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하라키리 (1962)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미이케 다카시 감독,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 하는 관객들은 무슨 죄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서전 비슷한 것], p.236)' 과장 좀 보태서, 일본영화사 100년의 거장이 마치 30년 후를 미리 내다 보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쓴 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 위에 군림하던 전통과 이념의 악용 및 폐해를 비판한 1962년작 [하라키리]를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그 전설적인 원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박 탓이었는지 모든 의미를 웅장하고도 섬세한 필치의 영상으로 전달하던 [하라키리]에 비해 과도하게 장식적인 숏과 설명조 위주 대사로 전개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개명된 제목 '일명(一命)'에서 감지되듯 오리지널의 복합적인 주제의식 중에도 유독 휴머니즘에 무게 중심을 둔 점이다. 특히 비운의 사무라이 모토메와 그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장인 한시로를 차례로 대면, 윤리지옥 통과제의를 거치며 고뇌하는 이와이 가문 사이토 카게이 집사의 마지막 비정하고 위선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부조리한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은폐되고 유지되는지를 냉철하게 주시한 1962년작에 반해, 야쿠쇼 코지가 분한 본작의 사이토 집사는 우유부단한 휴머니스트로 묘사되면서 다소간의 온기를 불어 넣는 대신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최적화된 원작의 정신을 상당 부분 희석, 훼손하고 있다. (그의 캐릭터에 절름발이 핸디캡을 부과함으로써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를 활유한 시도 역시 효과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인공 한시로의 일당백 결투에서 1962년작은 빈 주먹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내내 강조하는데 2011년작은 대개 손바닥을 펴고 있다는 차이가 눈에 띈다.) 
 

 

 

 

본편의 실책은 뭣보다 미이케 다카시에게 연출을 맡긴 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짧은 기간 안에 효율적으로 개성적인 영화를 찍어내는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다. 허나 그것이 컬트 지향일 경우로 한정된다. 원래 필모그래피상 등락이 심하기도 했거니와, 최근작 중에 2012년 [악의 교전]과 2013년 [짚의 방패]의 대조적인 결과야말로 그의 세계를 집약·대변해주는 일종의 징표라 할 수 있다. 전자 같이 다채로운 비주류 감성을 허용하는 펑크에선 거의 미친 듯한 폭발력을 선뵈는가 하면 후자처럼 일정한 주제와 메시지의 범주를 두는 정극일 경우엔 여러 부분 타협하면서 그 컨셉과 설정에 질질 끌려 다니곤 하는 것이다. 더욱이 본작은 오리지널 각본도, 소설 각색도 아닌 레전드 고전의 첨삭 리메이크이니 하물며. 평소 성공작에서의 재기 넘치는 고어 활극 때깔 때문에 낙점된 듯한데, 비범한 스타일과 문제의식으로 번뜩이던 올타임 클래식이 전혀 다른 세계관 및 성향을 지닌 감독과의 잘못된 궁합으로 인해 그 어떤 독자적인 결도 찾아볼 수 없이 주석만 달아 늘린 휴먼드라마로 패착한 듯하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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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30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은...
할복하면 역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가 생각납니다. 할복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줬던 것 같아요.

풀무 2016-10-01 00:26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무척 연관 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십 년 쯤 지났을까요. 칼에 지다,를 각색한 [바람의 검 신선조]를 보긴 했는데 영화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던 걸로 기억돼요. 붉은돼지님 주신 덧글에 원작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