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유 없는 반항, 1955년, 니콜라스 레이

 2. 위험한 질주, 1953년, 라슬로 베네덱

 3. 폭력 교실, 1955년, 리처드 브룩스

 4. 용자들은 외롭다, 1962년, 데이빗 밀러

 5. 군중 속의 얼굴, 1957년, 엘리아 카잔

 6. , 1954년, 페데리코 펠리니

 7. 달콤한 인생, 1960년, 페데리코 펠리니

 8. 인생유전: 천국의 아이들, 1945년, 마르셀 카르네

 9. 피아니스트를 쏴라, 1960년, 프랑소와 트뤼포

10.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1958년, 리처드 브룩스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 찰리 채플린의 [어깨 총] 역시 중요하게 언급했다고.

 

출처: http://www.daysofthecrazy-wild.com/video-ten-films-that-had-a-big-impact-on-bob-dy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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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덧씌워진 여러 치장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치 유행처럼 번지며 그 치장들을 하나씩 거둬내고 있는 진화생물학 지식들... 그에 대해 나는 종종 학부 시절 투신했던 회계학의 역분개를 떠올리곤 한다. 발생주의에 입각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는 기업의 실체를 이상적인 이론대로 드러내줄 수 있되 흑자도산을 감지 못한다. 그에 재무제표의 이론적 치장을 거둬내는 역분개의 현금흐름표가 진화생물학 이론, 가설들이나 마찬가지다. 허나 현금주의 회계만으로 한 경제 주체의 본질을 파악하려다간 배가 산으로 가 버림에.


젊을 적 겉멋든 실존을 찾으며 속된 행복이나 희망 따위 개념 자체를 부정했었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해왔다. 나는 씁쓸한 현실 인식, 자각만으론 살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돌이켜 보면 행복이란 개념 자체를 내 생에서 배제하고 해체하려던 몸부림 역시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금 다른 신작을 몇 편 더 챙겨볼까 하다가 저절로 손이 옮겨간 [사요나라 이츠카]를 또다시 플레이, 뻘려들다시피 보았다. 도대체 이 작품은 왜 열 번을 넘게 거듭봐도 나를 이토록 사로잡는 걸까. 서재혁이 작곡한, 황홀할 정도로 파고들어 혼을 뒤흔들어 놓는 음악이.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나카야마 미호의 마성이. 무엇보다 젊었을 적 가지 않은 아니, 가지 못한 길에 서린 초로의 회한이... 점점 이렇게 현실 도피, 혼자만의 세계에 나를 두고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 나를 이제는 더 이상 부인하지 않으려 한다. 얼싸안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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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하라키리 (1962)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미이케 다카시 감독,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 하는 관객들은 무슨 죄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서전 비슷한 것], p.236)' 과장 좀 보태서, 일본영화사 100년의 거장이 마치 30년 후를 미리 내다 보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쓴 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 위에 군림하던 전통과 이념의 악용 및 폐해를 비판한 1962년작 [하라키리]를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그 전설적인 원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박 탓이었는지 모든 의미를 웅장하고도 섬세한 필치의 영상으로 전달하던 [하라키리]에 비해 과도하게 장식적인 숏과 설명조 위주 대사로 전개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개명된 제목 '일명(一命)'에서 감지되듯 오리지널의 복합적인 주제의식 중에도 유독 휴머니즘에 무게 중심을 둔 점이다. 특히 비운의 사무라이 모토메와 그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장인 한시로를 차례로 대면, 윤리지옥 통과제의를 거치며 고뇌하는 이와이 가문 사이토 카게이 집사의 마지막 비정하고 위선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부조리한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은폐되고 유지되는지를 냉철하게 주시한 1962년작에 반해, 야쿠쇼 코지가 분한 본작의 사이토 집사는 우유부단한 휴머니스트로 묘사되면서 다소간의 온기를 불어 넣는 대신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최적화된 원작의 정신을 상당 부분 희석, 훼손하고 있다. (그의 캐릭터에 절름발이 핸디캡을 부과함으로써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를 활유한 시도 역시 효과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인공 한시로의 일당백 결투에서 1962년작은 빈 주먹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내내 강조하는데 2011년작은 대개 손바닥을 펴고 있다는 차이가 눈에 띈다.) 
 

 

 

 

본편의 실책은 뭣보다 미이케 다카시에게 연출을 맡긴 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짧은 기간 안에 효율적으로 개성적인 영화를 찍어내는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다. 허나 그것이 컬트 지향일 경우로 한정된다. 원래 필모그래피상 등락이 심하기도 했거니와, 최근작 중에 2012년 [악의 교전]과 2013년 [짚의 방패]의 대조적인 결과야말로 그의 세계를 집약·대변해주는 일종의 징표라 할 수 있다. 전자 같이 다채로운 비주류 감성을 허용하는 펑크에선 거의 미친 듯한 폭발력을 선뵈는가 하면 후자처럼 일정한 주제와 메시지의 범주를 두는 정극일 경우엔 여러 부분 타협하면서 그 컨셉과 설정에 질질 끌려 다니곤 하는 것이다. 더욱이 본작은 오리지널 각본도, 소설 각색도 아닌 레전드 고전의 첨삭 리메이크이니 하물며. 평소 성공작에서의 재기 넘치는 고어 활극 때깔 때문에 낙점된 듯한데, 비범한 스타일과 문제의식으로 번뜩이던 올타임 클래식이 전혀 다른 세계관 및 성향을 지닌 감독과의 잘못된 궁합으로 인해 그 어떤 독자적인 결도 찾아볼 수 없이 주석만 달아 늘린 휴먼드라마로 패착한 듯하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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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30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은...
할복하면 역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가 생각납니다. 할복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줬던 것 같아요.

풀무 2016-10-01 00:26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무척 연관 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십 년 쯤 지났을까요. 칼에 지다,를 각색한 [바람의 검 신선조]를 보긴 했는데 영화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던 걸로 기억돼요. 붉은돼지님 주신 덧글에 원작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수입] Hara-Kiri: Death of a Samurai (할복 : 사무라이의 죽음)(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New Video Group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17세기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쟁 수요가 없어지자 그 흐름에 적응 못한 - 현대사회로 치면 실업난에 처한 - 사무라이들은 기근과 병고에 시달린다. 특히 억울하게 영지를 몰수당하고 영락한 주군을 떠나 떠돌던 낭인들 경우 다른 군주를 찾아가 구차하게 사느니 무사답게 자결로 생을 마감하겠노라 할복 의식을 치르기 위한 장소를 빌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군주는 그의 결의를 치하하고 일정 금액 생활비를 내주거나 아예 가신으로 삼는 것이 일종의 상호 암묵적인 관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피치 못할 할복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어 '광언할복(狂言切腹)'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존재했다. 다키구치 야스히코의 1958년 소설 '이문로닌키(異聞浪人記)'를 원작으로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이 연출한 [하라키리]는 이러한 에도 시대의 비극적인 위장 할복 사건을 에워싸고 난립하는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하라키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액자 구성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할복을 또렷이 대비하는 동시에 아우른다. 극한 생활고 속에 병약한 아내와 갓난둥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역 유지인 이와이 가문에서 위장 할복을 시도하던 치지와 모토메(이시하마 아키라)가 간계에 걸려들어 본보기로서 실제 감행하게 되는 처참하고 굴욕적인 할복.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등진 손자와 딸의 복수 및 갖은 모독을 당하며 고통스레 숨을 거둔 사위의 명예 복원을 위해 이와이 가문에 혈혈단신 뛰어들어 고도의 심리전으로 맞서다 육탄전까지 불사, 총격 세례 직전에 스스로 산화화는 주인공 한시로 츠구모(나카타이 타츠야)의 비장한 할복. 끝으로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악용, 비정한 논리로 진퇴양난의 덫에 옭아매어 능욕하면서 치지와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이와이 가문 충복들의 자결 내지 진실을 은폐하고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상명하달식 강제 할복.

 

 

 


배우들 연기부터 그들을 담아낸 테이크와 숏의 장단 및 호흡 안배, 정(靜)과 동(動)의 리듬감 배합까지 완벽하다.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은 '할복 의식'이라는 미명 하에 빚어지는 참극을 영화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구도와 명암, 동선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그 변질된 원칙주의 허례허식의 실체를 까발릴 뿐 아니라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인간 감정의 다양한 양태와 단면들을 치밀하게 배치한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롱테이크로 응시하는 이와이 가문의 가보, 기실 그 속이 텅 빈 채로 산 자들 위에 군림하는 붉은 갑주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울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정신, 인간의 존엄과 생명마저 잠식하는 그 과장된 이념에의 맹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당대의 황폐하고 부조리한 시대상 묘사가 그대로 작금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공명하는 수정주의 사무라이극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 리뷰 상품을 잘못 연결하여 새로 링크합니다.

http://dvd.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96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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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쉬운 리메이크작,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2011)
    from 잿불의 기억 2016-09-30 18:50 
    '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 하는 관객들은 무슨 죄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서전 비슷한 것], p.236)' 과장 좀 보태서, 일본영화사 100년의 거장이 마치 30년 후를 미리 내다 보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쓴 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 위에 군림하던 전통과 이념의 악용 및 폐해를
 
 
 
[수입] Why Don't You Play In Hell? (지옥이 뭐가 나빠)(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Cinedigm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소노 시온 감독이 젊을 적 인디영화 시절에 착안했다고 알려진 [지옥이 뭐가 나빠]는 한마디로 천진한 치기와 낭만이 어울어진 영상 광시곡이다. 영화적 활력으로 넘쳐나는 영화에 관한 영화 - 메타무비 - 이면서 소위 '마이너 뽕끼' 작렬, B급 무비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미친 영화'다.

 

야쿠자 보스 무토(쿠니무라 준)를 암살하러 온 반대파 야쿠자들이 되려 무토의 여장부 아내에게 황당하게 도륙되고 홀로 살아 남은 이케가미(츠츠미 신이치)는 피칠갑 난장 속에서 깜찍한 CM송을 곁들여 율동을 펼치는 무토의 딸이자 아역배우 미츠코(하라 나노카)에게 반한다. 한편 아마추어 영화광 히라타(나카지마 타츠야)를 비롯한 '퍽 보머스(Bombers)' 패거리들은 그날도 미친 듯이 온동네를 휘저으며 영화를 찍어대다 이소룡과 닮은 불량배 사사키(사카구치 타크)를 새로운 멤버로 영입하고, 도주중이던 이케가미까지 카메라에 담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출소를 앞둔 아내의 소원대로 어찌 해서든 장성한 딸 미츠코(니카이도 후미) 주연의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려는 보스 무토의 살벌한(?) 후원 하에, 이제 청년이 된 히라타(하세가와 히로키)와 '퍽 보머스' 영화패는 꿈에도 그리던 장편영화를, '세상에 길이 남을 액션 명작'을 찍게 된다. '무토'파와 그 철천지 원수 '이케가미'파의 사지절단 하드고어 실전을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있는 그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인간군상, 그들의 과거와 현재, 욕망과 열정이 '영화'를 구심점으로 한데 엮여 모인다.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복잡한 구도와 얼개를 이루지만 결국 절절한 '영화 사랑'이 작품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그 '사랑'이 [시네마 천국]에서 지향했던 양지바른 주류 클래식 필름들에 비해 온당히 대접받지 못했던 이른바 '싸구려' B급 취향에의 애정이고 헌사이며 찬가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내 경우엔 감상 도중 작품 정서와 주제가 절묘하게 확장되는 체험을 했다. 실존주의 부조리극으로 봐도 무방하리만치 시종 난무하는 억지와 우연, 피와 내장의 잔혹한 카니발이 소노 시온 감독의 엽기 코드 속에서 재기발랄 어울어져 빛을 발하는, 차라리 순수하다고 할만한 이 한 편의 '영화광의, 영화광에 의한, 영화광을 위한' 아수라 판타지를 넋놓고 즐기다 보니 역설적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 있었던 것이다. 망각의 저편에 두고 온, 지금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무엇. 그건 아마도 그 대상이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은 어떤 무모한 갈망, 간절한 발악, 지극한 그리움, 회한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나 자신, 실컷 웃고 보다가 작품 세계를 시적으로 축약했다 할 수 있을 엔딩 주제곡 끝소절에 문득 숙연해진 건 분명코 그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어나 세상에 떨어진 날부터 애초에 있을 곳 따윈 없어. 단지 지옥을 헤쳐 가는 이가 슬픈 기억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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