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
폴 방키뭉 지음, 김미선 옮김, 남희섭 감수 / 서해문집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2년 전, 우리나라에서 노바티스 사에서 개발한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소 의약품인 '글리벡'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습니다. 글리벡의 가격은 건강 보험 등재 당시 100mg의 약값이 23,045원이며, 보험급여 적용으로는 21,200원 입니다. 백혈병 환자가 글리벡의 효능을 보기 위해선 하루 600mg의 복용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환자가 지출하는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평균 월 2,765,000원을 글리벡에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높은 가격 때문에 2008년 환자와 시민 단체들이 약가 인하 조정 신청을 보건복지가족부에 제출했으며, 2009년 9월 1일에 복지부 장관 직권에 의해 시판가의 14%가 인하된 가격인 19,818원에 팔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노바티스는 약가 인하 취소 소송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2010년에 복지부의 약가 인하 고시를 취하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글리벡의 사례는 어떤 의미로는 불치병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무리 효과적인 약이 나와도 그것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불치병입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의하면, 매년 10,000,000명이 의약품은 개발되어 있지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옥스팜, 액트 업 등의 비정부기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의약품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는 곧 다국적 제약 회사와의 충돌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의약품의 특허권에 대한 문제, 특허가 만료된 약인 제네릭 약의 접근을 얼마나 용이하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기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윤 추구의 논리를 주장합니다. 치료제 개발로 인한 이윤을 내기 위해선 필연적이며, 특허권이 없다면 신약 개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이 의약품의 특허권은 계속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1980년대에는 특허권이 8년이였지만, 이제는 20~25년으로 길어졌습니다. 또한 제약회사들은 특허권을 연장하기 위해 편법을 쓰는데, 에버그린 전략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약의 특정 부분만을 추출해 새로운 이름을 붙이거나, 약의 디자인과 색깔을 바꿔서 특허를 재신청할 수 있습니다.

회수는 대부분 제품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충분한 이윤이 생기지 못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다국적 기업들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이윤이 먼저죠. 생명은 그 다음이지요. - 엘루앙 도스 산토스 피네이루 

하지만 제약회사의 보고서를 보면 새로운 의약품의 연구개발비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위12개 제약 회사는 매출의 12.4%를 연구개발비로 사용했는데, 마케팅과 관리 비용으로는 34.3%의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또한 신약 개발에는 공공 부문의 자금이 많이 지원됩니다. 많은 경우 공공 부문에서 90%의 비용을 대기도 하는데, 이는 제약 회사가 주장하는 만큼 신약 개발에 특허권이 보장해줘야 할 만큼의 돈을 쓰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에 반해 수익은 전부 제약 회사로 돌아갑니다. 또한 약의 개발의 방향은 상업의 논리대로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의약품의 개발과 생산은 병에 걸린 인구의 규모에 좌우되지 않고, 치료제의 상용화를 결정짓는 절대 변수는 시장의 구매력입니다. 선진국은 의약품의 80%를 소비하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약이 개발됩니다. 에이즈 약보다는 대머리 치료제가 중요하며, 말라리아 약보다는 다이어트 약이 중요합니다. 시장 경제 이론에서 다분히 고전적이라 일컬어지는 기업합병 현상 덕분에 제약 회사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근미래에는 5개 내지 10개 정도가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진짜로 약이 절실한 병에 대한 접근이 더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약재나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힘든데, 이미 많은 식물이나 물질이 특허화되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약품 접근권에 대한 비정부기구들과 개발도상국들의 투쟁은 인상적입니다. 브라질은 에이즈 퇴치를 위해 카피의약품을 유통시킬 것이라고 결정했고, 결국 다국적 기업들로부터 40%이상의 가격인하를 합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성공에 영국의 소설가인 존 르 카레는 "한 마디로 브라질은 거대한 다국적 제약 회사의 위협과 항의에 흔들리지 않고 자국의 주민들이 살아갈 길을 마련한 것이다." 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브라질의 행보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에 브라질을 제소하지만 미국과 브라질의 힘겨루기는 결국 브라질이 승리합니다. 2001년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에 브라질을 상대로 낸 소송을 취하합니다. 이 결정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통과시킨 법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넬슨 만델라가 남기고 간 에이즈 해결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제약산업계의 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승리를 거둡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피의약품을 비난해온 미국 정부가 카피의약품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9.11테러가 터진 후 생화학테러를 대비해 탄저병 약을 비축하기로 결정했는데, 탄저병에 쓰이는 항생제 가운데 하나인 시프로가 너무 비싸다고 문제삼은 것입니다. 미국 보건부 장관인 토미 톰슨은 독일 제약 회사인 바이엘을 위협했고, 시프로의 특허권자인 바이엘이 가격을 더 낮추지 않는다면 카피의약품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런 위협에 바이엘은 굴복했고, 애초에 헐값에 팔고 있었던 항생제 1개당 1.75달러를 1달러까지 낮추게 됩니다. 이 독특하고도 위선적인 사례는 특허권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은 질병과의 다른 싸움, 인간과 병원균의 싸움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투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수면병 등으로 인한 재앙적인 사망률 통계의 이면에는 이러한 비극이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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