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입, 정확히는 1991년에서 1992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대학로에서 이화로 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길 어귀에 자리했던 비인가 시네마테크 '영화사랑'에서 처음 접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에 매료됐다. [증기롤러와 바이올린]부터 [희생]까지 여덟 편 전작을 감상하고도 이후 그의 영화라면 기회 닿는대로 재감상을 불사했지만 작품 이해에 늘 한계가 있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큰 특징이랄 수 있는 시공간의 전치 즉, 불연속·비선형적인 작품 세계 자체가 난해하기도 했으나 그의 성장부터 작품 활동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 특히 러시아 정교 - 코드에 대한 사전지식 결여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영화들에 조금이라도 더 파고들고자 감독이 직접 쓴 자서전 겸 미학 에세이 [봉인된 시간]을 여러 차례 정독했고 김용규 교수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까지 찾아 읽었으나 읽을 때 뿐, 책을 덮고 나면 나와 영화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음에 허탈하곤 했다. 전자는 작품 자체보다 더 까다로운 저자 직강처럼 와닿았고, 후자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수전 손택이 지적한, 작품을 파편화된 일련의 단위체로 뽑아 임의로 배열하면서 예술의 텍스트를 바꾸고 한정짓는 우를 범했달까. 영화를 텍스트로서 접근, 분석한다며 철학과 신학을 덮어씌워 박제하고 주저앉혀 놓은 형국이었다. 그에 비해서 최근에 잡고 있는 나리만 스카코브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시간과 공간의 미로]는 보다 작품 자체에 천착한, 영화 읽기와 체험하기 양쪽에 모두 충실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나리만 스카코브는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일탈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일곱 편을 각각 꿈(이반의 어린 시절), 환영(안드레이 루블료프), 환상(솔라리스), 기억(거울), 계시(잠입자), 회상(노스텔지아), 망상(희생)의 키워드로 살피고 있다. 그중 오늘 읽은 부분은 5장, '잠입자의 계시' 챕터다. 동구 유럽의 사상과 종교 및 문화에 정통한 학자의 시선을 빌어 작품을 곱씹자니 역시나 기존의 나는 [잠입자]를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지적 토양 안에서 아전인수, 상당 부분 오독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된다. 어찌 보면 실존에 입각하여 나름 당찬, 창의적인 오독이기도 하였으나 과거 리뷰의 정오(正誤) 겸 보완의 의미로 이 포스트에 틈 나는대로 나리만 스카코브의 고견을 보충, 정리해 두기로 한다.
- [잠입자]는 무엇보다 인류 문명의 폐허가 된 풍경을 탐사하는 영화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시간성의 묵시록적 종말과 지상 영역의 공간적 변형은 말년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주된 테마로 발전하여 일각에선 그의 마지막 세 작품 [잠입자], [노스텔지아], [희생]을 묵시록 3부작으로 보기도 한다.
- 당대 소련의 컬트 SF소설가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원작이지만 스탠리 큐브릭과 아서 찰스 클락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철저한 통제와 간섭 하에 쓰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했다. 초기 시나리오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원작소설 [길가의 피크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나 최종 버전에서는 초반의 발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스토커란 인물도 극적인 변천을 겪은 끝에 원작 소설의 냉소적인 방랑자에서 정신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성스러운 바보에 가까워졌다.
- '구역'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장소, 시간의 경과가 쇠퇴 일로에 접어든, 부패한 공간이다. 후기 산업 사회의 황무지이자 야생 식물의 서식지로서 한계상황 속 시간성의 묵시록적 종말을 환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구역'의 척박한 모습은 관찰자의 내면 의식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구역'은 솔라리스 행성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경이롭고 궁극적으로 '이질적인' 장소이다.
- 상징주의에 대한 배격은 잘 알려진 타르코프스키 영화 미학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항상 무언가를 의미하고, 문자 그대로 상징하는 반면, 이미지는 결코 충분히 규정되는 법이 없다. 이미지는 기표-기의의 선형적 관계 대신 무한한 가능성에 지배받기 때문이다.' 허나 타르코프스키가 주장하는 상징주의라는 용어는 미학적인 '상징'과 비교해 볼 때 다소간 오해와 혼란을 내포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가 배격한 '상징'이란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 의미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확정된 진술임에 반해, 미학에서의 일반적인 '상징'은 일대다, 다대다 관계로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즉, 타르코프스키가 이미지라고 표현한 것이 진정한 상징의 의미일 수 있다.
- [잠입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과 흙, 수풀의 이미지는 천상-지상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물의 유동성이 사물을 포용하여 '구역'의 중력을 극복한다는 환상을 주는 반면, 진흙과 수목은 그것들이 여전히 지구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킨다.
- 주인공 스토커에 의해서 인용되는 신약 구절들이 중요한 의미를 띤다. 그의 독백은 명징한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의 세계관은 노장 사상에 기반을 두지만, 그 온순한 비폭력주의 철학에는 환영적인 묵시록의 변형된 테마가 녹아 있다. 스토커는 누가복음 24장 13~18절을 암송하고, 요한 계시록 6장 12~17절의 인용을 몸소 체험하는데, 상호 텍스트적인 두 인용구는 명백히 기독교의 진리를 밝힌다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신약 인용문에는 담론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들의 신학적인 내용은 타르코프스키의 연출 의도, 미학적 전략에 따라 등장하는 영상들에 가려 존재가 무색해진다. 감독이 택한 영화 기법은 인용문의 메시지를 한층 복잡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그것을 뛰어 넘는다. 그 결과 텍스트가 제시되는, 심지어 더 이상 기의와 기표가 아닌 단일한 통합적 실체로서 기호의 총체성을 되살려 재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관객은 당혹스러운 영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의도된 의미론적 '피로'로 인해 신약 인용 시퀸스에서 중요한 것은 인공물과 자연 요소의 '의미'가 아니라 그 '질감'이 된다.
- 요한 계시록의 장르는 모종의 지식을 드러내려 애쓰지만 그 텍스트는 그것을 감추려는 구조다. 이 대단히 애매모호한 특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결정적으로 비밀을 드러내는 일은 끝내 보류된다. 판독이 불가능해진 텍스트는 의미의 영역에서 질감의 영역으로 전환되고 화면의 피사체들에 의해 그 물질적인 존재감이 의미론적 잠재성보다 중요해진다. "요한이 우리에게 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요한 계시록의 의도이다. 혹시 환원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 아닐까? 요한 계시록의 요체는 우리의 지식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희망을 남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무지 안에 희망이 있다. 지식은 천박하고 무지는 고귀하다." 타르코프스키가 요한 계시록을 대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관념과 예술적인 이미지 차원에서 이 신성한 텍스트와 다면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미학은 단일한 의미(그가 이해하는 용어의 개념에 따르자면 엄격한 상징주의)의 독재에 맞서 싸워 초상징주의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 요한 계시록 에피소드는 곧바로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인용문인 누가복음의 엠마오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 속 인용문은 고유명사 표현을 누락시켜 성경의 원전에서 벗어난다. 고유명사가 텍스트에서 일종의 말소와 추방을 당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상당 부분 낯설어짐과 동시에 '인식의 실패에 관한 텍스트'임이 강조된다. 사실 고유명사는 영화 [잠입자] 전체에서 철저히 부재한다. 스토커, 작가, 교수, 스토커의 아내, 스토커의 딸... 모두가 별칭으로 불린다. 비밀스런 담론에서 이름, 정의, 기록 등이 모두 제거되고 의미의 엄격한 한계를 벗어나면서 관객은 진리의 현현을 눈앞에서 묵도하고도 진실을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한 성경 속의 두 제자 꼴이 된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충분히 깨어있지 않은 것이다. 카메라는 묻는다. '당신들은 깨어 있는가?'라고.
- 누가복음 시퀸스는 실제로 어떤 현상을 새로운 견지에서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 관한 이야기다. 누가복음 인용문에 나타난 바대로 '알아보는' 능력은 정신적인 자질이다. 일상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비정상적 인식인 것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잠입자]의 '구역'은 그저 우리가 사는 장소일 뿐일 수도 있다. 그 속에 비일상적인 현실,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고 본래 이 영역이 진정한 현실이며 일상생활에 매몰된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란 주장이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그저 수많은 종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잠입자]를 통해서 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