주의입니다. 아프리카 개발의 난관을 해결하려면 개발에 어떤 효과가 있고 없는지에 대한 새로운 의식 수준과 더욱 폭넓은 개혁과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속담처럼,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 잡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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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내일 - 쓰레기는 어디로 갔을까
헤더 로저스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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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강대한 문명은 거대한 유적을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크메르인들은 앙코르와트를 후세에 남겼습니다. 그 시대를 상징하고, 천년 넘게 이어져올 유산을 유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거대한 유적을 이미 완성시켰습니다. 지평선 너머까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유적, 쓰레기 입니다. 현재 전세계인들은 한사람당 하루에 7kg의 쓰레기를 버림으로서 이 거대한 유적을 완성시켰습니다. 계속 소비하고, 계속 버립니다. 낡은 물건은 버리고 신제품을 사는 것이 훨씬 돈이 덜 들기 때문입니다. 쓰레기에 관해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불행한 부산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사실 자본주의의 성공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쓰레기는 완전히 실현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입니다.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쓰레기들은 모두 자연에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였고, 20세기 초만 해도 많은 부분의 쓰레기들이 자체적인 재활용 시스템을 통해 해결됬습니다. 당시의 재활용 제도를 역사학자 리처드 와인스는 확대된 재활용이라고 표현했는데, 농작물은 도시로 배달되어 팔렸고, 분뇨와 찌꺼기는 농촌에 팔렸습니다. 도시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이용해 돼지를 키우는 방식은 가장 흔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선모충병이 확산되고, 1953년에는 수포성피진이라는 돼지수포병이 발병하자 보건당국은 찌꺼기를 돼지에게 먹이는 일을 완전히 금지했습니다. 찌꺼기를 익히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건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도시에는 점점 쓰레기가 쌓여 갔고, 각종 전염병과 악취라는 결과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시민협회들은 쓰레기와 불결함이 사회 혼란과 분명히 연관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경고했지만, 지도층은 새로운 산업 경제에서 경제적 양극화를 문제의 원인으로 바라보지 않고, 도덕적 차원에서 슬럼 거주자의 사망과 고통에 접근했습니다. 쓰레기의 범람을 정신적 타락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하지만 곧 공학자들, 지방정부, 그리고 기업 소유주들은 깨끗한 거리는 곧 이동이 편리해짐을 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공장과 사무실과 시장에 쉽게 갈 수 있으며, 이 모두는 경제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입니다. 따라서 도로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어느 때보다 더욱 긴급한 사회적 의제가 되었습니다. 이전의 중류계급과 엘리트들은 높은 세금으로 공공도로와 대로를 관리하는 데 저항했지만, 인식의 변화 이후 공공서비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개혁적인 정부와 손을 잡았습니다. 시 공무원들은 거리를 청소하는 일꾼들에게 지역의 기업에게 중요한 도로를 자주 청소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외딴 지역의 거리나 노동계급과 이민자 거주지의 도로는 우선순위에 들지 않았고 청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빈민, 노동계급, 이민자 거주지에는 여전히 쓰레기가 굴러다녔습니다.

당시 등장한 위생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스스로를 중립적이고 정치를 넘어서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엔지니어들은 공적인 비판을 벗어났지만, 이 전문기술자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습니다. 막강한 기업인들의 영향력을 통해 쓰레기 처리 분야에 자신들의 세계적인 관점을 불어넣었습니다. 기업의 이익이 엔지니어링 문화를 형성했고, 실무자들이 공공선이나 도덕적 청렴을 자유시장 경제 발전보다 우위에 두지 못하게 합니다. 엔지니어들은 쓰레기의 개념화를 날이 갈수록 거대기업의 이익과 기대를 반영하게 되었는데, 이 현대의 쓰레기 전문가들은 쓰레기를 완전히 다른 물질이자 더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병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시장 시스템에 대한 위생공학자들의 묵인 덕분에 대중은 나날이 많아지는 쓰레기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소비하고 점점 더 많이 버렸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기가 버린 쓰레기를 직접 해결해야 했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 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진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치단체의 기반시설이 생겨나면서 치우는 행위는 공적인 것이 되었고, 쓰레기는 대중의 눈과 의식으로부터 사라져버렸습니다.

1939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도 쓰레기를 매립한 땅에 세워졌다. 박람회 주제는 '내일의 세계를 건설하며'라는 문구였다. 이는 박람회 역사 최초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슬로건이었다. 분명히 미래는 쓰레기 위에 건설될 것이었다. 과거의 죽은 상품들을 기초로 미래 상품을 쌓아올린 자본주의의 기념탑을 보며 발터 벤야민은 박람회를 보며 "상품 숭배를 위한 성지 순례지다" 라고 평가했다. - p.124 

경제발전의 흐름 속에서 생산성은 점점 늘어갔고, 더 많은 제품이 생산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소비가 뒷받침되야 했습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선 기존 제품을 빨리 쓰고 버려야 했기 때문에, 제품을 만들때 제품의 수명을 짧게 만드는 노후화가 중요해졌습니다. 내재화된 노후화의 정점은 일회용 제품이었는데, 청결과 편리라는 매력적인 두 가지 기치를 내걸고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1961년에는 처음으로 일회용 기저귀를 선보였고, 질레트는 일회용 면도기 디자인을 꾸준히 발전시켜 일회용 면도기를 기존 면도기의 대용물로 대체시킵니다. 심지어 알루미늄 컴퍼니 오브 아메리카라는 회사에서는 귀찮게 설거지할 필요 없이 쓰고 나서 그냥 버리면 되는 프라이팬을 출시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있었지만, 거대기업들은 비영리단체를 조직해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기업들이 후원하는 비영리단체는 쓰레기 논쟁의 용어를 바꾸어놓음으로써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완전히 변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 캠페인은 나날이 늘어가는 쓰레기가 개인의 나쁜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대중을 교육했고, 기업 규제와 먼 입법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보람이 있어서 미국에서는 1957년에 버몬트 법이 철회되었고, 포장재의 사회적 억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기업들은 그들의 위대한 문화적 발명품, 쓰레기를 지켜냅니다.

절약과 저축은 오늘날 시민권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부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기계를 돌려야 한다. 기계가 돌아가야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시민은 낡은 것을 고쳐 쓰지 않고 새것을 산다. 찢어진 구두는 버려야 한다. 꿰매면 안 된다. 자동차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하치장에 갖다 버려라. 새는 냄비, 고장난 우산, 가지 않는 시계는 청소부에게 주어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기계를 돌려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거대한 생산품을 소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 리처드슨 라이트 

이러한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투기, 소각, 매립 등이 있는데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매립입니다. 톤당 비용이 가장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매립에도 여러 단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립지에서 나오는 매립가스는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키는 주요 원인입니다. 매립가스는 메탄을 함유하고 있는데,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열을 가두는 효과가 21배나 큽니다. 위생적인 매립시스템이 도입되었지만, 매립 시스템은 쓰레기 문제의 단기적 해결책일 뿐입니다. 지금은 유독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플라스틱, 솔벤트, 페인트, 배터리, 그 밖의 유해물질을 담은 채 포장된 매립지는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매립지는 기껏해야 50년을 견딜 수 있으며, 매립지 한 군데가 폐쇄되고 30년이 지나면 그 소유자는 더 이상 오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며 그 책임은 사회에 돌아옵니다. 오늘날 쓰레기 수출은 세계 규모로 이루어집니다. 공산품이 개발도상국에서 생산될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 폐기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땅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와 멀어지기 때문에, 선진국 소비자들은 쓰레기 처리의 환경적 악영향을 더욱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대중들에게 널리 지지를 받은 재활용은 분명 소각이나 매립보다 환경적으로 훨씬 건강한 것이지만 이 또한 여러 제약이 있습니다. 분류된 모든 폐기물이 실제로 재생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속류와 유리를 착실히 분리하고 나서도 이를 구매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분리수거된 많은 물자가 곧바로 소각로나 매립장으로 가서 처분됩니다. 2000년 기준으로 알루미늄은 54퍼센트, 유리는 26퍼센트, 종이 40퍼센트, 플라스틱은 5퍼센트의 재활용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재활용은 소각이나 매립으로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재활용을 통해 보존되는 에너지는 매립지에 쓰레기를 버리는 평균 비용의 5배의 가치를 지니며 처녀자원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도 합니다. 재생 알루미늄 캔은 생산할 때에 비해 에너지가 96퍼센트나 적게 들고, 재생 펄프는 물이 58퍼센트 적게 들고 대기오염 물질을 74퍼센트나 덜 만들어냅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원천축소나 재사용과 달리, 재활용은 소비 수준을 줄이지 않으면서 기존의 생산 과정에도 거의 충격을 주지 않기 때문에 선호하는 방식입니다. 쓰레기를 줄이는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규모 실업과 그에 따르는 가난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폐기물의 재사용이 생산직 일자리를 없앤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재활용은 실제로 노동수요를 증가시켜, 매립이나 소각 방법에 비해 톤당 10배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2000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재활용으로의 변화는 90명이 일자리를 잃은 반면 9000명이 새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재활용은 소규모 사업의 기회를 창출하고, 숙련 노동의 필요성을 높이며, 지역 경제를 활성화합니다.

재활용은 상당한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문화적인 잣대로 볼 때 더욱 강력한 개혁을 대중이 외면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재활용은 소비증대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에서조차 환경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버려진 쓰레기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경제의 산물은 아닙니다. 쓰레기에서 얻는 이익은 불평등하게 분배되지만 환경오염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쓰레기는 생산의 파괴적 여파를 보여주는 축소판입니다. 우리가 쓰레기라는 일상의 물질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영역의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편리, 소비 사회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기존의 관습을 유지하는 해결책입니다. 기술적 해결책은 단기간에 효과가 있는 듯 보일 수 있으나, 쓰레기를 양산하는 기반구조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인 해결책으로는 알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낭비하는 방식은 단순히 유기적인 인류 발달의 정상적인 결과가 아닙니다. 쓰레기의 양산은 자연법칙이나 알 수 없는 근본적인 흐름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며 사회적 힘의 산물입니다. 결국 대량생산 구조를 재편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변화해야만 쓰레기가 줄어들 수 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쓰레기는 버리면 사라지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지만 , 쓰레기는 곧 버린 사람의 발 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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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의 발명 - 미국의 북한 이란 시리아 때리기
브루스 커밍스 외 지음, 차문석 외 옮김 / 지식의풍경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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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은 2002년 의회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북한,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합니다. 또한 2003년엔 미국과 시리아의 관계가 격돌의 길에 들어서자 백악관 대변인인 애리 플라이셔는 시리아를 불량배 국가라고 불렀고, 리비아나 쿠바와 함께 악의 축의 2진 선수라고 말합니다. Axis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그 연설은 굉장히 대담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단어에 내재된 의미를 고려하려면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이 악을 지정할 수 있고, 악을 징계하여 쳐부술 자격이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미국은 선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내재된 선과 악의 프레임은 연두교서 이후 이라크전을 가능케 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미국에게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국가들의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대사, 대미관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어떻게 악의 축이 발명되었는지를 추적합니다.

포크의 멕시코 공격에서부터, 남부의 섬터 요새 폭격, 메인호와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 진주만, 한국전쟁, 통킹 만 사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결심했건 하지 않기로 결심했건 간에 미국 대통령들은 그래도 적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는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역대 대통령들의 모든 격언을 위반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이 있기 열흘 전에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어찌하면 우리를 위험에 과대하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일본인이 먼저 공격하는 입장에 처하도록 계략을 구사할 수 있겠는가?"고 질문받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놨고, 후에 스팀슨은 후에 의회 조사에서 "적이 주도권을 쥐고 달려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위험했을지라도 우리는 일본인들이 먼저 공격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이의 마음속에 누가 침략자인지에 대해 의혹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 미국 국민들에게서 완벽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진술한 바와 같이 월등한 힘을 가진 국가는 더 허약한 측으로 하여금 먼저 공격하게 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루스벨트와 스팀슨으로 시작되는 역대 정치인들이 선호했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2년 9월에 발표한 국가 안보 독트린을 통해 미국인이 얻은 것은 선제 핵공격이였고, 미국 자신과 그 동맹국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 해당하는 확산 금지 였고, 펜타곤의 수십억에 이르는 밝혀지지 않은 예산이었고, 세계에서 악을 제거한다며 사람을 암울하게 만드는 미래로 향하게 하는 끝없는 전쟁의 청사진이였습니다. 이 독트린이 선언된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인 콘돌리자 라이스는 선제공격이 미국에게 좋긴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침략의 구실로 선제공격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우려하던 동맹국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습니다. 라이스의 견해에 따르면, 선제공격은 예상되는 자기방어, 즉 먼저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미국의 권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비공식적으로는 2000년 이전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앨리슨의 극비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기본 정책은 아시아와 다른 장소에서 우위에 있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고 함락하는 것이므로, 한국에서의 유엔 작전들은 소비에트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 비공산주의적 침투가 가능한 단계를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NSC81 문서에 따르면 소비에트와 중국의 개입 위협이 없다면 맥아더에게 북한으로 진격할 권한을 부여해 사실상 북한 공격을 승인해놓기도 했습니다.

북한과 미국은 평화를 향한 길에 들어선 적도 있습니다. 북한의 군산복합체를 통솔하고 있는 조명록 장군은 빌 클린턴을 방문해 상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지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서면 서약을 협상했고, 클린턴은 북한이 모든 중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는 댓가로 원조를 해주겠다는 거래에 서명하려 했습니다.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은 김정일에게 마이클 조던이 사인한 농구공을 선물했고, 김정일은 선물받자 마자 공을 밖으로 들고 나가 드리블해 보고 싶어했습니다. 이러한 협정은 윌리엄 페리, 웬디 셔먼 등이 10년동안 북한이 다양한 협정을 체결하도록 설득한 노고의 결과물이였는데, 그 동안 우익 공화당원들의 비방, 인신공격, 통일교의 워싱턴타임스가 자주 들려준 왜곡되고 신경질적인 비난에 맞선 결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자 이러한 정책은 급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고문단은 이러한 변화에 공적으로는 회담이 당혹스러웠다고 평가했지만 사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에게 악담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데이빗 생어는 한 기사를 통해 북한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원자 폭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성명을 기정사실로 둔갑시킵니다. 이 기사에서 말하는 증거란, 영변 핵 단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핵연료를 플루토늄으로 전환시킬 때 나오는 크립톤85의 수치가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크립톤85 방출이 정상적인 환경수치를 넘어서지 않을 정도의 소량으로 우라늄을 농축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 또는 두개의 폭탄이란 정보는 1993년의 정보 평가서에서 비롯되었는데, 정부의 북한 전문가들을 소집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핵을 제조했다고 생각하는지 의중을 털어놓도록 하여 작성된 보고서였습니다. 절반의 사람들이 핵을 제조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통해 확률은 50대 50이라고 말한 것이 기정사실화된 것입니다. 그 후에 잠정적인 보전책으로 미국이 제공해 오던 난방용 중유 공급을 중단했고, 북한은 그에 대응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고,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한국에서의 위험은 북한의 기만과 도발, 새로운 한국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미국의 오래된 전쟁 계획, 부시의 새로운 선제공격 독트린 등이 합쳐진 것에서 유래합니다. 부시 독트린은 북한이 위기를 일으키면 핵 선제공격을 한다는 기존의 계획과 결단을 합쳐 놓고 있는데, 2002년 대통령 결정명령 17호가 누출되었을때, 북한이 선제공격의 과녁으로 올라가 있다는데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시의 정책은 남한과의 관계도 얼어붙게 만들었는데, 노무현의 보좌관들은 부시 행정부에 미국이 남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공격한다면 남한과의 동맹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거의 성공할 뻔한 클린턴과 부시의 차이는, 부시가 두 국가 사이의 반목을 끝내기를 거부한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커밍스가 바라보기에 20세기 후반부터 표출된 북한의 핵 문제란 기본적으로 미국의 핵 위협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 협정 체결을 통한 전쟁 종식을 꾀하지 않자 북한이 생존 차원에서 추구하게 된 것이 핵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의 붕괴와 1991년 걸프전의 승리로 악마로 변장시킬 주적이 사라지자 미국은 역사를 무시한 채 역사로부터 북한을 뽑아내었으며, 북한이 악의 축으로 발명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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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
폴 방키뭉 지음, 김미선 옮김, 남희섭 감수 / 서해문집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2년 전, 우리나라에서 노바티스 사에서 개발한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소 의약품인 '글리벡'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습니다. 글리벡의 가격은 건강 보험 등재 당시 100mg의 약값이 23,045원이며, 보험급여 적용으로는 21,200원 입니다. 백혈병 환자가 글리벡의 효능을 보기 위해선 하루 600mg의 복용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환자가 지출하는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평균 월 2,765,000원을 글리벡에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높은 가격 때문에 2008년 환자와 시민 단체들이 약가 인하 조정 신청을 보건복지가족부에 제출했으며, 2009년 9월 1일에 복지부 장관 직권에 의해 시판가의 14%가 인하된 가격인 19,818원에 팔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노바티스는 약가 인하 취소 소송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2010년에 복지부의 약가 인하 고시를 취하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글리벡의 사례는 어떤 의미로는 불치병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무리 효과적인 약이 나와도 그것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불치병입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의하면, 매년 10,000,000명이 의약품은 개발되어 있지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옥스팜, 액트 업 등의 비정부기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의약품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는 곧 다국적 제약 회사와의 충돌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의약품의 특허권에 대한 문제, 특허가 만료된 약인 제네릭 약의 접근을 얼마나 용이하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기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윤 추구의 논리를 주장합니다. 치료제 개발로 인한 이윤을 내기 위해선 필연적이며, 특허권이 없다면 신약 개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이 의약품의 특허권은 계속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1980년대에는 특허권이 8년이였지만, 이제는 20~25년으로 길어졌습니다. 또한 제약회사들은 특허권을 연장하기 위해 편법을 쓰는데, 에버그린 전략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약의 특정 부분만을 추출해 새로운 이름을 붙이거나, 약의 디자인과 색깔을 바꿔서 특허를 재신청할 수 있습니다.

회수는 대부분 제품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충분한 이윤이 생기지 못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다국적 기업들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이윤이 먼저죠. 생명은 그 다음이지요. - 엘루앙 도스 산토스 피네이루 

하지만 제약회사의 보고서를 보면 새로운 의약품의 연구개발비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위12개 제약 회사는 매출의 12.4%를 연구개발비로 사용했는데, 마케팅과 관리 비용으로는 34.3%의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또한 신약 개발에는 공공 부문의 자금이 많이 지원됩니다. 많은 경우 공공 부문에서 90%의 비용을 대기도 하는데, 이는 제약 회사가 주장하는 만큼 신약 개발에 특허권이 보장해줘야 할 만큼의 돈을 쓰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에 반해 수익은 전부 제약 회사로 돌아갑니다. 또한 약의 개발의 방향은 상업의 논리대로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의약품의 개발과 생산은 병에 걸린 인구의 규모에 좌우되지 않고, 치료제의 상용화를 결정짓는 절대 변수는 시장의 구매력입니다. 선진국은 의약품의 80%를 소비하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약이 개발됩니다. 에이즈 약보다는 대머리 치료제가 중요하며, 말라리아 약보다는 다이어트 약이 중요합니다. 시장 경제 이론에서 다분히 고전적이라 일컬어지는 기업합병 현상 덕분에 제약 회사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근미래에는 5개 내지 10개 정도가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진짜로 약이 절실한 병에 대한 접근이 더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약재나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힘든데, 이미 많은 식물이나 물질이 특허화되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약품 접근권에 대한 비정부기구들과 개발도상국들의 투쟁은 인상적입니다. 브라질은 에이즈 퇴치를 위해 카피의약품을 유통시킬 것이라고 결정했고, 결국 다국적 기업들로부터 40%이상의 가격인하를 합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성공에 영국의 소설가인 존 르 카레는 "한 마디로 브라질은 거대한 다국적 제약 회사의 위협과 항의에 흔들리지 않고 자국의 주민들이 살아갈 길을 마련한 것이다." 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브라질의 행보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에 브라질을 제소하지만 미국과 브라질의 힘겨루기는 결국 브라질이 승리합니다. 2001년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에 브라질을 상대로 낸 소송을 취하합니다. 이 결정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통과시킨 법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넬슨 만델라가 남기고 간 에이즈 해결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제약산업계의 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승리를 거둡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피의약품을 비난해온 미국 정부가 카피의약품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9.11테러가 터진 후 생화학테러를 대비해 탄저병 약을 비축하기로 결정했는데, 탄저병에 쓰이는 항생제 가운데 하나인 시프로가 너무 비싸다고 문제삼은 것입니다. 미국 보건부 장관인 토미 톰슨은 독일 제약 회사인 바이엘을 위협했고, 시프로의 특허권자인 바이엘이 가격을 더 낮추지 않는다면 카피의약품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런 위협에 바이엘은 굴복했고, 애초에 헐값에 팔고 있었던 항생제 1개당 1.75달러를 1달러까지 낮추게 됩니다. 이 독특하고도 위선적인 사례는 특허권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은 질병과의 다른 싸움, 인간과 병원균의 싸움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투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수면병 등으로 인한 재앙적인 사망률 통계의 이면에는 이러한 비극이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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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패스트푸드 - 죠닌의 식탁, 쇼군의 식탁
오쿠보 히로코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라는 말은 대부분의 음식문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의 주인 또한 대부분 일반적인 서민들입니다.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닌데, 덴푸라(튀김), 스시(초밥), 소바(메밀국수) 등은 모두 서민들이 선택한 음식들입니다. 그 시작이 길거리의 포장마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에도의 패스트푸드 문화는 일본 음식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일본요리가 들어와 있고, 꽤나 대중화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기에 음식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본의 음식문화에서도 큰 역할을 차지하는 에도의 패스트푸드 들은 매우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의 포장마차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길거리 음식 판매와 유사한 형태였습니다. 독특한 점은, 튀김처럼 불과 기름을 다루는 업종은 화재를 우려해 야외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영업을 하더라도 집 앞의 도로에 나와서 장사를 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튀김은 대표적인 패스트푸드 음식인데, 고열량 식품으로 당시 불교의 요리인 쇼진요리가 중심이던 사람들의 영양에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덴푸라라는 말의 어원은 포르투갈어의 덴페라, 네델란드어의 덴포라, 그 외에 중국유래설 등 다양한 추측이 있습니다. 유자 기름이나 참기름의 생산량 증가와 에도만에서 잡힐 수 있는 생선이라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다양성 등은 덴푸라 포장마차의 성황에 큰 역할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메밀국수와의 조합이나 고급 요리집에도 들어감으로써 점차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됩니다.


현대에 볼수 있는 스시의 시작점은 나레즈시인데, 생선의 뱃속을 손질하여 그 속을 밥으로 채워 무거운 돌로 눌렀다가 간을 맞추는 형태로서 기원은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밥의 유산 발효를 이용해 생선을 보존 식품으로 만드는 이 방법은 매우 심한 악취가 난다고 합니다. 이 나레즈시는 무로마치시대에 들어와 나마나레즈시로 변화되었는데, 나레즈시에 비해 절여두는 기간이 더 짧아져 2주에서 한달간 절인 후 먹는 음식이였습니다. 숙성음식의 단점인 오랜 시간을 해결하기 위해 니기리즈시라는 방법이 만들어졌는데, 식초로 맛을 낸 밥에 조미한 생선을 얹어 손으로 뭉쳐서 만든 것으로, 현대의 초밥과 유사합니다. 먹는 사람의 기호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을 뿐 아니라 주문즉시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패스트푸드의 조건을 달성했고, 이는 서민들의 많은 선택을 받게 됩니다.


그 외에도 포장마차에서 선호받은 음식은 소바(메밀국수)와 가바야키(장어구이)입니다. 소바의 기록은 1614년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그 이전에는 수제비나 떡, 죽 등으로 메밀을 이용했습니다. 가다랭이포 국물과 간장이 보급되면서 소바가 유행했는데, 당시에는 우동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에도에서는 소바를 더 좋아했습니다. 가바야키는 장어를 보다 먹기 쉽게 반으로 갈라 굽는 모습으로, 간장과 설탕의 보급 덕분에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게 된 음식입니다. 또한 야나가와나베(추어탕), 양갱, 나라챠메시(찻물로 지은 밥), 쓰쿠다니(생선이나 조개, 해초등을 조린 조림 요리), 가다랭이, 아사쿠사노리(김) 등도 에도의 서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음식들입니다. 특히 가다랭이의 경우 마누라를 저당 잡혀서라도 먹는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요리는 맛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그 나라, 민족, 지방, 개개인을 나타내는 문화이기도 하다. -《차별받은 식탁》p.179 

이런 에도의 패스트푸드의 발전은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에 인구가 집중되었고, 번화가나 제례, 공양, 불꽃놀이, 꽃구경, 달구경과 같은 야외 유흥의 발전과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에도에 온 가난한 남성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패스트푸드를 선택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봉건제도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서민 음식들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높은 계층이였던 무가나 상가 주인들은 군것질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 하여 외출할때는 포장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거나 가게에 주문을 했습니다. 쇼군 또한 하루에 10인분의 요리를 준비할 정도로 호화로운 음식을 즐겼지만, 이런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했었습니다.

서민들이 먹는 음식과는 구별 지으려는 생각 등, 권력을 가지게 되면 불필요한 틀을 만들어 얽매이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는 것일까? - p.121 

수도 인구 100만의 다양성, 260여년이라는 통일기간, 조선과 네덜란드, 중국과의 교류 등으로 인해 에도의 음식문화는 완성됬고, 더 나아가 현대의 일본음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소득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포장마차와 노상판매 음식들인 덴푸라, 경단, 가바야키, 오뎅, 단팥죽 같은 패스트푸드는 일본음식의 큰 주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특권층을 위한 음식이 있고, 일본에도 존재했으며, 그런 일본의 고급 음식들 또한 일본 음식문화의 한 일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음식이야 말로 그 나라 음식문화의 정체성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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