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잔, 더러울 예, 잔예(殘穢). 더러움이 남다, 부정을 타거나 원념(怨念)이 서린 장소에서 연쇄적으로 재앙이 벌어지는 현상. 원작자 오노 후유미가 지어낸 신조어라 한다. 화자 겸 주인공 '나'(다케우치 유코)는 독자들이 제보한 체험이나 지역 전설을 토대로 잡지에 괴담 칼럼을 연재중인 소설가. 어느 날 새로 이사간 아파트 다다미방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음에 의문을 품고 사연을 보내온 건축디자인 전공 대학생 쿠보(하시모토 아이)와 함께 미스터리를 파헤치다가 결국 그녀도 저주에 말려들게 된다는 줄거리다.
본작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이다.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 가옥에서 살던 코이도 영감의 저장강박증이 실은 환영과 환청의 공포에 질려 원혼이 출몰할 가능성이 있는 빈 공간은 모두 쓰레기로 채워 넣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설정.
[잔예 - 살아서는 안되는 방]은 그 제목에서도 연상되는 바, [주온]을 쏙 빼닮은 영화다. 과거 참극에서 빚어진 원한이 '집터'를 진원지 삼아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며, 해당 조건에 걸려든 자는 선악 여부 관계없이 변괴를 맞는다. 차별점이 존재한다면 서로 별 연관없어 보이던 환담들이 그 배후의 근원을 역추적, 캐내면 캐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되는 구성 방식에 있다. 다다미방에서 들려오던 빗자루로 뭔가 쓸어담는 듯한 기척은 아파트가 세워지기 훨씬 전 해당 집터에서 살던,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기들 울음 환청에 목매달아 자살한 여인의 옷자락이 흔들리는 시체를 따라 바닥에 스치는 소리였으며, 그 아이들의 죽음은 사람을 해치고 집을 불태우라 속삭이는 원귀에 홀린 자의 소행이었다. 원귀의 정체는 100년 전 화재 진압을 이유로 입구를 틀어막은 탄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한 광부들의 한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광부들의 원혼이 작품의 주된 흐름과 별개로 여겨졌던 프롤로그 '갓파' 미라 에피소드와 이어지면서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저주의 순환고리를 이룬다.
이 장면 역시 섬뜩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사건에 그닥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던 잡지사 직원에게까지 죽은 광부들의 망령이 찾아온다. 다만, 모든 재앙의 원흉이랄 수 있는 탄광 사건으로부터 그 어떤 맥락의 함의도 이끌어내지 않고 그저 중립적인 공포 소재로만 다룬 점이 아쉽다.
'저주의 내막을 들은 자도, 전한 자도 죽는다.' ... [잔예]의 결정적인 구멍이라 여겨진 부분은 원작 소설과 별도로 추가했다고 알려진 에필로그다. 넘치는 의욕을 주체 못하겠다는 듯 온갖 종류의 기담들을 쓸어담은 플롯 와중에 별별 인물들까지 다 난입, 산만하게 이어지는 몸통 전개야 전형적인 호러 양식에서 빗겨난 현장 취재 르포 형식에 가까워 나름 참신하게 볼 수 있었다. 허나 저주의 매듭이 끊기면서 모두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이던 영화가 느닷없이 돌변, 단초 제시도 없이 2년 뒤에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씩 변을 당하면서 악순환이 되풀이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순간 마치 [주온]에 [링]과 [데스티네이션]까지 우격다짐으로 조잡하게 뒤섞은 카피본처럼 돼버리는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꽤 많이 갖췄음에도 불구, 다 보고나면 별반 잔상이 남지 않는 작품이다. (2016년, IPTV. ★★★)
P.S. 비록 직접 읽진 않았으나 목차를 살펴볼 때 원작소설 상으론 역사·정치·사회적 콘텍스트 위에 장르성이 구현됐을 가능성이 크다 (단서 / 금세기 / 지난 세기 / 고도성장기 / 전쟁 후 I·II / 전쟁 전 / 메이지·다이쇼기 / 잔재). 짐작컨대, 버블경제 부흥과 붕괴 및 그 사회적 여파의 인자들은 이미 먼 과거부터 존재했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며 증식했으리라는. 흡사 작품 속에서 돌고 도는 저주의 순환 구도처럼. 영화에선 그런 은유 내지 맥락이 전혀 짚이지 않는다.