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쟁 수요가 없어지자 그 흐름에 적응 못한 - 현대사회로 치면 실업난에 처한 - 사무라이들은 기근과 병고에 시달린다. 특히 억울하게 영지를 몰수당하고 영락한 주군을 떠나 떠돌던 낭인들 경우 다른 군주를 찾아가 구차하게 사느니 무사답게 자결로 생을 마감하겠노라 할복 의식을 치르기 위한 장소를 빌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군주는 그의 결의를 치하하고 일정 금액 생활비를 내주거나 아예 가신으로 삼는 것이 일종의 상호 암묵적인 관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피치 못할 할복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어 '광언할복(狂言切腹)'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존재했다. 다키구치 야스히코의 1958년 소설 '이문로닌키(異聞浪人記)'를 원작으로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이 연출한 [하라키리]는 이러한 에도 시대의 비극적인 위장 할복 사건을 에워싸고 난립하는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하라키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액자 구성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할복을 또렷이 대비하는 동시에 아우른다. 극한 생활고 속에 병약한 아내와 갓난둥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역 유지인 이와이 가문에서 위장 할복을 시도하던 치지와 모토메(이시하마 아키라)가 간계에 걸려들어 본보기로서 실제 감행하게 되는 처참하고 굴욕적인 할복.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등진 손자와 딸의 복수 및 갖은 모독을 당하며 고통스레 숨을 거둔 사위의 명예 복원을 위해 이와이 가문에 혈혈단신 뛰어들어 고도의 심리전으로 맞서다 육탄전까지 불사, 총격 세례 직전에 스스로 산화화는 주인공 한시로 츠구모(나카타이 타츠야)의 비장한 할복. 끝으로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악용, 비정한 논리로 진퇴양난의 덫에 옭아매어 능욕하면서 치지와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이와이 가문 충복들의 자결 내지 진실을 은폐하고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상명하달식 강제 할복.
배우들 연기부터 그들을 담아낸 테이크와 숏의 장단 및 호흡 안배, 정(靜)과 동(動)의 리듬감 배합까지 완벽하다. 고바야키 마사키 감독은 '할복 의식'이라는 미명 하에 빚어지는 참극을 영화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구도와 명암, 동선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그 변질된 원칙주의 허례허식의 실체를 까발릴 뿐 아니라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인간 감정의 다양한 양태와 단면들을 치밀하게 배치한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롱테이크로 응시하는 이와이 가문의 가보, 기실 그 속이 텅 빈 채로 산 자들 위에 군림하는 붉은 갑주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울 뿐인 명분으로서의 할복 정신, 인간의 존엄과 생명마저 잠식하는 그 과장된 이념에의 맹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당대의 황폐하고 부조리한 시대상 묘사가 그대로 작금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공명하는 수정주의 사무라이극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 리뷰 상품을 잘못 연결하여 새로 링크합니다.
http://dvd.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96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